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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20)화 (120/144)

120화

클라우스는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체리아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묻고 싶은 거라니, 뭔데?”

“그게요…….”

머릿속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잔소리를 하는 예시카의 환청에 떠밀려 말문은 꺼냈는데, 막상 본론을 내놓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체리아를 보다 못한 클라우스가 성급하게 물었다. 아체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심각한 일은 아니고요.”

“그럼 무슨 질문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여.”

“아, 음…… 그게, 좀…… 좀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라.”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말을 꺼냈으니 이제 도로 무를 수는 없다. 보통 질문이 아니라는 걸 이미 미적거리며 다 티 냈으니, 이제 와서 아무 말이나 둘러댈 수도 없다.

아체리아는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가 클라우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작님.”

“왜 그래?”

“……공작님은, 절 좋아하신다고 했지요?”

클라우스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날렵한 턱선 위로 매끄럽게 도드라진 뺨이 희미하게 상기된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좋아해. 그게 왜?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고 싶었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절 좋아하신다면 말이에요. 공작님은…… 앞으로도 계속 그러실 생각이신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잠깐 좋아하다 말 거라는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뇨, 그런 게 아니고…… 그, 그러면, 공작님께서 저를 계속 좋아하실 거라면, 그…….”

안 어울리게 오늘따라 왜 이러지? 아체리아는 무슨 말을 하건, 누구 앞에서건 우물쭈물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마치 누가 시켜서 억지로 말을 지어내는 양 머뭇거렸다.

게다가 얼굴은 왜 또 저렇게 새빨개진 거고?

말을 하다 말고 도로 입을 다물어 버린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스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 것은 그때였다.

“‘앞으로도 계속’이라니, 그런 말을 한 건 처음이로군.”

“네? 처음이요?”

“그래. 네가 우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그랬던가?

단순히 기억을 되짚어 보고만 있던 아체리아는 다음 순간,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한 번 더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우리의 미래 같은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고…… 아니, 아닌 건 아니지만…….”

아체리아가 어물어물 말을 더듬자, 클라우스는 미지근한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비스듬히 엇갈리던 시선이 마주했다가, 한쪽의 눈동자가 떨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나는 당연히 너를 계속 좋아할 거야.”

“…….”

“그러니 이제 슬슬 이런 말을 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

순간, 아체리아는 누군가 묵직한 돌덩이로 가슴 한쪽을 쾅, 내리친 것 같은 기분에 소스라쳤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클라우스의 기척뿐이다.

“무슨 말씀을…….”

“우리가 슬슬 약혼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

아체리아는 연애 경험이 없을 뿐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때에 그를 찰싹 때리며 ‘무슨! 농담도 그런 농담을 하고 그러세요, 공작님도 참!’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소거하고 나니 달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체리아는 결국 신 레몬과 염장한 돼지고기를 동시에 씹었을 때처럼 괴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약…….”

딸꾹질이 목에 걸려 숨이 막혔다.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약혼, 말씀이시죠.”

“그래, 약혼.”

클라우스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체리아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굽어진 손마디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각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임에도 낯설게 뜨거웠다.

“결혼식은 지금부터 당장 준비한다 해도 적어도 1년은 걸릴 테지.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너를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 놓아두고만 싶지는 않아. 마침 골치 아픈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간소하게나마 약혼식을 올리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때?”

“저…… 야, 약혼식을 하면, 그…… 언젠가는 겨,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렇지. 그게 뭐?”

“정말 그래도 괜찮으세요? 결혼을…… 하면, 저는…… 제가, 비스몽트 공작 부, 부인이 되는 건데…… 저 같은 사람이 공작 부인이 되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럼 너는 내가 다른 사람을 공작 부인으로 들였으면 좋겠어?”

클라우스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아체리아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클라우스의 옆에 있게 된다니, 그런 건 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아침이 밝는 것을 보고, 밤이 오면 함께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거나 맛있는 것을 몰래 만들어 먹고.

그런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마음만 있으면 됐어. 난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거짓말. 아체리아는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공작 부인은 단순한 여염집 부인이 아니다. 공작 부인이 뭘 해야 하는지, 아체리아도 전부 다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선대 비스몽트 공작 부인을 떠올려 보면 절대로 지금까지처럼은 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공작 가문이라는 어마어마한 집안을 실질적으로 관리해야 하고, 하인들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공작가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도 꼼꼼히 관리해야 했다.

‘공작’이라는 지위는 남편이 가질지 모르지만 실제로 공작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공작 부인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리라.

자신이 과연 그런 걸 해낼 수 있을까?

“벌써부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군.”

아체리아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클라우스가 툭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뇨…… 현실적인 염려죠.”

“나와 결혼하는 게 누구든,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를 처음으로 겪어 보는 건 똑같아. 안 그래? 내가 미망인이 된 공작 부인과 재혼을 하게 된다면 또 모를까.”

“아니, 하지만…….”

“네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처음부터 공작 부인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다면, 너도 당연히 못 할 수밖에. 그러니 차근차근 배워 가면 돼. 그런 쓸데없는 걸 미리 걱정하느라 힘 빼지 않아도 돼. 전에도 말했잖아.”

“하지만 약혼을 하게 되면, 그…… 파티 같은 데에도 나가야 하고, 그러지 않나요?”

“잊었어? 난 파티 같은 거 싫어하는 인간이거든. 미래의 남편이 대인기피증이라 실망스러운 게 아니라면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을 텐데.”

아체리아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하긴 그렇다. 클라우스가 언제는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던가?

“파티 같은 거, 가기 싫다면 안 가도 그만이야. 사람을 초대하고 싶으면 초대해도 되고,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어도 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아체리아.”

“……세상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속 편하게 살진 않을 것 같아요, 공작님.”

“세상의 귀족들이 다 골 빠지게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난 공작이거든. 공작 정도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도 괜찮아.”

공작 아닌 사람들이 들었다가는 얄미워서 뒤로 넘어가고 말 소리를 태연하게도 하면서, 클라우스는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

“약혼식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반지랑 드레스 정도만 맞추고, 가까운 사람만 몇 초대해서 식사를 하는 정도…….”

“꼭 약혼식을 올릴 필요는 없는데…….”

“그건 내가 싫어. 널 자랑하고 싶단 말이야.”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왼손 약지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아체리아의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제 그 호칭도 좀 바꿔.”

“호칭요?”

“그래. 언제까지 공작님이라고 부를 거야? 이제 약혼자잖아. 클라우스라고 불러 봐.”

“약혼한 사이라고 해서 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소공작님, 공작님, 그런 식으로 십수 년 불렀으면 됐지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려고? 지겨워. 호칭 좀 바꿔. 해 봐, 클라우스.”

뭐 이런 억지가 다 있어?

아체리아는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입술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라……우스.”

“뭐? 안 들리는데.”

“크, ……클라우스. ……님.”

“‘님’ 자는 빼고 다시.”

“아! 어떻게 하루아침에 호칭을 그렇게까지나 바꿔요? ‘님’ 자는 붙이게 해 주세요!”

“한 글자 붙이나 빼나 별반 차이도 없을 것 같은데, 뭘.”

“별반 차이도 없으니까 당분간은 붙여서 부르게 해 주시라고요, 클라우스 님.”

클라우스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걸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럼 약혼식 때까지는 그 정도로 봐주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체리아는 뚱하니 볼을 부풀린 채 그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외면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을 마음이 났어?”

아체리아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시카가…….”

“또 예시카로군.”

“너무 그러지 마세요. 예시카는 제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요.”

“아직도 내가 널 정부 취급이나 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걱정을 하는 거 아니야? 아주 불쾌해.”

“그, 그런 게 아니고요.”

예시카를 두둔한답시고 반박하긴 했지만 클라우스는 이미 단단히 뿔이 난 표정이었다.

아체리아는 예시카를 위해 뭐라도 더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지만 좀처럼 쓸 만한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사실 클라우스의 말이 그대로 정답이었으니까.

“안 되겠군.”

“예시카한테 화내지 마세요, 공…… 아니, 클라우스 님.”

“누가 화를 낸대? 너와 내가 약혼한 사이가 되었다는 걸 고용인들에게 먼저 알리는 게 순서겠어. 그리고, 오늘부터 방 옮겨.”

아체리아는 잠시 혼란에 빠져 어리둥절한 채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방을 옮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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