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29)화 (129/144)

129화

“그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선왕과 닮은 부분이 한 치도 없어야 한다는 거죠. 나의 통치, 나의 시대는,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 두고 싶어요. 나는 그 핏줄과 관련이 없어요. 있는 것은, 나 자신뿐입니다.”

그 말을 할 때, 필리파의 표정에는 오만한 냉혹함이 살얼음처럼 덧씌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서 결점을 발견할수록 선왕의 선택에 대해 곱씹게 될 겁니다. 누군가는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요. 혹은, 선왕의 선택을 내가 종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폐하, 그것과 이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폐하의 안위를 위협하는 자들을 색출해 내는 데에 있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색출은 색출대로 하되 조용히 하겠다는 이야기예요. 나는 굳건해야 해요, 사촌.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나를 흔들 수 없음을 보여 주어야만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떠들지 않아야 합니다. 조용히 내 할 일을 할 뿐이죠.”

에른스트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몇 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로 인해 금방이라도 흔들릴 것 같던 필리파의 왕위는 단풍이 비처럼 내릴 무렵 겨우 안정되었다.

동부를 근거지로 삼아 필리파를 몰아내기 위해 작당 모의를 했던 보수파 귀족들은 대부분이 그 힘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왕궁에 살아남은 자들은 숨을 죽였다.

그녀는 왕궁에 남아 있는 이복형제들을 대부분 나라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필리파를 저주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필리파는 개의치 않았다.

* * *

계절이 바뀌고, 베르데사에도 겨울이 왔다.

“요리장님, 뭐 하세요?”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자 공작의 약혼녀인 아체리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기를 다져 수북하게 쌓아 놓은 산을 본 루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소시지를 좀 만들까 싶어서.”

“소시지요?”

루비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아체리아의 옆에 와 쪼그리고 앉았다. 이제 막 견습 요리사 딱지를 뗀 지 열흘쯤 된 그녀는 무슨 일에든 의욕이 넘쳤다.

“저도 도울게요!”

“좋아, 그러면 일단 속부터 만들까?”

아체리아는 약간 달콤한 소시지와 매콤한 소시지, 두 가지를 다 만들기 위해 속 재료를 나누었다. 잘게 다져 차갑게 만들어 놓은 고기와, 족히 열 가지는 될 법한 향신료를 조리대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커민과 정향, 후추를 뜨겁게 볶는 과정이 필요했다. 고소하면서도 코끝을 간지럽히는 특유의 향이 나기 시작할 때쯤, 불을 끈 아체리아는 다진 고기가 든 볼 안에 그것을 주르르 쏟았다.

“이제 주물러서 섞어 줘.”

루비는 찬물에 씻어 빨갛게 언 손을 하고서 고기 반죽을 열심히 뒤적거려 주무르기 시작했다. 커민과 정향 이외에도 넛맥과 바질이 추가되었다. 달콤한 소시지에는 섬세하고 달콤한 향을 내는 마조람이, 매콤한 소시지에는 기니아페퍼와 파슬리가 첨가되었다.

창고에 쌓아 두고 보관할 만큼 많이 만들 만한 양은 아니었기에 그리 힘이 들지는 않았다. 반죽이 얼추 섞이자, 아체리아는 미리 공들여 씻어 놓았던 돼지와 양의 창자를 꺼냈다.

“이제 조금씩 밀어 넣어서 모양을 만드는 거야. 너무 많이 넣다가는 찢어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긴 나무 막대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속을 채워 넣기 시작하자 홀쭉하던 창자가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한 뼘 길이로 돌려 모양을 잡으니 완전히 소시지의 형상을 갖추었다.

“저, 소시지는 처음 만들어 보는 것 같아요.”

완성한 소시지를 구울 준비를 하던 아체리아가 싱긋 웃었다.

“귀족들은 소시지를 잘 안 먹으니까. 아마 공작님도 드셔 본 적이 없을 것 같은데.”

“공작님은 내장 싫어하시잖아요. 이것도 내장으로 만들었다고 안 드시는 건 아니겠죠? 열심히 만들었는데.”

“내장이라는 걸 모르게 하지, 뭐.”

널찍한 팬에 기름을 두르고 갓 만든 소시지를 줄줄이 얹으니 곧장 지글대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주방 바깥에까지 냄새가 퍼졌는지, 다른 고용인들이 주방 안을 기웃거리다 군침을 삼키며 이런저런 참견을 해 왔다.

“뭐야, 소시지 만든 거야?”

“배고파 죽겠다. 간식으로 먹을 수 없을까?”

“몇 개 없긴 하지만 조금씩은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기다려요.”

그때 요아킴도 뛰어 내려왔다.

“앗, 요리장님! 저 빼고 이런 걸 만드시는 게 어디 있어요!”

“루비가 도와줬어. 모처럼 왔으니, 소스 좀 만들어 줘. 마요네즈에 케이퍼, 코르니숑, 겨자를 다져 넣으면 돼.”

고개를 끄덕인 요아킴이 곧장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쯤, 소시지에 낸 칼집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름이 끓으면서 고기가 익어 가는 냄새가 온 주방을 가득 채웠다.

“엇, 이게 뭐야? 소시지잖아? 언제 이런 걸 만드셨어요?”

뒤늦게 내려온 프레드도 입맛을 다셨다. 아체리아는 씩 웃기만 하고는 루비가 준비한 접시 위에 소시지를 두세 개씩 올려 담아 주었다.

“요아킴이 소스를 만들었으니 곁들여서 같이 먹어요. 배부르게 먹진 못하겠지만 간식 삼아서, 한 삼등분 정도로 나누면 그래도 맛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요아킴이 소시지 먹을 사람들을 찾아 달려 나간 사이, 아체리아는 새 접시에 달콤한 소시지와 매콤한 소시지를 각각 하나씩 얹은 뒤 소스를 곁들여 위층으로 올라갔다.

“클라우스 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책상 한쪽에 작은 그림을 기대어 놓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접시 위에 놓인 것을 보자마자 그는 이게 뭐냐는 듯이 미간을 슬금 찡그렸다.

“괴상하게 생긴 걸 가지고 왔군.”

“소시지예요, 소시지.”

핀잔을 주듯 말한 아체리아가 접시를 내려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건넸다. 그래도 클라우스는 좀처럼 식기를 집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소시지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왠지 내가 싫어하는 맛일 것 같은데.”

“안 드셔 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드셔 보고 말씀하시지.”

“이 껍질은 대체 뭘로 만든 거야?”

돼지랑 양의 창자라고 하면 입도 대기 전에 싫다고 밀어내겠지. 아체리아는 헛기침을 했다.

“비밀 재료입니다. 아무튼 맛있으니 드셔 보시라고요.”

“비밀이라고 하니까 더 수상쩍잖아.”

투덜거리던 클라우스는 드디어 식기를 쥐고 소시지를 잘랐다. 단면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갖가지 향신료의 다양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긴가민가한 표정을 한 채 소시지를 한입 베어 문 클라우스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아체리아는 웃음을 참느라 손등을 꼬집어야만 했다.

“어때요? 맛있지 않으세요?”

“……보기보다는 괜찮네.”

“보기보다 괜찮다니! 이게 얼마나 공이 많이 들어가는 건데 보기보다 괜찮다고 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맛은 있었다. 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에 구워져 바삭하고 쫄깃한 겉면의 식감이 우선 독특했다. 살짝 탄 부분을 씹는 순간 속에 고여 있던 향긋한 육즙이 터져 나오고, 그 뒤를 이어 갖가지 향이 소금 특유의 짭조름한 맛과 함께 조화롭게 어울렸다.

맛을 돋우는 데에는 소스도 한몫 거들었다. 고소하고 기름진가 싶으면서도 새콤한 맛이어서, 자칫 부담스러울 수 있는 소시지의 맛을 산뜻하게 중화시켜 주었다.

“다 먹으면 뭘로 만든 건지 알려 줄 거야?”

“꼭 원하시면 지금도 알려 드릴 수는 있는데요.”

“아냐, 됐어. 말하지 마. 모르고 먹는 게 훨씬 더 맛있을 것 같으니까.”

아체리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깨물면서 클라우스의 옆에 앉아 소시지 한 조각을 날름 집어먹었다.

“날씨가 추워졌으니까 오늘 저녁에는 따뜻한 스튜를 끓여 볼까 싶어요. 담백한 맛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 강한 맛이 좋으시겠어요?”

“담백한 게 좋겠어. 그리고 네가 며칠 전에 했던 생선 요리를 또 먹었으면 좋겠는데.”

“도미 요리 말씀하시는 거죠? 오늘은 도미가 들어오지 않았어요. 대신 괜찮은 대구가 들어왔으니 아쿠아 파차를 만들어 드릴게요. 허브를 듬뿍 넣고, 몸이 따뜻해지게요.”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종알종알 떠드는 동안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은 끊임없이 아체리아의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눈길은 연신 그녀의 시선 끝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불자 유리창이 덜컹이며 흔들렸다. 아체리아는 여름과 가을에 비해 퍽 희어진 듯한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잖아요. 곧 공작님의 생일이에요.”

클라우스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양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생일이 즐겁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자신의 생일 준비로 공작저가 분주할 시기가 되어도 그는 늘 혼자 심드렁했다.

“네 생일은 언제야?”

아체리아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깨를 으쓱였다.

“겨울이에요.”

“겨울, 언제?”

“잘 모르겠어요. 공작저에 온 뒤로는 따로 축하한 적이 없었으니까…….”

“몇 월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아마도 이맘쯤일 거예요. 첫눈이 오기 전에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있거든요. 축하라고 해 봐야 별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날은 하루 종일 행복했죠.”

말을 잇는 아체리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클라우스는 어깨 아래로 굽이치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럼 네 생일 파티를 할까?”

“제 생일 파티라고요?”

“그래. 케이크도 커다란 걸로 준비하고 사람들도 불러서.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고…….”

아체리아는 눈동자를 움직여 머리카락에 닿은 클라우스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잠깐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에이, 요란한 생일 파티는 싫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북적북적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고 있으면 얼떨떨해서 뭐라고 해야 하는지도 까먹을걸요.”

클라우스 역시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런 생일 파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공작이 된 이후부터는 한 번도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생일을 축하한 적이 없었다.

“그럼 요란하지 않은 생일 파티는 괜찮고?”

“생일 파티 같은 걸 해 본 적도 없는데, 안 해도 괜찮아요. 그보다는 공작님의 생일 파티 준비가 우선이죠.”

생긋 웃은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람 부는 창가를 한 번 돌아보고, 빈 접시를 든 채 방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