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아체리아는 기겁을 한 표정으로 문 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 이 문은 도대체, 뭡니까? 이런 걸 언제 달아 놓으셨어요?”
“공작저가 지어질 때부터 달아 놨는데.”
“당장 막으세요!”
“있는 문을 왜 막아?”
클라우스의 팔이 아체리아의 허리를 휙 감았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함께 푹신한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멍하니?”
클라우스가 물었지만 아체리아는 곧장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탓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일이 생전 처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심지어 키스도 여러 번 했는데…… 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아체리아, 너 열나?”
“아…… 아니요.”
“얼굴이 새빨간데.”
“취, 취해서요.”
클라우스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술 마셨어? 그런데 술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은데.”
“비 냄새에…… 취한 모양이지요.”
“술을 마시긴 마신 모양이군.”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체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사이 이마가 맞닿을 듯이 바싹 다가와 있던 클라우스의 얼굴은 약간 멀어졌다.
희부연 아침 안개처럼, 햇빛을 머금고 탁 터뜨릴 준비만 하고 있는 이슬처럼 반짝이는 회청색 눈동자가 조금 멀리로 떨어지고 나자 아체리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저 문이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바로 그거라는 듯이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안 되지요, 당연히!”
“뭐가 안 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저…… 저런 문이 있으면 공작님, 아니 클라우스 님께서 또…… 언제 이렇게 불쑥 들어오실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불쑥 들어오는 거 싫어?”
“싫은 게 아니고……!”
아체리아는 말문이 막혀 주먹만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 아래에 눌린 시트가 꾸깃꾸깃 우그러지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싫은 게 아니면 상관없잖아.”
“그렇다고 상관없는 건 좀 아니죠! 결혼도 안 한 아가씨 방에 노크도 없이……!”
“그 아가씨가 나랑 결혼할 사람이라도 안 돼?”
아체리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클라우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어디 가?”
그 말을 못 들은 척, 아체리아는 문 옆에 있는 작은 옷장을 붙잡더니 문 앞으로 질질 끌어가기 시작했다. 두꺼운 융단 때문에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지만, 그나마 옷장이 그리 크지 않아 어찌저찌 문을 막을 수 있었다.
“결혼할 때까지는 이렇게 해 놓을 거예요.”
“결혼할 때까지라니, 결혼을 하고 나면 넌 더 이상 이 방을 쓰지도 않을 텐데?”
“네? 그럼 어느 방을 써요?”
이번에는 클라우스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혼을 했는데 침실을 따로 써?”
“귀, 귀족들은 그러는 게 보통 아녜요? 선대 마님께서도 침실을 따로…….”
“결혼한 뒤에 이 방은 네게 주겠지만, 침실은 나랑 같이 써야 돼.”
정말 기가 막혀……. 아체리아의 표정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지만, 클라우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꿋꿋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단 침실 문제는 좀 접어 두자고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게다가 이런 대화를, 이런 곳에서, 클라우스와 하고 있자니 기분이 배로 이상해졌다.
“그보다 갑자기 제 방에는 왜 오신 거예요?”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옷장 붙들고?”
그제야 자신이 아직까지도 옷장을 껴안다시피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체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떼었다. 문은 이미 완전히 막혀 있었다.
주춤거리듯 클라우스 쪽으로 다가온 아체리아는 그가 손을 잡아 휙 당기기 전에 먼저 그의 옆에 앉았다. 바닐라처럼 달큰한 향기가 그에게서 훅 끼쳤다.
“드레스 고르는 걸 릴리엇이 도와줄 거야.”
“란츠호프 아가씨께 그렇게 폐를 끼쳐도 될까요?”
“저가 하고 싶다고 나서는 걸 어쩌겠어. 그리고, 네가 공작 부인이 되면 도리어 릴리엇 쪽에서 폐를 끼치러 오는 일도 많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전혀 실감은 나지 않지만, 아체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익숙해져야 하는 현실이었다.
“식을 조용하게 올리고 싶었던 건 아니야?”
“저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요란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죠. 뭣보다도, 클라우스 님을 두고 또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요.”
“나랑 결혼하면 평생 그런 걸 듣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클라우스는 웃으며 말했지만 아체리아는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이제 두 번 다시는, 아무도 함부로 그러지 못하도록 할 거예요.”
“난 상관없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어렸을 때는 더했잖아.”
“이젠 아니잖아요! 이젠 몸이 허약하시지도 않고, 바람 불면 휙 날아갈 듯 깡마르신 것도 아니고,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비실비실하지도 않으신데요.”
클라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날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아주 잘 알겠어.”
“아니, 꼭 제가 그랬다기보다는…… 어쨌든 약하신 건 사실이었잖아요. 하지만 이젠 아니죠.”
“그래, 이제 너 정도는 번쩍 들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저 보기보다 훨씬 무거워요.”
“보여 줘?”
그러더니 클라우스는 진짜로 아체리아를 안아 들기라도 할 듯 그녀의 허리 뒤로 손을 받쳤다. 질겁한 아체리아가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기어이 침대에서 일어나 아체리아를 안아 들었다.
“악! 클라우스 님!”
“……봐, 안을 수 있다니까.”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클라우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체리아를 침대 위에 도로 내려 주고는 상기된 뺨을 손등으로 슬그머니 가렸다.
“그것 봐요, 무겁죠?”
“하나도 안 무거워.”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 아니거든.”
아체리아는 굳이 말하자면 종잇장처럼 가냘픈 아가씨들과는 달랐다. 십수 년을 주방에서 일을 하며 다져진 근육만도 얼마겠는가. 그러니 물병 하나 드는 것도 힘겨워하던 클라우스가 잠깐이나마 안아 올렸다는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성과였다.
“문을 저렇게 막아 놓지 않아도 자는 널 보러 불쑥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짓은 당연히 안 되죠!”
“그러니까 열어 놓으라고.”
“어차피 안 들어오실 거라면서 열어 놓든, 막아 놓든 상관이 있나요?”
“상관이 있지.”
늘 차가운 빛만 어른거리는 듯하던 클라우스의 얼굴에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미소가 슬쩍 지나갔다. 발갛게 상기된 뺨 때문일까? 오늘 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너한테 가는 길이 늘 열려 있다고 생각하면 잠이 더 잘 올 것 같거든.”
* * *
며칠 후,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와 함께 필리파를 만나기 위해 왕궁으로 가게 되었다.
여름이 무르익은 왕궁의 정원은 온통 푸르고 싱그러운 식물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의 사이, 사이로 난 회랑을 따라 산책을 나온 귀족들이 보이자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긴장 안 해도 돼.”
어떻게 알았는지,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손을 꽉 잡아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체리아 클링이 폐하를 뵙습니다.”
이제는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하는 데에도 퍽 익숙해진 아체리아를 보며 필리파는 즐거운 듯한 미소를 띠었다.
“어서 오렴, 아체리아. 기다리고 있었단다.”
“알현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체리아가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대꾸하자 필리파는 뜻밖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을 하라고 누가 가르쳐 준 거니? 클라우스? 아니면 타티아나?”
그러자 타티아나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필리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뒤에 서 있는 타티아나를 느긋하게 돌아보고는 아체리아를 향해 손짓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얼어 있을 것 없어. 자, 이쪽으로 오렴. 너에게 해 줄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구나.”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차와 쿠키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아체리아는 옆에 앉은 클라우스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이번 아동 납치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네 도움이 정말로 컸다, 아체리아. 네 덕분에 비스몽트 공작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불안감을 떨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제자리를 찾게 됐어.”
“저 혼자만이 한 일이 아닙니다, 폐하.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 너를 도와준 다른 요리사들에게도 내가 치하를 해야 하겠지만, 모두 만나 볼 수가 없어 대표로 너를 부른 것이니 돌아가거든 내가 고마워하더라고 꼭 전해 주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필리파는 달지 않게 구운 초콜릿 쿠키를 한 입 베어 물고는 클라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 하지 않았소?”
그들이 왕궁에 오기 전, 필리파는 클라우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체리아를 데리고 입궁할 것이라는 소식과 더불어, 따로 알려 드릴 것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공작이 내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다름이 아니라…….”
클라우스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아체리아를 잠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아체리아와 제가 약혼식을 하려 하는데, 폐하께서도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푸흡! 콜록!”
요란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타티아나가 얼른 손수건을 가져다주자, 아체리아는 그것으로 입을 막은 채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기침을 했다.
“아체리아, 괜찮니?”
“……네, 괘, 괜찮습…… 괜찮습니다, 폐하. 사레가 들려서 그만…….”
“약혼을 한다니, 정말 갑작스런 얘기지만 기쁜 소식이군. 게다가 나도 초대해 주겠다니 더욱 고마운 일이고.”
“폐하께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신다면 저와 아체리아에게도 영광스럽고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클라우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리파는 그의 의도를 빤히 알고 있었지만 눈감아 주기로 결심했다. 왕족도 아니고, 공작의 약혼에 굳이 왕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 과연 친분에서만 비롯된 일이겠는가? 친구를 초대하듯, 안 오면 서운할 테니 불러 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클라우스는 약혼식 자리를 빌려 누구도 아체리아를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놀라운 한 방이 필요했고, 그 한 방으로 쓰일 것이 바로 왕인 필리파의 참석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 술수도 못 부리는 자였으면 곁에 둘 이유도 없었지.’
필리파는 왠지 흐뭇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