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30)화 (130/144)

130화

릴리엇은 종종 산책을 같이 하자며 아체리아를 불러낼 때가 많아졌다.

둘은 관심사가 무척 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함께 공작저의 정원이나 숲을 걸으면서, 혹은 광장이나 번화가를 산책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릴리엇은 아체리아의 신분을 개의치 않았고, 아체리아도 그런 릴리엇에게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예비 공작 부인과, 솜털이 갓 돋은 병아리처럼 귀염성스러운 란츠호프 후작 영애가 사이좋게 붙어 다니더라는 것은 이제 특별한 소문 거리도 되지 못했다.

“어제는 바람이 많이 불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네. 아체리아, 너 안 춥니?”

“네, 괜찮아요. 전 추위를 많이 타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아체리아는 릴리엇에 비해 확연히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걷는 릴리엇은 토끼털로 만든 목도리에 모자, 장갑까지 끼고 있어 상대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겠다. 난 겨울은 정말 질색이야. 하루 종일 탕파를 끌어안고 있어도 손이 시린걸.”

“생강이나 계피로 만든 따뜻한 차를 드세요. 그럼 몸이 좀 덥혀질 거예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집 주방장이 생강 꿀절임을 만들었다고 했어. 오늘 당장 가서 차를 좀 끓여 달라고 해야겠네.”

목도리 밖으로 드러난 릴리엇의 얼굴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두 사람은 광장 근처를 조금 걷다가 근처의 식당 겸 카페로 들어가 몸을 녹이기로 했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카페 안은 한산했다. 조용한 곳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뜨겁게 데운 초콜릿을 마신 릴리엇이 말했다.

“여기서 녹아내릴 것 같아. 초콜릿처럼.”

“릴리엇이 녹으면 그건 누가 다 치우겠어요? 안 돼요.”

“뭐라고! 이럴 땐 걱정을 해 줘야지.”

“제 나름대로 걱정하는 말이었어요.”

아체리아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자 릴리엇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참, 나 할 이야기가 있어.”

감초를 넣은 허브티를 마시던 아체리아가 찻잔 너머로 눈을 슬쩍 올려 떴다. 맞은편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릴리엇의 표정은 뭔가를 꾸미는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뭔데요, 릴리엇?”

“나, 페터랑 결혼하기로 했어.”

순간 찻잔을 내리던 아체리아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페터…… 드라인 남작님의 영식이랑요?”

“그래, 네가 아는 그 페터 말이야.”

“아니…… 이렇게 갑작스럽게요?”

릴리엇은 아체리아의 당황한 표정이 왠지 만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야기는 예전에 페터가 먼저 꺼냈어. 내가 고민하느라 여태까지 미뤘던 거지. 그냥 그럴 때가 된 것 같고…… 페터의 말도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여행에서 돌아온 페터가 약간 무례하다 느껴질 정도로 불쑥 쳐들어와 했던 말을, 릴리엇은 오래도록 곱씹고 고민했다. 오랜 기다림이기는 했지만, 페터는 결국 릴리엇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축하해요, 릴리엇.”

“고마워. 아체리아가 공작 부인이 되면 같이 살롱 파티를 열어도 좋겠지? 재미있을 거야.”

“차랑 다과를 내놓고, 피아노 치고, 수다 떠는 그런 거요?”

릴리엇이 소리 죽여 웃었다.

“맞아, 그런 거야. 아체리아가 직접 구운 과자 같은 걸 내어 주면 귀부인들이 난리가 날걸.”

아체리아는 여전히 사교 파티 같은 것에 적극적으로 참석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릴리엇을 통해 안면을 튼 아가씨들이 몇몇 있었고, 그들이 이따금 아체리아 앞으로도 파티 초대장을 보내오긴 했지만 아직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클라우스랑 똑같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려고 생각하지 마. 뭐, 그런 게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전 클라우스 님과 결혼을 하더라도 여태껏 하던 것처럼 맛있는 거나 잔뜩 만들고 싶어요. 틀어박혀서 뭘 하는지 모를 공작 부부라고 소문이 날까요?”

“도대체 공작저에서 뭘 하기에 매일같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나, 그게 더 궁금할 거야. 클라우스가 아직도 성장기인 것 아니냐고 떠드는 사람들도 나올 테지.”

* * *

릴리엇과 헤어진 아체리아는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만찬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릴리엇은 슬슬 요리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쉬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아체리아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주방에 있고 싶었다. 클라우스와 진짜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안 돼요, 요리장님.”

아체리아는 주방을 막아선 요아킴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안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주방에 들어가는 걸 막을 사람이 어디 있어? 비켜, 요아킴.”

아체리아가 억지로 밀고 들어가려 했지만 요아킴은 결사적이었다. 심지어 주방 문을 꽁꽁 닫아 버리기까지 했다.

“요아킴!”

“정말 안 된다니까요. 부주방장님께서 잘 지키라고 하셨어요. 전 요리장님 말이라면 뭐든 따르지만, 오늘만큼은 부주방장님 말씀을 들어야 해요.”

“대체 안에 누가 있는 거야? 뭘 하고 있기에 이래?”

요아킴은 주근깨 가득한 뺨을 실룩이며 씩 웃었다.

“기다려 보시면 알아요. 아, 루비! 요리장님을 방으로 모시고 가 줘!”

때마침 지나가던 루비는 요아킴의 말을 듣고서 잘됐다는 듯이 아체리아의 손목을 마구 잡아끌었다.

“루비! 너까지 왜 이래!”

아체리아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황당해했지만, 요아킴은 물론이거니와 루비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버둥거리다시피 하며 방까지 끌려간 아체리아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루비는 생글생글 웃으며 화장대 앞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자, 요리장님! 여기 앉으세요.”

“루비, 대체 이게 무슨 일…….”

“공작님이 오실 때까지 머리를 새로 빗을까요? 아, 드레스도 갈아입고요!”

“아니, 루비! 넌 하녀가 아니라 요리사잖아. 머리를 빗는 건 나 스스로도 할 수 있…….”

“와! 요리장님! 이 자개빗 정말 예쁘네요! 제가 머리를 빗겨 드릴게요. 자, 자. 얼른요, 얼른!”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네.

루비는 아체리아가 황당해하건 말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몇 번 해 봐서 그런 건지, 타고난 손재주 덕분인지 빗질을 하는 루비의 손은 거침없으면서도 세심했다.

“요리장님은 어쩌면 이렇게 목이 길고 하얗죠? 꼭 백조 같아요.”

“……간지러우니까 그만 쓰다듬지 그러니?”

“살결도 꼭 아기처럼 보들보들하시다니까요. 이런 피부는 역시 타고나야 하나요?”

루비는 아체리아의 딴지에 아예 귀를 닫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체리아가 뭐라고 말을 하건 말건, 반응을 하건 말건 목이며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빗기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지막으로 하얀 히아신스 꽃 모양의 장신구를 귀 옆에 꽂자, 거울 속 아체리아는 짓궂은 숲의 요정처럼 보였다.

“잠깐만, 뭔가…… 단내 같은 게 나는데? 누가 주방에서 과자라도 구워?”

“네? 저, 저는 모르겠는데요.”

“요아킴 녀석, 가만 안 둘 거야.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빗을 쥔 채 서성거리고 있던 루비의 얼굴이 의아할 정도로 활짝 펴지는 것이 보였다. 달려가 문을 연 루비 너머로 클라우스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클라우스 님?”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비는 후다닥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클라우스 님…… 그게 도대체 뭐예요?”

클라우스의 손에는 클로시를 덮은 접시가 하나 들려 있었다. 프레드가 새로 만든 요리인가? 그런데 그걸 왜 클라우스가 가져왔으며, 저 떨떠름한 표정은 또 뭐지?

“어디 갔다 왔어?”

묻는 말에는 대답 없이 제 할 말만 하며,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옆에 앉았다. 그는 아체리아가 클로시로 손을 뻗자 재빠르게 몸으로 막았다.

“릴리엇과 산책을 하고 왔어요. 이게 도대체 뭐예요?”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클라우스는 여전히 아체리아의 손을 몸으로 이리저리 막으면서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펼쳤다.

“미리 말해 두는데, 변명 같긴 하겠지만 말이야. 난 처음이었어.”

“아니, 도대체 뭐가요…….”

클라우스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 거참, 말도 많으셔! 저게 뭐냐니까요? 프레드 씨가 만든 요리 아니에요?”

“아니야, 이건…….”

아체리아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접시를 자기 앞으로 홱 끌어왔다. 당황한 클라우스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클로시를 여는 아체리아의 손이 열 배는 더 빨랐다.

접시 위에 놓인 것을 본 아체리아의 표정이 기묘해진 것과, 클라우스가 얼굴을 싸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클라우스 님, 이게…….”

이게 도대체 뭐죠. 그렇게 물으려던 아체리아는 갑자기 입술을 꽉 깨물면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귀퉁이는 부스러지고, 가운데는 푹 꺼져서 볼품이 없다. 크림을 균일하게 바르려고 시도는 했던 것 같은데,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옆면의 시트가 다 드러났고, 과일은 무슨 조약돌을 던져 놓은 듯 들쭉날쭉 올라간 이것은…….

“이거, 설마 케이크예요? 클라우스 님이 구우셨어요?”

“……그래, 맞아.”

“저 주시려고요? 아니, 갑자기 웬 케이크를 다 만드셨어요?”

얼굴이 벌게진 클라우스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생일 이야기를 했잖아. 생일…… 축하를 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

침묵이 이어진다. 그제야 힐끔 고개를 든 클라우스와 아체리아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체리아가 정신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까지 비웃을 일이야?”

“아하하! 하…… 아, 맙소사!”

“못 만들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처음……!”

아체리아의 팔이 클라우스의 목을 확 끌어안아 당겼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던 클라우스는 이내 아체리아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감미로운 감촉에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비웃은 거 아니에요. 기뻐요. 정말로요.”

“……그냥 사 올걸 그랬어. 이름난 제과점에서…….”

“아니야, 이게 더 좋아요. 같이 드실래요? 접시까지 싹 핥아 먹을래.”

“핥지는 말아 줘.”

아체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케이크 조각을 푹 찍어 클라우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설탕과 버터의 달콤한 맛이 입 안에서 행복하게 뭉그러지며 녹아내렸다.

창문 밖으로 소담한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