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해 보는 속 편한 요리야.”
아체리아는 환호성이라도 지를 기세로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클라우스를 모함하는 괴소문 때문에 요 며칠 동안은 요리를 하면서도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나 머릿속이 복잡했으면 육수 솥을 건드려 화상까지 입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을까.
다행히 크게 덴 것은 아니어서 흉터는 남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요리사들에게 오늘의 할 일을 알려 주고는,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인 뒤 자신도 요리 준비에 몰두했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보타르가―염장한 숭어의 알―를 이용한 파스타다.
“아주 좋은 어란인데?”
소금에 절여 잘 말린 어란은 만졌을 때 탄력 있게 단단하고, 겉껍질은 진한 초콜릿색이 돌았다.
아체리아는 한 뼘 크기의 어란을 보고 그 빛깔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린내도 나지 않고, 상한 곳도 없이 꾸덕꾸덕하게 잘 마른 어란이다.
“파스타에 어란이 들어가니까 곁들이는 요리도 생선이 좋겠지. 요아킴, 창고에서 마른 청어를 한 뭇 꺼내 와. 매콤달콤한 소스에 바짝 조리고, 곁들이로는 레몬과 올리브 절임을 빻아서 내놓게.”
요아킴은 아체리아가 시키는 대로 곧장 창고로 가 청어 한 뭇을 가지고 왔다. 그가 청어의 머리를 떼고 배를 갈라 다듬는 동안, 아체리아는 루비에게 파스타를 삶게 했다.
아직 견습 딱지를 못 떼었지만 의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루비가 솥 한가득 물을 끓였다. 아체리아는 단단한 어란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잡은 채 얇은 철판을 삐죽삐죽하게 뚫어 놓은 강판에 살살 갈기 시작했다.
“어, 요리장님. 어란을 썰지 않고 갈아서 얹으시게요?”
“응. 얇게 써는 건 곁들이로 낼 때 좋은 방법이고, 파스타에 얹을 때는 갈아서 내는 게 훨씬 더 풍미가 살 것 같아서. 어차피 섞어서 먹어야 하잖아?”
“파스타 소스는 어떤 걸로 하실 거예요?”
“간단하게 오일로만 하려고. 모처럼 좋은 어란을 구했는데, 맛이 진한 소스를 넣으면 그 맛이 묻혀 버리잖니. 오일과 소금, 후추, 그리고 레몬즙만으로 간을 할 거야.”
겉보기에는 무척 소박한 식사가 될 것이다. 오일로만 파스타를 만드는 것도 주로 소스를 만들 시간이 없는 평민들의 방식이었지만, 아체리아는 공작의 식탁에 그런 것을 올리면서도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뭣보다 담백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좋을 거야.”
길쭉한 파스타가 솥 안에서 익는 동안, 아체리아는 넓은 팬에 오일을 둘러 가볍게 달구었다. 뒤뜰에서 따 온 허브 약간과, 마늘은 한 개만 대강 으깨어 오일에 향을 입힌다.
“루비, 면은 준비됐니?”
“네, 이제 다 된 것 같아요!”
김이 풀풀 피어오르는 솥에서 면을 건져 내어 팬 위에 뿌리듯 올려놓자 수분과 기름이 만나 지글지글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체리아는 가닥가닥의 면에 오일이 꼼꼼히 발리도록 부지런히 팬을 움직였다.
허브의 상큼한 향기가 주방 안에 퍼질 때쯤 파스타가 완성됐다.
“청어는 다 조려졌어요?”
“거의 다 됐습니다. 요리장님이 확인만 해 주시면 됩니다.”
청어 조림에는 후추와 유자, 톡 쏘는 풍미의 겨자와 에샬로트를 넣어 매콤한 맛이 도드라지도록 만든 소스가 들어갔다. 말려서 쫀득쫀득한 생선살에 결결이 소스가 배어 불그레한 윤기가 돈다.
맛을 본 아체리아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완성된 것들부터 차례로 내어 가도록 해요!”
왕궁에서 필리파와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클라우스는 피로한 듯도 하고, 어딘지 홀가분하니 기분이 좋은 듯도 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분의 식사가 자연스럽다는 듯이 차려졌다. 앞치마를 벗고 클라우스의 옆에 앉는 아체리아의 태도에서도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파스타로군. 오랜만인데.”
“예전에는 잘 안 드셨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을까 싶어 만들어 봤습니다. 마침 아주 훌륭한 보타르가를 구했거든요.”
“여기 얹혀 있는 게 보타르가인가?”
“네. 파스타 자체는 오일과 허브만 이용해 담백하게 만들었으니, 보타르가와 함께 드셔 보세요. 그리고 이 청어 조림은 톡 쏘는 느낌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파스타를 드실 때는 레몬과 올리브 절임을 섞어 으깬 것을 같이 드세요. 맛이 산뜻해질 거예요.”
긴 설명을 듣고 있던 클라우스는 일단 파스타 위에 얹힌 보타르가를 포크 끝으로 살짝 덜어 먹어 보았다. 아주 조금만 덜었음에도 염장 식품 특유의 짠맛과 풍미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음!”
그새 파스타를 한 입 먹은 아체리아가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오일이 덮여 매끄럽고 담백한 파스타가 바탕이 되는 가운데, 어란의 짠맛과 농익은 듯한 풍미가 입 안에서 하나가 되며 살살 녹아내린다.
윤기 흐르는 오일의 향이 다소 부담스러워질 때쯤이면 먼저 넣은 허브의 향이 융단처럼 우아하게 깔리고, 그때 레몬 절임 으깬 것을 입에 넣으면 한데 어우러졌던 맛이 상큼하게 잡혔다.
청어 조림도 매우 맛이 좋았다. 딱 입맛을 돋울 정도로만 알싸한 소스의 향과 탄력 있게 쫄깃쫄깃한 생선살이 파스타와도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너무 맛있지 않으세요, 공작님? 보타르가의 풍미가 장난이 아니에요! 고작 한 뼘만 한 것이 그렇게 고가인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말렸는데도 전혀 죽지 않은 알의 식감 하며,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배어든 소금의 짠맛, 그리고 다 먹을 때쯤 은은하게 느껴지는 풍미까지! 게다가 이 레몬 올리브 절임을 곁들이로 낸 게 신의 한 수였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클라우스도 맛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아체리아처럼 장황하게 감탄하는 방법 같은 건 몰랐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접시까지 핥아먹게 맛있어.”
* * *
식사를 마치고 난 후,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식후에 마실 차는 입속에 남은 기름진 것들을 말끔하게 지워 줄 수 있도록 가벼운 허브티를 선택했다. 옅은 금빛으로 우러난 찻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문을 노크하던 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부르셨어요?”
“그래, 이쪽으로 와서 앉아. 할 이야기가 있어.”
“제게요?”
아체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클라우스의 옆에 와 앉았다.
그녀에게도 허브티가 한 잔 주어졌다. 약간 쌉싸름한 듯하면서도 가볍게 마시기 좋은 차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를 부르신 걸까요?”
“데르송 후작과 관련된 이야기야.”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의 눈살이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그 사람이 공작님께 저지른 무례가 아직도 남았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정확히는…… 데르송 후작의 영지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군.”
“그 사파이어 광산이 있다는 곳이요? 그러고 보니, 그 광산은 어찌하기로 하셨어요?”
문제의 사파이어 광산은 필리파의 명령에 의해 일단 임시로 폐쇄 조치를 취해 두었다.
좁은 갱도에 억지로 밀어 넣어져 노동을 강요받던 아이들은 다행히도 전원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아체리아는 병색이 완연한 채 바짝 말라 있던 요제프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아들이 돌아왔으니 그녀의 병도 조금 좋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 갱도 확장 공사를 계획하실 예정인 것 같더군. 이제 왕실의 소유가 되었으니 그대로 놀리기는 아까우실 테지.”
“데르송 후작은 왜 확장 공사를 하지 않고 아이들을 잡아갔던 걸까요?”
“갱도 확장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야. 욕심이 턱밑까지 차오른 자였으니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파이어가 상할 것을 염려하기도 했을 테고.”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이들이 전부 구출되어서요.”
클라우스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해 주려고 절 부르신 건가요?”
“아니, 널 부른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서랍 속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아체리아의 앞에 밀어 주었다.
“이게 뭔가요, 공작님?”
“폐하께서 네게 내리신 상이야.”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아체리아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첫머리가 화려하게 장식된 유려한 필체. 언젠가 받아 본 적 있는 필리파의 편지와 똑같은 글씨체였다.
“토지…… 양도 계약서?”
“그래. 폐하께서 데르송 후작가의 영지 일부를 내게 하사하고 싶다 하시더라고. 그리고 그 땅은 내가 너에게 양도하기로 했고.”
“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저 땅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제가 땅을 가져다 뭐에 쓰겠어요?”
“글쎄, 땅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듣자니, 데르송 후작의 영지는 건조하고 척박한 곳이라 다른 작물은 자라기 힘들지만, 감자 농사만큼은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짓는다 하더구나. 수도에는 수입되지 않는 종류도 재배가 가능하다고 하던데.”
아체리아는 너무 놀라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감자라고?
“수도에 들어오지 않는 종류의 감자요? 아니, 그런 게 대체…… 도대체 어떤 감자인데요?”
“나야 감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알 리가 있나. 난 농사에 대해서는 무지할뿐더러, 공작가의 재정에도 그깟 감자를 팔아 얻은 수입은 필요가 없어. 하지만 너라면 그 땅과 작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저, 여기 가 보고 싶어요! 도대체 어떤 감자가 난다는 건지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요!”
아체리아의 눈은 도전 정신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수도와 인근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자의 품종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품종의 감자가 왕국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 양도 계약서에 사인해. 이제부터 그 땅은 네 것이야. 그 땅에서 나는 작물은 감자에서부터 풀포기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그곳의 사람들은 감자가 주식이겠지요? 공작가에서 다 사들이면 좋겠지만, 그러면 기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러진 않겠어요. 하지만 종류별로 몇 포대씩은 꼬박 받을래요. 세상에, 도대체 무슨 종류의 감자일까? 궁금해서 오늘 잠도 안 올 것 같네요.”
연달아 쉴 새 없이 종알거린 아체리아는 문서의 내용을 꼼꼼히 읽고 그 아래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고작 감자 정도로 이렇게 눈을 반짝이며 생기발랄해질 일인가? 클라우스는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