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좋네.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도록 하지.”
필리파가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자 클라우스의 표정에는 일말의 승리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자신의 얕은 수작을 그녀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다른 말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는 것은, 앞으로도 왕가와 비스몽트 공작가의 관계가 긴밀하게 이어져 나갈 것임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다.
아체리아에게는 네가 싫으면 사교계에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둘 다 두문불출하며 살아가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 온 클라우스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클라우스만은 그럴 수 없었다.
언젠가 공작 부인이 되더라도, 아체리아를 전쟁터 같은 사교계 한복판에 아무런 무기도 없이 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교계에서 무시받지 않는 귀부인들은 대개 몇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귀부인 자신의 사교력과 정치력이 특출나게 뛰어난 것이고, 두 번째가 남편이나 친정의 세력이다.
그 외에 유행에 민감하다거나 남의 약점이 될 만한 소문을 잘 알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조건도 있지만, 애초에 아체리아는 유행에도, 소문에도 큰 관심이 없이 20년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공작 부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그런 데에 관심을 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아체리아에게 사교계에서 쓸 수 있을 여러 가지 기술을 혹독하게 연마시키란 말인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결국 클라우스가 생각한 ‘아체리아를 보호할 방법’이란, 자신이 그녀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비스몽트 공작의 이름값이 결코 값싼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온갖 악평과 걱정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 와서 그것을 돌이키려면 까마득한 시간과 수고가 들 것이었다.
그럼에도 클라우스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약속했으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돼.’
아체리아는, 빚으면 빚는 대로 모양이 달라지는 밀가루 반죽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 병에나 들어가 있기만 하면 만족하는 물 같은 사람도 아니었다.
클라우스가 바라보는 그녀는 불꽃 같았다. 어디에도 가둘 수 없고, 정형화할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그 열정이 무엇을 향하건 자신은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 했다. 그런 것을 약속함으로써 시작된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필리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자, 그건 그렇고…….”
필리파는 여러 의도가 담긴 시선으로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끝을 끌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열 때면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약간 긴장한 채 필리파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체리아, 이전에 데르송 후작이었던 자의 영지 일부를 네가 양도받기로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싶어 멍하니 있던 아체리아의 눈에도 그제야 반짝 생기가 돌아왔다.
“네! 알고 있습니다. 토지가 건조하여 감자 농사가 아주 잘 된다지요.”
“그래. 비스몽트 공작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눈을 빛내더구나. 아마 네가 좋아할 것을 알았던 모양이지.”
사실 먼저 은근슬쩍 말을 꺼낸 쪽은 필리파였으나 클라우스는 굳이 그런 첨언을 하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으며 클라우스를 힐끔 바라보고는 필리파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좋은 토지를 내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폐하.”
“뭘. 영지에서 수확한 감자가 도착하거든 맛있게 요리해 내게도 맛보여 주렴.”
“물론이지요. 꼭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체리아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적으나마 영지를 가졌으니, 그 영지에 걸맞도록 작위도 가져야지. 내가 전에 너에게 작위를 내리고자 했던 건 기억하고 있니?”
“폐, 폐하. 그때도 말씀드렸던 것이지만, 저는 정말로 작위는…….”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었단다. 그사이 네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필리파는 아체리아와 동갑인 나이임에도 무척 원숙해 보였다. 아체리아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자, 필리파는 드물게도 온화한 미소를 띠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토록 사양하니 억지로 원하지 않는 자리를 안겨 주지는 않겠다. 하지만, 네가 이번에 세운 공로를 인정해 너를 백작에 버금가는 지위로 대우할 거야.”
“……예?”
“그 말인즉슨, 너는 앞으로 나나 다른 사람의 허가가 없이도 자유롭게 왕성을 출입하고, 나를 알현하러 올 수 있다는 말이란다.”
아체리아는 너무 놀라서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실제로 백작의 작위를 받은 것보다도 더 놀라웠다.
필리파의 말 속에 어떤 뜻이 숨겨져 있는지 아체리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주 놀러 오렴.’
“가, 감사합니다, 폐하. 제게 그런…… 음, 그런 영광을 주셔서…….”
“널 만나려면 매번 공작저로 편지를 쓰거나, 비스몽트 공작을 함께 불러야 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거든. 앞으로는 자주 와서 내게 맛있는 것도 만들어 주고, 네가 먹어 본 것 중 신기한 게 있으면 그것도 이야기해 주렴.”
“알겠습니다.”
클라우스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 들으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진작부터 일이 이렇게 돌아가야 했다는 것처럼,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 * *
약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체리아는 본인의 약혼식에 내놓을 음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관리하고, 준비했다. 프레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요리사들, 심지어 요아킴과 루비까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약혼식이잖아. 내 약혼식인데 내가 만든 요리를 당연히 대접해야지.”
“아니, 요리장님. 세상에 자기 약혼식에 쓸 메인 요리를 직접 준비하는 아가씨는 없습니다!”
“그걸 준비하겠다고 푸줏간까지 직접 다녀오는 아가씨도 없고요!”
“소스 준비하느라 3박 4일 매달리는 아가씨도 없고요!”
“3박 4일이라니, 과장하지 마! 이틀밖에 안 걸렸어.”
이틀이건 뭐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체리아는 굳건했다.
“흠, 흠. 클링 양?”
요리사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웅다웅하고 있는 와중, 문간에서 호즈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집사장님.”
“란츠호프 후작가의 영애께서 클링 양을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보는 눈들이 많았기에 호즈만은 아체리아에게 예의 바르게 공대를 했다. 아체리아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고는 겨우 소스를 젓던 국자를 내려놓았다.
“프레드 씨, 저 나갔다 올 테니까 이거 부탁해요.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맥넛 넣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거 잊어버리면 죽을 때가 다 된 거죠.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아체리아는 씩 웃으며 지저분한 손을 씻고, 앞치마와 모자를 벗고 밖으로 나갔다.
‘란츠호프…… 릴리엇 아가씨가 많이 놀라실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릴리엇은 아체리아가 정말로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뒤로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체리아!”
“앗, 릴리엇. 오셨어요.”
“‘오셨어요’가 아니잖아! 대체 뭐 하는 거야? 왜 아직도 주방에 있는 거야?”
“그거야 주방 일이 곧 제 일이니까…….”
“이젠 아니잖아! 비스몽트 공작의 약혼녀인데! 아직도 주방에서 험한 일을 하면 어떡하니! 다치면 어떡하려고!”
“……저, 릴리엇. 제가 주방에서 보낸 시간이 주방 밖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길 거예요.”
아체리아가 아무리 말해도 릴리엇은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종내에는 ‘이런 일을 알고서도 말리지 않는 거냐. 클라우스 이 자식, 가만두지 않겠다’며 씩씩거리는 것을 겨우 뜯어말려 진정시켰다.
“주방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계속할 거라 했습니다. 나중에…… 공작님, 아니 클라우스 님과 결혼을 하게 되어도요.”
릴리엇은 한 번 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체리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알겠어, 알겠어. 그건 됐으니까 얼른 올라가자.”
“올라가요?”
“그래.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 원단을 골라야지. 곧 의상실에서 사람들이 올 거야.”
“워, 원단을 골라요? 지금까지는 만들어져 있던 걸 사서 입었는데요?”
“그런 기성품으로 어떻게 약혼식을 하니!”
기성품으로 약혼식을 하면 안 될 건 또 뭔가 싶었지만, 아체리아는 순순히 릴리엇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릴리엇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디자이너는 수도에서도 가장 예약을 잡기 힘들고, 또 가장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마일론이라는 사람이었다.
‘남자네…….’
보통 의상실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여성들인 것에 비하면 그는 특이하게도 남성이었다. 길게 기른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안경을 낀 모습은 매우 차분해 보였다.
“주문을 하신 분은 이쪽 아가씨이신가요?”
마일론이 아체리아를 가리키며 묻자 릴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요. 비스몽트 공작의 약혼녀지. 약혼식을 할 때 입을 드레스가 필요하니 원단을 보여 줘요.”
마일론은 잠시 골똘한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비서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비서는 곧장 방 밖으로 나갔다.
‘뭐지?’
아체리아의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돌아온 비서의 손에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모두 값비싼 원단의 조각이었다.
“이 중에서 한번 골라 보도록 하지요.”
손수건보다 조금 더 큰 조각 천 몇십 장, 아니 몇백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으며 마일론이 말했다. 아체리아는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어, 저는…… 옷감을 보는 눈이 별로 없어요.”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골라 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어울릴지, 아닐지를 판단해 드리겠습니다.”
마일론이 말했다.
‘그래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고!’
천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비슷한 색깔에 패턴만 다른 것들도 수십 가지는 됐다. 뿐만 아니라, 분명 똑같은 색깔인 줄 알았는데 빛을 달리 받으니 색깔이 달라지는 것들도 있어서 선택은 더욱더 어려웠다.
“으음…….”
아체리아가 한참을 고민하자, 릴리엇이 말했다.
“일단은 흰 드레스가 필요하지. 하지만 너무 하얀 것보다는 은은한 진줏빛이 더 어울릴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아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