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진심으로 들뜬 사람은 루비 한 명뿐이었지만, 네 사람은 일부러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대화를 나누며 향기 광장을 지났다.
요아킴과 아체리아, 프레드와 루비가 각각 팀을 이루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요아킴과 아체리아는 남쪽, 그리고 프레드와 루비는 서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체리아와 루비는 각자의 목에 호각 하나씩을 걸고 있었다. 손재주 좋은 프레드가 낮 시간 동안 재빨리 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보기에는 볼품이 없지만 불었다 하면 귀가 터질 만큼 시끄럽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있으면 호각을 부는 거야. 알겠지? 그리고 되도록 둘이서 떨어지지 않기로.”
“염려 말아요, 프레드 씨. 루비를 잘 부탁해요.”
“제가 프레드 씨를 잘 보살필게요, 요리장님!”
“쥐방울만 한 녀석이. 넌 내 뒤에 딱 달라붙어 있어.”
프레드는 여전히 걱정스러울 정도로 생기발랄한 루비를 끌고 사라졌다. 멀찍이 순찰을 도는 경비대 두어 명을 본 요아킴이 아체리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요리장님, 우리도 가요.”
한두 번 와 본 덕분일까? 미로처럼 복잡해 보이던 골목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다.
아체리아와 요아킴은 어제 들러 보았던 낡은 창고 쪽까지 가 보았다. 그러나 불은 꺼져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주방장님이랑 루비는 괜찮을까요?”
요아킴이 저도 모르게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하자 아체리아는 소리를 죽여 짧게 웃었다.
“너, 사실은 ‘루비는 괜찮을까요?’라고 묻고 싶었던 것 아니니?”
“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죠! 부주방장님도 우리 주방에 없으면 안 될 분인데요! 당연히…….”
“염려하지 마. 네가 루비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란 말, 루비한테는 안 할 테니까.”
어둠 속에서도 요아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요즘 들어 요아킴은 부쩍 루비를 신경 쓰며 이것저것 도와주고 싶어 했다. 자신이 견습 요리사일 때의 생각이 나서 그럴 거라 여겼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루비는 똑 부러지고 야무진 소녀였다. 가끔은 선배들보다도 센스 있는 레시피를 떠올릴 줄 알았다. 그런 루비를 물가에 놔둔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돌보려 하는 건 요아킴뿐이었다.
‘뭐, 루비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귀여우니까 응원해 줘야지.’
“요리장님은 말이에요…….”
“응?”
“공작님한테, 저기, 어떤 식으로…….”
요아킴이 어물거리자 아체리아가 말을 가로채듯 말꼬리를 잡았다.
“뭐야, 우물쭈물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저기 어, 어떤 식으로 고백을…… 받으셨나 해서요.”
아체리아는 자신이 순간 무슨 소리를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두워서 요아킴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
“네. 그, 음…… 호,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그냥…….”
“……그냥?”
“그냥 좋아한다고.”
요아킴은 ‘진심이에요?’라는 듯이 아체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공작님이 그냥,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요리장님을요?”
“그랬던 거 같은데. 나 원래 그런 거 잘 기억 못 해. 내가 안 잊어버리고 기억하는 건 레시피뿐이야.”
“아니, 아니…… 그래도요! 뭔가…… 기념비적인 순간 아니었어요? 고, 고, 고백을 받은 거잖아요. 뭔가 좀 더 이렇게…… 뭐랄까, 머리에서 막, 폭죽도 터지는 것 같고…….”
아체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몸을 숙이자, 아체리아보다 키가 작은 요아킴은 움찔하면서 어깨를 구부렸다.
“잘 들어, 요아킴. 나랑 공작님이 원래 앙숙이었던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어, 네? 아…… 네. 무, 물론 옛날엔 그랬지만…….”
“그런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식사를 잘 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던 나야. 그 뒤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지만, 그때마다 ‘이건 또 왜 이래?’라는 생각밖에 해 본 적이 없다고.”
“네에…….”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두근두근한 짝사랑과 설렘’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거지. 내 말 알겠어?”
“네? 아, 아니, 그렇지만…… 그, 그럼 요리장님은 혹시…… 공작님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건가요?”
아체리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니?”
“아니, 하지만 설레지도 않으셨다고 하고…… 기억도 못 하신다고 하고. 호, 혹시 루비도 그러면 어떡하죠. 저, 진짜 좋아하는데…….”
요아킴이 시무룩해졌다. 아체리아는 그의 부스스한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잘해 주면 루비도 마음을 열 테니까.”
“어떻게 하는 게 잘해 주는 건지 그걸 잘 모르겠어요. 루비는 절 그냥 오빠처럼 잘 따를 뿐이고…….”
“그 ‘오빠처럼 잘 따르는 것’을 이용해 보라고.”
그때였다.
게딱지처럼 납작한 채 줄줄이 늘어선 가게들 중 한곳에서 아이들이 서너 명 걸어 나왔다. 두 명은 가죽 공방에서, 그리고 한 명은 푸줏간에서. 가죽과 고기가 든 포대 자루 같은 것들을 들고 있느라 걸음은 느렸다.
“저 아이들을 지켜볼까요?”
요아킴이 묻자, 아체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죽 공방에서 나온 아이들은 가지고 나온 가죽을 뒤뜰의 장대에 널러 나왔을 뿐,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푸줏간에서 나온 아이는 자루를 안은 채 낑낑거리며 어디론가 혼자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건 분명히 못 쓰는 내장 같은 것일 거야. 근처에 파묻으러 가는 게 분명해.”
“따라갈까요?”
“조심해서. 혹시 누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체리아와 요아킴은 담벼락에 기대다시피 한 채 발소리를 죽여 가며 아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직 어려 보였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겨우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짤막하게 해진 바짓단 밑으로 드러난 종아리가 안쓰러울 지경으로 말랐다.
“저런 걸 들고 가려면 무거울 텐데.”
요아킴이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체리아가 뭐라 대꾸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누구 입에선지,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푸줏간 꼬마의 뒤로 은근슬쩍 따라붙는 키 큰 남자가 있었다.
“저놈이에요!”
“뭐? 그게 정말이야?”
요아킴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낡아 빠진 허름한 옷, 해진 모자, 그러나 묘하게 깨끗한 구두. 어제 뒤쫓다 놓친 남자였다. 틀림없었다.
“잡으러 갈까요?”
“잠깐만 기다려.”
두 사람은 더욱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살폈다.
아이는 군데군데 구덩이가 팬 공터에 멈춰 서서 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든 것들을 구덩이 안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푸줏간의 찌꺼기들을 처리하는 쓰레기장이었다.
그때, 아이의 뒤를 따라왔던 남자가 수건 같은 것으로 아이의 코와 입을 막으며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야!”
아체리아가 외친 순간, 요아킴은 몽둥이를 들고 달려 나갔다.
“아이를 내려놔!”
남자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듯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떨어트렸다. 도망을 치려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어져 있던 쇠스랑을 들고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으앗!”
“이 자식! 뭐 하는 놈이냐!”
남자의 움직임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순간 요아킴은 이자가 용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별 쓸모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요아킴 혼자, 몽둥이만 들고 상대하기는 벅찰 정도였다.
“요아킴, 조심해!”
달려와 아이의 상태를 살핀 아체리아는 아이가 아직 숨이 붙은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남자와 뒤엉켜 싸우는 요아킴 쪽으로 달려갔다.
“요리장님, 위험해요!”
요아킴이 아체리아의 몸을 확 잡아당겼다. 그 순간, 쇠스랑의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아체리아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로 등골이 서늘한 순간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피하셔야 돼요!”
“나 혼자 도망가면 너는 어쩌니?”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쇠스랑을 재빨리 휘둘러 대면서도 도망칠 길을 찾고 있는 듯했다.
순간, 아체리아는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생각해 내었다. 프레드가 듣고 달려와 줄지는 모르겠지만, 동네 사람들의 이목은 집중시킬 수 있으리라.
삑, 삐익!
“으악!”
귀를 잡아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호각 소리에 놀란 남자가 주춤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요아킴이 남자의 손에서 쇠스랑을 빼앗아 멀리 차 버린 다음, 모자를 눌러쓴 머리를 몽둥이로 확 내리쳤다.
“이 빌어먹을 놈! 이건 우리 공작님 몫이다!”
후두부를 뻑, 소리가 나도록 가격한 몽둥이가 이번에는 어깨로 날아든다. 요아킴은 싸움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무작정 두들겨 팼다.
“악! 어윽! 그만둬! 그만두라고!”
“너 같으면 그만두란다고 그만두겠냐? 이 파렴치한 자식아! 요리사의 근력이 어떤지 보여 주마!”
그때 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멀리서 경비대원들이 달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붙잡아, 요아킴!”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아체리아는 요아킴이 움직일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몸을 날려 남자의 허리를 팔꿈치로 퍽, 찍어 버렸다.
“컥! 끄윽…….”
“누가 밧줄 좀 가져와요! 이 자식이 아이들을 잡아간 범인이라고요!”
아체리아의 외침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낡은 밧줄을 가져다주자, 아체리아는 요아킴과 함께 남자의 팔뚝을 뒤로 꺾어 꽁꽁 묶어 버렸다.
경비대원들이 횃불을 높이 든 채 달려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모자를 쓴 남자는 이미 축 늘어져 기절해 있었다.
* * *
“뭐가 어쨌다고?”
잠에서 깬 클라우스는 무척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야 한밤중이고, 한창 잘 자고 있던 중에 강제로 일어나게 되면 어느 누가 기분이 좋으랴마는 클라우스의 표정은 그보다도 살벌했다.
“아체리아가 납치범을 잡아? 그게 무슨 소린가, 호즈만?”
“그…… 그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 수도 경비대 중 한 명이 저택으로 찾아왔고…… 아체리아와 요아킴이 증인으로 구치소까지 함께 갔다고 합니다. 공작님께서 소식을 늦게 들으시면 더 노하실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내 옷, 그리고 준비해둔 것들을 가져와.”
호즈만은 즉시 튀어 나갔다. 이불을 확 걷어 버린 채 침대 밖으로 나온 클라우스는 뜻밖의 소식에 기뻐할 새도 없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내가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공작님.”
클라우스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지금부터 향할 곳은 뻔했다. 구치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