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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21)화 (121/144)

121화

아체리아의 방을 옮기게 된 것은 늘 조용하기만 하던 공작저가 꽤 요란해질 만한 사건이었다.

승진이나 기타 이유로 고용인이 숙소를 옮기는 건 으레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이미 수석 요리장인 아체리아는 고용인들 중에서도 꽤 높은 직급들에게만 허용되는 개인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용인 숙소 중에서는 더 좋은 방으로 갈 만한 곳이 사실상 없었다.

아체리아가 옮기게 된 방은 놀랍게도, 클라우스의 침실 바로 옆이었다. 이미 손님용 침실로 꾸며져 있는 곳이라 다른 준비는 할 것도 없이 개인적인 물건만 옮기면 되었다.

“세상에, 요리장님! 공작님의 옆방이라니 너무 멋져요!”

방을 구경하러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역시 루비와 요아킴이었다. 이미 공작저의 내부 구조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가장 화려한 곳 중 하나가 아체리아의 방이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새로운 모양이었다.

“이 방, 너무 예뻐요. 저 크림색 커튼이며, 벨벳 벽지며…… 게다가 이 태피스트리도 좀 보세요!”

“루비…… 너 은근히 이런 것 좋아하는구나?”

“‘은근히’가 아니에요,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런 거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걸요?”

그 말에 요아킴은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요리사 월급으로 대저택은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일까?

아체리아는 요아킴의 표정을 흘끔 살피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짐 옮기는 것 도와줘서 고마워.”

아체리아의 말에 요아킴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무거운 것도 별로 없었는데 뭘 그러세요.”

“그래도. 자잘한 것들 옮기는 게 원래 귀찮잖아. 정리도 도와줬고. 고마워서 뭔가 해 주고 싶은데.”

“어, 요리장님! 저 그러면 요리장님이 만드신 오소부코를 먹어 보고 싶어요!”

“오소부코? 그건 소고기가 있어야 하는데. 오늘 메인은 양고기…….”

말끝을 흐린 아체리아는 잠깐 곰곰한 표정을 지었다.

오소부코는 원래 소고기의 정강이 살과 채소, 그리고 육수로 만든 토마토소스를 듬뿍 넣어 끓이는 일종의 찜 요리였다.

오늘 공작저에서는 소고기를 주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고기 오소부코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색다른 풍미가 살아날지도 모른다.

“좋아, 양고기 오소부코를 한번 만들어 볼까?”

“와, 정말로요? 감사합니다!”

“넉넉하게 만들면 다 같이 먹기도 좋겠지. 마침 오늘 저녁에는 비가 온다니 따뜻한 걸 먹어도 괜찮겠다.”

루비와 요아킴은 새로운 메뉴의 등장에 신이 났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 아체리아는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영 현실감이 없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라우스는 가장 먼저 호즈만에게 아체리아와 약혼식을 올리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이 든 집사장 호즈만은 순간 묵직한 뭔가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이 아체리아를 보았다가, 곧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공작 가문의 경사로군요.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그리고 클링 양.’

아체리아는 더 이상 ‘아체리아’가 아니었다. 호즈만은 걸핏하면 아체리아에게 잔소리를 하고―깐깐한 할아버지처럼―그녀가 클라우스와 연인 관계가 된 후에도 ‘공작님께 너무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아라’고 말해 온 터였다.

그러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클링 양’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클라우스가 없는 사이, 아체리아는 호즈만에게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라고 말했지만 호즈만은 고집스럽게도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클링 양은 단순한 고용인이 아닙니다. 앞으로 공작님과 함께 이 가문을 이끌어 가셔야 하는 분이시지요.’

‘아니, 집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저 진짜로 기분 이상하단 말이에요. 네? 제발요. 공작님 안 계실 때는 그냥 아체리아라고 부르세요. 제발, 제발!’

호즈만은 다소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아체리아가 바지 자락을 붙잡고 매달릴 기세이자 겨우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즉, 클라우스가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깍듯이 ‘클링 양’으로, 아체리아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아체리아’라고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두 사람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호즈만뿐만이 아니었지만, 아체리아는 민망해서 그들을 마주치기도 전에 방을 옮긴다는 핑계로 후다닥 자리를 뜬 참이다.

“약혼이라…….”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체리아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살다 보니 참 이상한 일도 다 일어나지. 내가 비스몽트 공작님과 약혼하는 날도 오고 말이야.”

생각해 보면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말끝마다 건방진 것이라며 따박따박 핀잔을 주고, 음식 얘기를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라도 돋느냐는 듯이 뾰족하게 쳐다보던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다니,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미래를 함께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자신은 요리사로 평생을 살아도 좋았다. 가능하다면 공작저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기도 했다.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행복했다. 그걸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욕심이 참 끝이 없지.’

하나를 가지면 두 개를 갖고 싶고, 두 개를 가지면 열 개를 갖고 싶은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요리만 할 수 있으면 된다’던 아체리아의 소박한 욕심도, 어느새 ‘클라우스와 함께 살며 요리만 할 수 있으면 된다’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공작 부인의 휘황찬란한 삶 같은 것은 여전히 아체리아의 관심 밖이었다.

‘언젠가는 그런 것도 탐을 내게 되는 걸까? 그건 좀 별로네.’

아체리아는 고용인 숙소의 물건과 비교도 되지 않는 푹신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짧은 단잠에 빠졌다.

* * *

루비의 제안으로 저녁 메뉴는 양고기 스테이크에서 양고기 오소부코로 변경이 되었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요리사들은 주방에 내려온 아체리아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가 공작과 약혼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단 30분도 되기 전에 온 공작저의 고용인들에게 쫙 퍼진 탓이다.

클라우스는 ‘네가 원한다면 이제 요리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장난치듯이 말했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체리아도 알고 있었다. 뭣보다도, 아체리아가 요리하는 걸 원하지 않는 날이 올 거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클라우스였으니까.

아체리아는 그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주방으로 내려와 요리사들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부주방장인 프레드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저기, 요리장님.”

“네, 왜요?”

“……그, 이제 이런 일은 하지 않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요리장인데, 요리를 내가 안 하면 누가 한다는 거예요?”

“아니…… 요리장이시기 전에 이제는, 그…… 뭣이냐, 공작님의 약혼녀가 되신다니까…… 이런 험한 일은.”

“다들 잘 들어요.”

아체리아가 몸을 홱 돌리며 차분하게 입을 열자 덩치 큰 요리사들이 일제히 어깨를 움찔했다.

“공작님과 제가 약혼하기로 한 건 맞지만, 그러기 전에 저는 일단 요리사예요. 알겠어요?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전 계속 주방에 내려올 거라고요.”

“예? 아니, 그게 무슨…… 공작 부인이 되셨는데 왜 주방에…….”

“공작 부인이 주방에 들어오면 손발이 없어지기라도 하나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제가…… 언젠가 진짜로 공작님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수석 요리장 자리는 프레드 씨에게 맡길 거예요. 하지만 식사 때마다 주방에 와서 요리를 하는 건 그만두지 않을 테니 그렇게들 아세요. 자! 이제 궁금한 건 끝났죠? 저녁 준비합시다!”

짝! 하는 박수 소리와 함께 요리사들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르르 흩어졌다. 아체리아는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주방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고는 프레드의 어깨를 팡, 두들겼다.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져 있어요, 프레드?”

“제…… 제가 수석 요리장요? 정말입니까?”

“그럼 누가 그 자리를 이어받겠어요? 지금 이 주방에서 저 말고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경력도 긴 사람은 프레드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얼빠진 모습 보이지 말고 열심히 해야겠죠?”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암요.”

아체리아가 처음 수석 요리장이 되었을 때는 프레드도 그녀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연을 함께 거치고, 부주방장으로서 더욱 가까이에서 아체리아를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체리아가 얼마나 요리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식재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다루는지는 제대로 된 요리사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요리해야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꼼꼼히 살피고, 소스가 끓는 온도까지도 계산하며 불 앞을 떠나지 않는 그녀의 노력이 얼마나 환상적인 맛을 만들어 내는지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양고기 오소부코는 저도 처음 해 봅니다.”

프레드의 말에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소고기니까요. 때마침 오늘 들어온 양고기 부위 중에 정강이 살이 있어요. 오소부코는 정강이 살로 만드니까 우리도 이걸 쓰죠.”

“향신료는 똑같이 써 볼까요?”

“아니요, 음…… 생강과 오레가노를 조금씩 넣고, 전에 표고버섯 말려 둔 게 있었죠? 그걸 좀 빻아서 써 볼까…… 소스는 똑같이 토마토로 할 거지만, 거기에 커민을 살짝 더해 보죠.”

“양고기를 익히는 건 제가 할 테니, 요리장님께서 나머지를 만들어 주시지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부탁해요. 아! 익힐 때 버터를 살짝만 넣어서 익혀 줘요.”

프레드가 큼지막한 양의 정강이 살을 익히는 동안, 아체리아는 베이컨을 기름에 다글다글 볶아 향이 들어간 기름을 만든 후 요아킴이 썰어 온 채소를 확 부었다. 당근과 셀러리, 양파 등 기본적인 조합에 감자 약간을 더했다.

채소가 기름을 먹어 반들반들하게 윤이 돌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화이트 와인!”

아체리아가 외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비가 데글라세를 위한 와인을 내밀었다. 수분이 한꺼번에 증발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윽고 뽀얀 물이 솥 안에 가득 찼다.

“이제 이 상태로 끓이는 거야. 이걸 데글라세라고 해. 알겠니, 루비?”

루비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넣고 있었다. 예전에 요아킴이 그랬듯, 그녀도 아체리아가 요리하는 것을 옆에서 열심히 지켜보며 다양한 요리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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