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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22)화 (122/144)

122화

프레드가 노릇노릇하게 구운 양의 정강이 살을 덩어리째 솥에 넣자 본격적으로 육수가 우러나기 시작했다.

잡다한 냄새를 잡아 주기 위해 적당히 넣은 허브의 향기와 채소, 그리고 고기가 익어 가는 들큰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어우러질 때쯤 미리 준비해 두었던 토마토소스를 풀어 넣는다.

그대로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푹 끓이면 부드러운 오소부코가 완성된다.

아체리아는 솥을 프레드에게 맡겨 둔 뒤 다른 요리사들이 준비하고 있는 요리들을 둘러보았다.

분위기를 흐리는 무리들이 없어진 후, 공작저의 요리사들은 전반적으로 한두 단계씩 실력이 올랐다. 파벌을 만들고 이간질을 하고, 그런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 것보다 누구보다 열심히 요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임을 이제는 다들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리소토 밑 준비는 다 되었어요?”

“네, 다 됐습니다. 좀 덜 기름지게, 우유를 한 번 걸러 담백하게 만들까 싶네요.”

“오소부코랑 같이 나갈 거니까 그게 더 좋겠어요. 그리고 향신료는 좀 줄이는 쪽으로. 참, 일전에 들어왔던 버섯 있죠? 그거, 향이 다 빠지기 전에 다 써야 해요. 오늘 리소토에 넣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요리장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 안은 훈기로 가득 차, 요리사들의 이마며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그들 중에서 아체리아는 가장 열심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 * *

오늘 만찬에는 에른스트와 릴리엇이 급하게 초대되어 와 있었다. 페터는 뭘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났다며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

클라우스가 친구들을 왜 초대했는지 알 것 같은 아체리아는 되도록 그 식탁에 함께 앉고 싶지 않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것을 알아차린 클라우스가 ‘빨리 와서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머나, 오소부코네! 지난겨울에 우리 집 요리장이 한 번 만들어준 뒤로 처음 먹어 봐.”

릴리엇이 반색을 했다. 겨우 자리에 앉은 아체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오소부코는 소고기 대신 양의 정강이 살을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들어간 향신료도 보통의 오소부코와는 조금 다르지요. 드시는 방법은 똑같으니, 모쪼록 달라진 맛을 충분히 느껴 주셨으면 합니다.”

식사가 시작된 순간, 아체리아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세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래도 여태 만들어 보지 않은 것을 내놓을 때는 초조해지는 법이다. 입맛에 맞을지, 어떨지…….

“아주 맛있는데?”

에른스트가 가장 먼저 칭찬을 했다. 뒤이어 릴리엇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체리아, 정말 맛있어! 늘 먹던 소고기랑은 다른 식감도 그렇고…… 익숙한 토마토소스인가 싶으면 뒤에서 뭔가 탁 치고 올라오는 향이 있어. 무슨 향신료니?”

“커민을 살짝 넣어 보았어요, 아가씨.”

“커민이라, 그렇구나. 좀 이국적인 향이 난다 싶었는데 바로 그거였어.”

오소부코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에른스트는 금세 한 그릇을 다 먹고도 좀 더 청하여 먹었고, 릴리엇도 리소토를 포함해 한 그릇을 전부 다 먹었다.

화기애애한 식탁에서 클라우스만이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진지한지, 아체리아는 그 이유를 알았지만 에른스트와 릴리엇은 몰랐기 때문에 궁금한 표정들이었다.

“클라우스, 뭐 고민 있어요?”

디저트가 나왔을 무렵, 결국 릴리엇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민? 없는데.”

“그런데 왜 식사 내내 한마디도 안 해요?”

“내가 그랬던가?”

“그랬지. 식사가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는 알겠나?”

에른스트가 릴리엇을 거들어 클라우스를 놀렸다.

술에 절인 과일에 설탕을 묻힌 다음, 차갑게 만든 크림에 잘게 잘라 섞은 디저트를 묵묵히 먹고 있던 클라우스가 스푼을 내려놓은 것과, 아체리아가 그를 힐끔 쳐다본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은, 자네들에게 할 말이 있어.”

에른스트와 릴리엇의 시선이 의아한 빛을 띤 채 잠시 마주쳤다.

“우리에게?”

“무슨 얘긴데요?”

말문을 뗀 클라우스는 스푼 끄트머리로 크림을 살살 젓는 시늉을 하면서 아체리아 쪽을 보았다. ‘말해도 되겠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아니, 날 쳐다보면 어떡해!’

아체리아는 입을 다문 채 허둥지둥하는 시늉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클라우스, 뭐예요? 사람 걱정되게 말을 꺼내만 놓고.”

“무슨 일이 또 있는 건 아니겠지?”

클라우스는 마음이 급해 재차 물어 대는 에른스트와 릴리엇을 번갈아 보고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은 약혼을 하기로 해서.”

디저트를 먹던 스푼을 먼저 내려놓은 것은 에른스트였다. 곧이어 릴리엇의 손가락 사이에서도 스푼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약…… 약혼?”

“약혼을 한다고요?”

잠시 후, 클라우스의 시선이 아체리아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에른스트와 릴리엇도 아체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왜 나를…….’

“아체리아와 나 말이야.”

클라우스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 순간, 에른스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뭐라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실망했다고 해야 할까, 안도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클라우스는 누구보다 기민하게 그의 표정을 알아차렸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반면 릴리엇의 경우는 에른스트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움뿐이었다.

“야…… 약혼을? 아체리아와…… 클라우스 당신이요?”

“그래. 그렇게 놀랄 일인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농담이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에른스트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채 아체리아 쪽을 보고 있었고, 릴리엇은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약혼을 발표하는 법이 어디 있담!”

“그럼 약혼 발표를 할 거라고 일주일 전에 미리 발표한 뒤에 했어야 했나?”

“그, 그런 건 아니지만요……. 아차, 이럴 때가 아니고. 그…… 축하해요. 아체리아, 축하해. 응?”

아체리아는 약간 떨떠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 자신도 이 약혼 발표를 처음 듣는 것 같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감사합니다, 릴리엇 아가씨.”

“아이 참, 이제 그 ‘아가씨’는 좀 빼도 된다니까. 내가 릴리엇이라고 부르라고 전에도 말했잖아.”

“아니, 그렇지만 습관이 돼서요…….”

“아체리아, 클라우스와 약혼을 한다는 건 장차 공작 부인이 된다는 거야. 호칭을…… 너 자신을 너무 낮출 것 없어.”

부드러운 어조로 충고한 것은 에른스트였다. 아체리아는 뺨을 약간 붉히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이라면…… 공작저에서 할 거죠? 사람들은 얼마나 부를 거예요? 누구를 부를지는 결정했어요?”

“릴리엇, 좀 천천히…… 공작저에서 할 거고, 요란하게는 하지 않을 거야. 기껏해야 너희들 정도나 초대할 생각이었는데.”

클라우스가 말한 순간, 릴리엇과 에른스트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건 안 돼!”

“그건 안 되죠, 클라우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에른스트가 눈짓을 하자, 릴리엇이 다급하게 말했다.

“약혼식은 성대하게 해야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나?”

“클라우스, 당신은 정말 너무 둔감해요! 사교계 생리에 조금은 적응을 하란 말이에요! 약혼을 한다는 건, 장차 아체리아가 공작 부인이 될 거라는 말과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그걸 우리만 초대해서 조용히 한다고요? 누구 좋으라고?”

“그야…… 그편이 아체리아도, 나도 편하니까.”

아체리아가 동의한다는 듯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릴리엇은 물러서지 않았다.

“절대로 안 돼요. 약혼식만큼은 성대하게 해야 해요. 차라리 결혼식을 조용히 하면 모를까, 아체리아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자리인데 숨기듯이 식을 치러 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체리아, 네 생각은 어때?”

느닷없이 자기 쪽으로 화살이 돌아오자 아체리아는 찔끔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어…… 저는 어느 쪽이어도…….”

“아체리아, 안 돼! ‘어느 쪽이든 좋다’는 안 돼. 이건 무조건 크게 해야 하는 거야. 온 수도의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성대하게!”

“그, 그렇게나요?”

“당연하지! 드레스도 여러 벌 맞추고, 증인도 여러 명 세워야 해. 그래야 아무도 네 자리를 넘보지 않을 테니까.”

순간 아체리아는 시드레 백작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약혼식을 조용히 치르고 만다면 사람들은 또 수군거릴 건수를 잡겠지.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찔리는 게 있는 게 아니냐…… 그런 식으로.

“릴리엇의 말이 맞아. 아체리아가 네 약혼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음알음 알게 되면, 그 사이로 또 무슨 이상한 소리들이 끼어들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아체리아가 앞으로도 계속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이나 약혼식을 기회로 삼아 일찍 공표해 버리는 게 낫다고 봐.”

에른스트의 말에 릴리엇은 바로 그렇다는 듯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아체리아를 한 번 바라보았다.

“네가 싫지 않으면 그렇게 할게.”

“싫은 건 아니고…….”

“좋아, 그럼 결정된 거야! 클라우스와 아체리아의 약혼식은 성대하게 치르는 걸로! 초대장도 왕창 뿌리고, 당장 드레스 디자이너부터 수배하는 게 좋겠어요. 수도의 디자이너들이 좀 콧대가 높아요? 우물쭈물거리고 있다가는 내년에나 약혼식을 해야 할걸요.”

말을 마친 릴리엇은 이러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소매를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아체리아.”

“네? 저, 저요?”

“그래. 너한테 이것저것 알려 줘야 할 게 있어. 얼른 나와.”

릴리엇의 재촉에 아체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

갑작스럽게 클라우스와 단둘만 남게 된 에른스트는 순간 입을 다문 채 말을 잃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혹은 무료한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 테두리를 문지르던 에른스트가 클라우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네, 나한테 할 말은 없나?”

그제야 먼 곳을 쳐다보는 척 그를 외면하고 있던 클라우스도 에른스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해?”

미안한 심정과는 달리 버릇처럼 삐딱한 어조가 튀어나온다. 에른스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푹 웃어 버리면서 턱을 괴었다.

“내가 물러나 준 거라는 걸 두고두고 잊지 마, 클라우스.”

아체리아에게 거절당한 이후,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는 서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껄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러길 잘했다고 에른스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눈치라도 보듯 에른스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 클라우스는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 소리, 평생 우려먹겠군.”

그러자 에른스트가 클라우스의 어깨를 퍽, 때린다.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는 동시에 어릴 때처럼 낄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 * *

새로 옮긴 방에서 잠드는 첫날, 아체리아는 비가 퍼붓는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본래 이곳은 객실로, 후원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호화로운 테라스가 큰 자랑거리였다. 아름다운 난간과 창틀, 티 테이블을 세 개는 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을 칭찬하지 않았던 손님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오는 탓에 테라스에 나가 볼 수가 없었다. 아체리아는 아쉬운 표정으로 창가에 기대어 서서 어둑한 후원을 내다보았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차 한 잔 끓여 와서 밤바람을 쐬면 딱 좋았을 텐데.

“거기 서서 뭘 하고 있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아체리아는 기겁을 하며 몸을 홱 돌렸다.

“공작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대체 어디서 오신 거예요?”

“여기 문 있는 거 안 보여?”

그렇게 말하면서, 클라우스는 벽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아체리아가 다가가 살펴보니 옷장 뒤쪽에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아까 짐을 옮길 때는 루비와 요아킴이 있어 방을 꼼꼼히 살펴보지 못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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