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아체리아가 대답을 고민하자, 가만히 선 채 아무런 말이 없던 마일론이 끼어들려는 듯이 슬쩍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봐도 독특한 남자였다. 아체리아는 잘 몰랐지만, 보통 의상실의 디자이너들이 귀족들의 옷을 만들어 줄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참견하며 한 벌이라도 더 팔아 보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마일론이라는 남자는 시종일관 조용했다. 마치 거래가 성사되든, 성사되지 않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진줏빛은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몇 벌이 필요하지요?”
릴리엇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러 벌 만들어서 갈아입으면 좋겠지만 시간도 좀 부족하고, 뭣보다도 아체리아 네가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
아체리아는 바로 그렇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엇은 잠깐 고민하다가 마일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 벌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마일론 씨?”
“물론 괜찮습니다. 란츠호프 아가씨께서 주선해 주신 거래를 위해 다른 고객 분들의 예약을 전부 뒤로 미루었으니까요.”
“고마워. 그럼 세 벌로 하자. 아체리아, 다른 색깔도 한번 골라 봐.”
조각 천들을 들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진줏빛 실크와 짙은 녹색의 브로케이드 비단, 그리고 붉은색 호박단으로 결정이 되었다. 너무 화려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아체리아를 릴리엇이 달래 주었다.
“네 약혼식이잖아. 눈에 띄면 띌수록 좋지.”
천을 고르고 난 다음에는 치수를 재야 했다. 하녀들이 파티션을 가지고 오자, 마일론은 아체리아를 데리고 그 뒤에 가서 섰다. 얇은 이너 드레스 한 장만 입고 남자 앞에 서 있으려니 저절로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마일론은 무심한 표정으로 줄자만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었다. 목둘레에서부터 목 길이, 어깨너비, 팔 길이와 손목의 둘레…… 드레스 한 벌 만드는 데에 이렇게 많은 품이 들어간다는 걸 아체리아는 처음 알았다.
“좋으시겠군요.”
침묵의 치수 재기가 이어지던 찰나 마일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좋다니요?”
“당신은 공작저의 요리사였다지요? 그런데 공작님과 약혼을 하게 되었으니 좋으시겠다고요.”
“어, 음…… 뭐. 공작님이라서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만요.”
“제 말이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말투가 원래 좀 딱딱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일론의 태도는 그다지 이해를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그가 허리둘레를 재고 있는 동안 잠시 숨을 참았다가, 다리 쪽을 측정하기 위해 몸을 숙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힘든 일이 많겠죠. 평민과 귀족은…… 그러지 말라고 정해진 건 아니지만 흔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마일론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이라면 왠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체리아의 말에, 마일론은 잠시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죠.”
“과거형이네요.”
“네. 일찌감치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디자이너 따위가 다가가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계신 분이라 생각해서요.”
“그분이 귀족이었나요?”
마일론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길쭉한 사각형이 비스듬히 맞물린 틈새로, 카탈로그를 보고 있는 릴리엇의 모습이 보였다.
치수 재기가 끝난 후 마일론은 곧 돌아갔다. 가봉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서.
“마일론은 손이 아주 빠르고 솜씨가 좋거든.”
릴리엇이 말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예약을 뒤로 미뤄 줘서 다행이야. 사실, 수도에는 그 사람을 따라갈 만한 실력자가 아직 없단다. 아체리아 너도 앞으로는 이런 것에 대해 잘 알아 둬야 해.”
“옷이 자꾸만 늘어나기만 하는데, 그냥 이걸 돌려 입으면 안 되나요?”
지쳐서 늘어진 아체리아의 말에 릴리엇이 작게 웃었다.
“너야 그러고 싶겠지만 그럴 수가 없어. 귀족들은 늘 새로운 옷이 필요하니까.”
“그러다가는 옷장이 꽉 차게 될 텐데요?”
“유행이 너무 지났거나 입지 않게 된 옷은 하녀들에게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도로 팔 수도 있어. 낡은 드레스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지.”
“제가 정말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돼요, 릴리엇.”
턱을 괸 채 한숨을 쉬는 아체리아의 어깨 위로 릴리엇의 부드러운 손이 와 닿았다.
“걱정할 거 없어. 하다 보면 익숙해지게 돼 있으니까. 너도 처음부터 요리를 잘한 건 아니었잖아. 그것과 똑같아.”
* * *
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약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온 사교계를 휩쓸었다.
귀족들의 반응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연 요리사 출신이었던 아이가 공작가의 살림을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 이외에는 ‘그럴 줄 알았다’거나 ‘예비 공작 부인이 벌써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그래도 준비가 무난히 잘 되어 가는 것 같아 다행이네.”
점심 식사를 함께한다는 걸 핑계 삼아 온 에른스트의 말이었다. 아체리아는 이 순간에도 분주한 발소리가 오가는 홀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호즈만 집사장님이 굉장히 바쁘세요.”
“그가 너희 집의 모든 일을 거의 다 맡아서 하니까.”
제 몫의 차를 천천히 마시고 있던 클라우스가 턱을 괴면서 에른스트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오늘 갑자기 어쩐 일이야?”
“말했잖아. 같이 식사나 할까 싶어 왔다니까.”
“아닌 것 같은데.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아닌가?”
그 순간, 시종일관 빙그레 웃고 있던 에른스트의 입매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살짝 경직되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클라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체리아는 잠시 나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럼 두 분이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이만…….”
“아냐, 그냥 여기 있어.”
서둘러 일어서던 아체리아가 엉거주춤 움직임을 멈춘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클라우스가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아체리아도 들어야 할 문제 같은데, 왜 내보내려는 거야? 그녀도 알아야 하는 거라면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게.”
“자네 혹시 내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생겼나?”
에른스트는 씁쓸하게 웃고는 아체리아를 향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클라우스의 말이 맞아. 그래, 어쩌면 너도 알아야 할 이야기로구나. 앉아.”
아체리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에른스트가 말을 이었다.
“동부 쪽의 보수파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네.”
클라우스의 표정이 변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그렇겠지. 수도에 연결해 놓았던 자기들의 세력이 다 꺾여 나가지 않았나? 데르송 후작도, 시드레 백작도 모두 작위를 몰수당했으니 마음이 급해질 만도 하지.”
“그게 도대체 약혼식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에른스트는 클라우스를 죽 훑어보듯 시선을 주었다가 팔짱을 끼며 몸을 약간 젖혔다.
“자네 약혼식에 폐하께서 참석하시지 않나.”
“그들이 약혼식에서 폐하를 해치려 할 것으로 보나?”
“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니까. 공작의 약혼식에 왕을 초대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왕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난다. 폐하와 자네 모두를 공격할 만한 딱 좋은 조건 아닌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체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에른스트의 말을 정리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혼식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거라고? 필리파 폐하께?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움직임이 포착된 이상 경계할 필요가 있지.”
“보는 눈이 많은데, 설마 눈앞에서 대놓고 암살을 하려 들까?”
“보는 눈이 많으니 더욱 시도하기 좋은 걸세.”
그때 아체리아가 주춤거리며 손을 들었다. 클라우스와 에른스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저기, 어…… 암살이라니요? 왜 갑자기 이런 살벌한 이야기가 된 거지요?”
“말한 대로야, 아체리아. 폐하를 노리는 세력들이 아직 도처에 암약 중이다. 그들은 네 약혼식을 노려 폐하를 해치려 들 거야. 그러니 너도 미리 알고 있는 게 좋겠구나.”
틀림없이 소란이 벌어지리라는 듯, 확신에 찬 말투였다. 아체리아의 안색이 나빠졌다.
“폐하께 위험한 일이 생길 거라고요? 그걸 알면서 이대로 진행할 수는…….”
“아니, 진행해야 해.”
클라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왜 진행해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우리 쪽에서 먼저 꼬리를 마는 건 저쪽에게 시간을 벌어 주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까. 기회가 왔을 때 처단해 버리는 게 오히려 나아. 뿌리를 뽑아야지.”
“하지만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거야. 하지만 클라우스와 똑같은 생각이신 거지.”
에른스트는 그러니 어쩌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체리아는 그 사고방식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약혼 당사자 중 한 명인 클라우스가 무조건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야 더 보탤 말이 없었다.
클라우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동부 쪽의 귀족들이 새로이 왕으로 옹립할 자를 찾아내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풍문은 이전에 한 번 들은 바 있었다.
필리파는 아마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런 기회를 기다려 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서 판을 크게 만드는 것. 공작의 약혼이라면 때마침 제격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공작저로 몰려들 것이었다. 화려한 장식과 분주한 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숨어들 곳이 많다고 여기리라.
그리고 필리파가 마음을 놓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저들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네. 우리 쪽에서 추적하고는 있지만, 동부가 워낙 폐쇄적인 곳이어야지. 자기들끼리 성을 짓고 틀어박힌 지 오래되었으니까.”
“이번 기회로 그 성의 문을 열어젖히시려 하는 거군, 폐하께서는.”
“그러니 자네 초대도 선선히 수락하신 게 아니겠나?”
즉, 필리파의 머릿속에는 이미 비스몽트 공작가를 철저히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들어 있었다는 말이다. 클라우스는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마른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거 참, 어처구니없는 손님을 초대한 꼴이 돼 버렸어.”
“자네도 폐하를 이용하려 했을 테니 하나씩 주고받은 셈 치게.”
“수지가 너무 안 맞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