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폐하께서 감자밭을 주셨다고?”
“그렇다니까요, 예시카. 수도에는 들어오지도 않는 품종의 감자가 무려 열 가지나 된대요! 믿어져요? 열 가지라니! 아직 제가 맛보지 못한 감자가 열 가지나 더 있는 거예요!”
짬이 난 김에 주방에 앉아 예시카가 만든 간식을 먹고 있던 아체리아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오늘의 간식은 소금만 살짝 넣어 구운 크래커 위에 뽀얀 염소젖 치즈를 얹고, 꼬득꼬득하게 잘 말린 무화과와 꿀을 뿌린 달콤한 카나페다.
예시카는 꿀이 뚝뚝 흘러 떨어지는 카나페를 한입에 집어넣으면서 웃기지도 않는다는 눈으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사파이어 광산도 아니고 감자밭을 준다는 데 그렇게 기쁘냐?”
“사파이어 광산이 저한테 무슨 필요가 있어요? 사파이어 갖다가 수프를 끓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꾸하는 아체리아의 표정은 하나 흐트러짐도 없이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빛을 띠고 있어, 예시카는 더욱 어처구니가 없고 우스웠다.
“네 또래 여자애들이라면 감자밭 수만 뙈기를 받느니, 그 대신 손톱만 한 사파이어 한 알이 더 좋다고 말할 텐데.”
“그거야 감자가 얼마나 보석 같고 소중한 작물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죠. 그까짓 먹지도 못하는 돌멩이, 좀 새파랗고 예쁘다지만 그게 다 뭐람? 갓 쪄서 포슬포슬한 감자를 한번 갈라 보라고 해요! 촉촉한 속살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반짝거린다고!”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이 다 옳아요, 요리장님.”
예시카는 낄낄 웃으면서 아체리아의 입에 카나페 하나를 더 넣어 주었다.
“그런데 말이다, 공작님께서도 참 모를 일을 하신다. 감자밭을 너에게 양도하시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야.”
“아, 그건 저도 정말 놀랐어요. 원래는 폐하께서 공작님께 하사하신 곳이라는데 그걸 덜컥 저한테 넘겨주시다니. 게다가 돈도 한 푼 안 받으셨다고요.”
“돈을 요구했으면 네가 낼 돈은 있었겠어?”
“왜 이래요, 예시카! 저 이래 봬도 봉급으로 받았던 것들 꼬박꼬박 모아 뒀다고요. 언젠가 독립하면 얀 헨릭처럼 내 가게를 내야지 싶어서…….”
아체리아가 손까지 흔들어 가며 열변을 토했지만 예시카는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있는 돈 없는 돈 톡톡 털어서 배곯고 사는 놈들 거두어 먹이기 바빴으면서, 네가 돈을 모으긴 무슨 수로 모아?”
그러자 아체리아가 더 이상 변명하기를 체념하고 눈동자를 힐끔 굴렸다.
“그거야…….”
“게다가 마흔 살이 됐든 쉰 살이 됐든, 네가 나간다고 하면 공작님께서 가만 계실 것 같긴 하고?”
순간, 들뜨고 신이 나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던 아체리아의 태도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차분해졌다.
“아…… 그, 그 생각은 못 해 봤는데.”
“쯔쯔, 요 답답한 것아. 너, 공작님과 요새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그래서, 둘이 약혼은 할 거야, 말 거야?”
덜컹!
아체리아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갈 듯이 크게 흔들렸다.
“야, 약혼요?”
“그럼 평생 이대로 있을 생각이었냐?”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평생 이대로 있을 수만은 어…… 없지.”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러면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너, 그거 알고는 있는 거지?”
아체리아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대답 없이 예시카의 시선을 회피했다.
약혼이니 결혼이니,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언젠가 한 번, 클라우스와 계속 이대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는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현실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예시카의 말대로,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와 영영 함께 있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결혼. 그리고 아체리아 그 자신이 비스몽트 공작 부인이 되는 것.
“고, 공작 부인이라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있을까? 자신이 공작 부인의 자리를 차지한다니.
아직까지도 드레스를 입는 게 거북하고, 하루라도 국자며 뒤집개를 손에 쥐고 주방에서 땀을 흘리지 않으면 해가 서쪽에서 뜰 거라 생각하는 자신이?
“네가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안 봐도 뻔하다. 공작님께서는 대체, 다 큰 아가씨를 홀려 놓고 뭘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호…… 홀리다뇨. 그런, 그런 거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냐? 아주 정신을 쏙 빼놨구만. 그러면서 아직까지 약혼하자는 얘기도 없었단 말이냐?”
“예시카…… 약혼이라는 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귀족들 결혼이란 본래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지는 거야.”
자신은 그런 귀족이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예시카의 표정이 하도 엄격해서 아체리아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다행히 정부로 삼으려는 건 아닌 것 같다만, 아체리아. 정신 바짝 차리라는 내 말은 잊지 말아라. 공작님이 말이 없으시거든 너라도 가서 물어봐야지!”
“뭐, 뭐를 물어보라는 거예요, 예시카?”
“날 평생 데리고 살 거냐 아니냐, 그걸 확실히 하라고 말이다.”
아체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맨정신으로 그런 걸 물어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클라우스에게?
‘……하긴 다른 사람한테는 물을 사람도 없지. 물어도 큰일이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시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것아!”
“아, 알겠어요. 물어볼게요. 물어볼 테니까 화내지 말아요.”
결국 아체리아는 때아닌 예시카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 * *
클라우스는 꿀을 뿌린 무화과 카나페를 먹으며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대개는 그저 그런 파티 초대장이었다. 아동 납치―및 식인―에 대한 혐의가 벗겨지자마자, 귀족들은 언제 수군거렸냐는 듯이 앞다투어 클라우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했다.
마치 자신은 그런 지저분한 소문을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음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단지 파티 초대장에 불과한 편지임에도 쓸데없을 정도로 많은 미사여구와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들이 꽉 차 있었다.
“쯧…….”
물론 클라우스는 그 편지 대부분에 답장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의도가 뻔한 사람들 앞에 굳이 나아가 ‘보세요, 나는 죄가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는 양 보란 듯이 행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클라우스는 입구가 찢어진 봉투들과 편지 대부분을 쓸어 빈 상자에 담아 놓았다. 쓸데없는 편지들을 이렇게 모아 놓으면, 호즈만이 알아서 갖다 치우는 것이 이제 일과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클라우스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초대장도 있기는 했다. 에른스트나 릴리엇으로부터 온 티 파티 초대장, 페터가 보낸 피크닉 초대장…….
‘그리고 이것.’
고급스러운 편지들 사이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화려한 비단 봉투. 봉랍도 없이 굵은 색실로 복잡한 매듭을 만들어 묶어 놓은 입구.
필리파가 보낸 것이었다.
‘굳이 왕궁까지 가고 싶지는 않은데…….’
수도에 남아 있던 보수파 중 골치 아픈 이들을 거의 뿌리 뽑다시피 한 지금, 필리파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리를 만들기에 적절한 핑계를 찾아내었다.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클라우스를 위로하고, 두 번 다시 이토록 해괴 막심하고 악랄한 계획을 세우는 자가 없도록 엄포를 놓겠다는 것.
그리고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운 아체리아 클링을 모두의 앞에서 치하하겠다는 것이 그 핑계였다.
클라우스가 필리파의 편지를 붙잡고 작게 한숨을 쉬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체리아였다.
“공작님, 카나페가 달아 입이 텁텁하실 것 같아서 차를 끓여 왔어요.”
그렇잖아도 입가심을 할 뭔가가 절실했던 참이다. 클라우스는 반가운 기색을 슬그머니 숨기면서 아체리아를 위해 자리를 내어 주었다.
“와, 편지가 산처럼 쌓였네요.”
“내가 집에 틀어박혀 애들이나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다들 안심하고 불러 대는 거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런 얘길 진짜로 믿었다면 전부 머저리들이죠.”
아체리아가 입술을 실룩이며 톡 쏘아붙였다.
클라우스는 슬그머니 배어 나오는 웃음을 깨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크림 없이, 깔끔한 맛이 나도록 우린 차는 향기롭고 맛이 좋았다.
“내게 보내는 척하면서 네 앞으로 보낸 편지들도 있어.”
“저에게요?”
“그래. 에른스트도 ‘널 꼭 데리고’ 차를 마시러 오라고 편지를 보냈고, 릴리엇이 보낸 것도 있군. ‘좋은 향신료를 구했으니 아체리아를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오라’고.”
“향신료요? 무슨 향신료죠? 궁금해요.”
“그러니까 구경하러 오라는 것 아니겠어? 어때, 갈 거야?”
“가야죠! 갈래요.”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어.”
아체리아가 뭐냐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자, 클라우스는 비단으로 된 봉투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아체리아도 일전에 한 번 본 일이 있는 것이었다.
“아, 이거…… 이건, 폐하께서 보내신……?”
“그래. 네 공로를 치하하시기 위해 초대하셨어. 에른스트와 릴리엇에게는 가지 않아도 여기는 꼭 가야 하지.”
“……저는 진짜 뭐 한 것도 없는데. 요아킴이 두들겨 잡은 거죠. 그렇게 따지면 요아킴이 가야 할 텐데…….”
“네가 범인을 잡자고 요아킴과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다면서?”
“그거야 그렇지만…….”
“다른 세 명에게는 내가 충분히 감사 인사와 사례를 할 테니까 괜히 미안해할 필요 없어.”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왜 그렇게 머뭇거리는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 혼자서만 이번 일을 해결한 것도 아닌데, 감자밭을 받은 것도 왕의 치하를 받는 것도 자신뿐이라 공연히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내가 너에게 감사해야지.”
클라우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체리아는 문득 예시카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고 이마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날 평생 데리고 살 거냐 아니냐, 그걸 확실히 하라고 말이다.’
지금 그게 왜 생각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물어보는 건 때가 좀 안 맞지 않나?
아니, 하지만…… 모처럼 분위기가 차분해지기도 했고…….
“아체리아?”
상념에 빠져 있던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네? 고민…… 고민요?”
“그래.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무슨 일인데?”
클라우스는 진심으로 걱정이라는 듯이 미간까지 찡그리며 아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나와 평생 함께할 거라는 미래까지 생각하고 나에게 잘해 주는 것일까?
나를 기다려 주겠다고 한 의미가, 정말로 그런 것이었을까?
“……공작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아체리아가 드디어 결연하게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