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어, 요리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뭐 준비할 거 있으셨어요?”
주방 앞을 지나가던 요아킴이 조리대 앞에서 분주하게 서성거리는 아체리아를 보며 머리를 기웃기웃 들이밀었다. 점심시간은 지났고, 만찬까지는 아직 멀었음에도 그녀는 앞치마에 모자까지 갖춘 채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가까이 다가간 요아킴은 우묵한 볼 안에 담긴 씨앗 같은 것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색과 노란색이 묘하게 섞인 조그만 알갱이들은 꼭 겨자씨 같기도 했는데, 겨자씨라기에는 향기가 조금 독특했다. 약간 고소하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났던 것이다.
“얼마 전에 별장에 갔었잖아? 그 근처 시장에서 신기한 걸 많이 팔더라고. 거기서 산 거야.”
“이건 이름이 뭔데요?”
“들깨라던데. 이걸로 수프를 끓이거나 기름을 짤 수 있대. 즙을 내서 수프로 한번 만들어 보려고.”
생전 처음 듣는 괴상한 이름에 요아킴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아체리아가 만드는 것이니 어련히 맛있는 게 탄생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그녀가 하는 것을 구경했다.
물을 가득 채운 볼 안에 들깨를 가라앉히고, 말라서 떠오르는 줄기며 지저분한 것들을 신중하게 건져 낸 아체리아는 돌로 된 절구에 새 물을 붓고 들깨를 넣었다.
“제가 할까요?”
요아킴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지만 아체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할게. 넌 여기 와서 볼이나 좀 씻어 줘.”
요아킴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체리아는 공이를 야무지게 쥐고 안에 든 것들을 빻아 대기 시작했다.
들깨의 양이 꽤 되는 데다가 물도 들어 있어서 균일하게 빻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팔뚝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빻고―갈아 댄 수준이었지만― 나니, 독특한 향기가 나는 뽀얗고 걸쭉한 즙이 절구 안에 가득 찼다.
“와, 꼭 우유 같은 색이 되네요.”
“이제 이걸 육수랑 섞을 거야. 흠…… 프레드 씨가 오전에 만들어 놓은 생선 육수를 좀 써 볼까?”
프레드는 수프에 들어가는 육수를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재미있어했다. 솥 안에서 식은 육수를 살짝 떠 맛을 본 아체리아는 양념이 될 만한 것들을 몇 가지 추가해 짭쪼름한 맛이 나도록 만들었다.
“요아킴, 여기 있는 즙을 이걸로 떠서, 여기다 넣어 줘.”
육수 솥을 들고 있는지라 턱짓과 대명사로만 이루어진 명령이었지만 요아킴은 잘도 알아들었다. 폭이 깊고 커다란 국자로 들깨 즙을 조심스레 떠서 솥 안에 옮기자, 아체리아는 곧장 불을 올려 그것을 끓이기 시작했다.
“요리장님, 그런데 다른 재료는 하나도 안 들어가는 거예요?”
“응? 아냐. 다른 것도 들어가야지. 그런데 뭘 넣으면 좋을까, 고민하는 중이야.”
“생전 처음 보는 건데, 뭘 넣으면 좋을지…… 무슨 맛이 날지 하나도 감이 안 오네요.”
“나도 처음 해 보는 거라서 고민이 좀 되네. 흠, 견과류와 버섯을 좀 넣어 볼까? 버섯은 어디 넣어도 무난한 맛이 나잖아.”
아체리아는 곧장 자루를 뒤져 버섯을 찾아냈다. 물이 올라 탱글탱글한 갓이 맛이 좋을 것 같았다.
두세 종류의 버섯을 같은 폭으로 균일하게 써는 동안, 요아킴은 주방 창고에서 캐슈넛과 호두가 든 작은 포대를 한 개씩 가지고 왔다.
“그것 좀 빻아 줄래? 너무 곱게는 말고, 씹히는 맛이 날 정도로.”
요아킴은 작은 공이를 들고 캐슈넛과 호두를 열심히 빻았다. 아체리아는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버섯을 볶은 다음, 탱글탱글하던 살이 말랑하게 처질 정도가 되자 얼른 솥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폭폭거리는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던 수프 위에 맛있어 보이는 연둣빛 기름막이 떠오른다. 수프가 한 번 더 끓어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소금과 후추로만 간단하게 간을 했다.
“와, 이거 맛있어 보이는 버섯 수프가 됐네요!”
“버섯 들깨 수프지. 너도 한 그릇 먹어 볼래?”
“네! 먹어 보고 싶어요!”
아체리아가 만든 요리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버섯 들깨 수프의 첫 시식자는 그리하여 요아킴이 되었다. 적당한 만큼만 담은 수프에 빻은 호두와 캐슈넛을 뿌린 뒤, 단맛이 없는 크림을 살짝 얹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수프를 한 술 떠먹은 요아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때? 괜찮은 것 같아?”
“네. 이거 엄청 부드럽고 맛있어요. 맛이 담백하면서도 고소하고…… 텁텁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네요. 크림이 텁텁한 맛을 오히려 중화해 주는 것 같아요.”
“다행이다. 처음 써 보는 재료라서 생각했던 맛이 안 나면 어쩌나 싶었거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체리아는 수프 한 그릇을 따로 덜어 냈다. 클라우스에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요리장님,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 정말로…….”
요아킴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속닥이기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그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정말로 그놈을 잡을 거야.”
“안 나타나면 어떡하죠? 그러니까…… 빈민가 말고, 다른 곳에서 아이를 잡아 오기라도 하면요.”
아체리아와 요아킴, 그리고 프레드와 루비는 어젯밤 요아킴이 뒤쫓았던 아동 납치범을 현장 검거할 계획을 세웠다.
범인은 사흘 뒤까지 아이 네 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이를 낚아채기 쉬운 장소에 또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계산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그렇지 않을 거야. 설령 한두 명 정도는 그렇다 하더라도, 경비대의 눈을 피해서 아이들을 사흘간 네 명이나 잡으려면 자기가 잘 아는 곳을 선택하고 싶겠지. 몸을 숨기기 쉬운 곳 말이야.”
“하긴, 어쨌든 우린 그놈을 잡아야 하잖아요. 그쵸? 그럼 뭐라도 해야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요아킴은 갑자기 기운을 내야겠다 싶었는지 버섯 들깨 수프를 와구와구 떠먹고는 한 그릇 더 먹어야겠다며 일어섰다.
아체리아가 공작의 침실로 올라갔을 때, 클라우스는 안락의자에 앉아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호즈만은 다른 일을 하러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를 들고 잠깐 고민하다가,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고는 클라우스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았다.
잠든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클라우스를 납치범이라고, 살인자라고 매도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지만, 만약 법관들이 정말로 클라우스를 끔찍한 범죄자라고 생각해 잡아들인다면 그다음은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아체리아는 굳게 결심하면서 잠든 클라우스의 손을 꼭 잡았다. 달래 주려는 것처럼. 다 괜찮다는 듯이.
“음…….”
작게 앓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감겨 있던 클라우스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눈을 뜬 그는 아체리아에게 잡힌 손을 한 번 바라보고, 그다음은 아체리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마지막으로는 아직도 뽀얀 김이 오르는 수프 그릇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 해?”
“주무시는 얼굴 구경했어요.”
“들어왔으면 깨우지.”
클라우스는 손을 휙 돌려 아체리아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랄 만한 힘으로 그녀를 일으켜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뭘 만들어 온 거야?”
“들깨 버섯 수프요.”
“들깨? 그게 뭐지?”
“기억 안 나세요? 별장에 갔을 때, 시장에서 제가 씨앗 같은 걸 왕창 샀잖아요. 그걸로 수프를 끓여 봤어요.”
“아, 그 겨자씨처럼 생겼던 것 말이지. 향기는 겨자와 영 다르군.”
“맛도 다를걸요? 더 식기 전에 드셔 보세요. 맛있을 거예요.”
아체리아가 일어나려 하자 클라우스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듯이 안았다. 졸지에 무릎이 아니라 허벅지에 걸터앉은 꼴이 된 아체리아는 뺨을 슬금 붉히면서 클라우스를 휙 내려다보았다.
“잠이 덜 깨신 거 아니에요?”
“아닌데. 잠은 다 깼어. 내 정신은 멀쩡하다고.”
“이 자세는 좀…….”
“왜, 불편해?”
“아니, 무거우실 거 같아서요.”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툭 건드리면 톡 깨지는 유리 조각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몇 달 전까지는 그러셨잖아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체리아는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클라우스의 허벅지 위에서 몸을 살짝 돌렸다. 팔걸이 때문에 완전히 옆으로 돌아앉을 수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머리를 끌어안는 시늉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허리를 안고 있던 클라우스의 한쪽 손이 휙 올라오더니 아체리아의 어깻죽지를 부드럽게 감싸 눌렀다. 고개가 약간 숙여진 틈을 놓치지 않고, 그는 아체리아의 입술 옆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요즘 불쑥 키스하시는 경우가 너무 잦다고 생각 안 하세요?”
“이만하면 많이 참는 거지.”
“대낮에 이런 자세로 안고 계시는 게 참는 거라고요?”
“내 머릿속을 열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그거 참, 별로 열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체리아는 얼른 클라우스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더 그러고 있다가는 자신까지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였다.
크림이 반쯤 녹은 들깨 버섯 수프를 받아 든 클라우스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역시나 겉보기가 문제였나. 맛본 결과 수프는 맛도 냄새도 훌륭했지만, 생긴 것은 그렇지가 못했다.
“잘못 만든 포리지 죽 같은데.”
“그게, 드셔 보시면 또 그렇지가 않아요. 일단 드셔 보세요.”
클라우스는 미심쩍다는 듯이 눈썹을 까딱이면서도 순순히 한 스푼을 떠 입에 넣었다. 담백한 크림의 부드러움이 먼저 혀끝을 건드리는가 싶더니, 곧 고소하면서도 적당히 간이 된 수프의 맛이 느껴졌다.
“어떠세요? 맛있죠?”
“……보기는 좀 그렇지만 맛은 괜찮네.”
“이 미적지근한 반응은 뭐람. 좀 더 칭찬해 주시라고요. 맛있는 건 맛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 먹어야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도 모르세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인데.”
* * *
한밤중이 되자 공작저는 곧 조용해졌다. 클라우스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늘 늦게까지 깨어 있던 호즈만도 오늘은 일찌감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홀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밤잠이 없는 시종들 몇몇이 모여 싸구려 포도주를 따고 있을 때, ‘공작님의 이것저것 터무니없는 누명을 벗기기 위한 4인조’는 마치 밤손님들처럼 몰래 저택을 빠져나왔다.
“왠지 두근두근한데요!”
어둠이 깔린 길을 내달리며 루비가 조그만 소리로 외쳤다.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니라고, 루비.”
“저도 알아요, 부주방장님. 하지만 범인을 잡는 거잖아요! 꼭 이야기책에 나오는 탐정이라도 된 거 같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