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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13)화 (113/144)

113화

“뭐라고요?”

한밤중에 잠에서 깬 아체리아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야 실내복 차림인 데다가 이곳은 자신의 방 한가운데였고, 거기에 프레드가 들어와 있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지금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요아킴이 없어져요?”

“그래요.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아서 허겁지겁 알리러 온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프레드는 정말로 급하게 뛰어왔는지 아직도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체리아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물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일단 물부터 마셔요, 프레드.”

목이 타들어 가던 참이라 프레드는 고맙게 그 물을 받아 마셨다. 아체리아는 실내복 위에 겉옷을 걸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요아킴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요리장님은 여기 계세요. 내가 다녀올 테니까.”

“프레드 씨 혼자서 어떻게요? 저랑 같이 가는 게 나아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장담을 넘어 거의 우겨 대는 방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둘이서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논박을 계속하다가는 목소리가 높아져 다른 사람들을 깨우게 될 수도 있었다.

프레드는 결국 아체리아와 함께 담을 타 넘어 공작저의 바깥으로 나왔다. 치마를 입었음에도 아체리아는 담을 잘 탔다. 과연 15년 넘게 주방에서 일한 근력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는 걸 과시하는 것처럼.

“요아킴은 어디로 갔죠?”

“광장 남쪽으로. 난 서쪽으로 갔지.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요아킴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쪽 빈민가로 가 보았더니 쥐새끼 한 마리 없더군. 아니, 쥐새끼 한 마리도 없다는 건 취소. 어쨌든 요아킴은 코빼기도 안 보였어요.”

“끌려간 흔적 같은 것도 없었어요?”

“글쎄요, 그렇게까지 눈이 밝진 못해서. 하지만 요아킴이 순순히 끌려갈 놈도 아니잖아요? 몸싸움이 있었다면 어수선했을 텐데 그러진 않았어요.”

두 사람은 향기 광장을 가로질러 남쪽 빈민가로 들어갔다. 꼬불꼬불 얽힌 골목은 조용했다. 이따금 새벽걷이를 나온 사람들이 아체리아와 프레드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이러다 우리가 의심을 받는 건 아닐까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그러자 프레드가 얼른 아체리아의 팔짱을 끼더니 그녀를 자신 쪽으로 단단히 당겼다.

“뭐 하시는 거예요, 프레드?”

“가만히 있어요. 사람들의 눈을 피하자니 어쩔 수 없이 이런 곳밖에 선택지가 없었던 연인 흉내라도 내야 하니까.”

“프레드랑 저랑 나이 차이가 몇 살인지는 아세요?”

“그러니까 사람들 눈을 피해서 이런 데서 만나지.”

기분이 묘했지만 일단 남들의 시선을 피하기는 해야겠기에 아체리아는 프레드의 말을 납득했다.

얼마간 걷던 그들은 낡아빠진 창고 하나를 발견했다. 요아킴이 두 남자의 말을 엿들었던 바로 그곳이었지만, 아체리아와 프레드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잠깐만요.”

무심히 창고를 지나치려던 프레드가 속닥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프레드?”

“이 창고에서 기름 타는 냄새가 나서요. 안 느껴져요?”

아체리아는 문 쪽으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 불을 피우고 있었던 듯, 심지와 기름이 탄 매캐한 냄새가 났다.

“여기 사람이 있었나 본데요. 근데…….”

프레드가 불 꺼진 창고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겉보기에만 창고로 꾸며 놓았을 뿐 안쪽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왜 이런 데에 있는지 모를 테이블 하나와, 아직도 유리가 따뜻한 램프 정도였다. 의자는 두 개, 바닥에는 거칠게 끌린 자국.

“어째 멀쩡한 용도로 사용되는 곳은 아닌 것 같네요.”

“요아킴이 여기 있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프레드?”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수상한 곳이라는 말이에요. 아무리 봐도 멀쩡한 논의를 할 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때였다. 주인 없는 창고 안을 기웃거리던 프레드와 아체리아는 다급하게 뛰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문을 쾅, 닫았다.

누군가 모퉁이를 돌아 불쑥 튀어나왔다. 프레드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밀며 앞으로 나선 순간, 상대방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동그랗게 뜬 눈동자.

“요아킴!”

아체리아는 너무 놀라 요아킴을 와락 끌어안았다. 요아킴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어? 어? 요리장님? 부주방장님? 여긴 대체 왜 오신 거예요?”

프레드는 그제야 한숨을 쉬며 몽둥이를 내리……려다가 말고, 끄트머리로 요아킴의 머리를 톡, 때렸다.

“아야!”

“‘아야’는 무슨. 너! 한 시간 뒤에 만나기로 해 놓고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딜 다니다 왔어?”

“아, 그게요! 그거!”

호들갑을 떨며 발을 동동 구르던 요아킴은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무도 없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선 안 되겠어요. 그놈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아체리아가 놀라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놈? 그놈이 누군데? 설마…… 납치범을 찾았어?”

“아마도요. 아니, 네. 맞아요. 찾았어요. 그런데 놓쳤어요.”

“놓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우연히 그놈과…… 그놈에게 돈을 주고 아이들을 잡아 오라고 시킨 놈의 대화를 엿들었어요. 그래서 뒤따라가다가…… 제가 뒤쫓아 가는 걸 알아챈 건지 뭔지, 잠깐 모퉁이를 도는 사이에 휙 사라졌어요. 그래서 놓쳐 버렸어요. 죄송해요.”

요아킴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모자를 쓴 남자를 쫓아갔던 그는 복잡한 길을 따라 약 30분 정도 남자를 추격했지만 끝내 놓치고 말았다. 남자는 빈민가의 골목을 속속들이,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곳까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체리아는 요아킴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잔소리를 했다.

“어쩌자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

“하, 하지만요, 요리장님. 이대로 놔뒀다가는 공작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안 그래요? 게다가 그놈이 말하길, 사흘 뒤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더 필요하다고 했어요.”

“뭐? 네 명? 그게 정말이야?”

요아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체리아와 프레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야?

“일단은 돌아가죠. 여기서 계속 어슬렁거리다가는 경비대 눈에 띌 테고, 그러면 귀찮은 일이 더 생길 테니까요.”

프레드가 말했다. 아체리아와 요아킴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곧 세 사람은 어두운 골목길을 벗어나 광장 쪽으로 사라졌다.

* * *

에른스트의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즉, 공작저를 향한 반발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내놔라!”

“잡아간 아이들을 돌려줘!”

“문을 열고 나와!”

공작저의 정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우 몰려들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클라우스가 호즈만을 통해 고용한 새로운 경비원들은 밖에서 사람들이 외쳐 대거나 말거나 정문 앞에 버티고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 아이들을 내놔!”

누군가 뭉그러진 과일을 정문에 던지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진 과즙이 경비원들의 옷에도 튀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귀족가의 경비들처럼 칼을 뽑으며 위협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만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클라우스였다. 공작저를 지키되, 결코 사람들과 충돌하지는 말 것. 특히 무기를 꺼내 위협하지 말 것.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지니고 있는 것은 허락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려면 아마 수도 시민의 절반 이상이 공작저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야만 가능할 것이다.

모여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던 사람들은 경비원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풀에 지쳤는지, 김이 샌 건지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다. 언제나 깔끔하던 공작저의 문 앞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정원에 모여 상황을 지켜보던 하인들이 얼른 문을 열고 나가 쓰레기를 치우는 동안, 클라우스 역시 서재의 창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공작님.”

호즈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클라우스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려 호즈만을 보았다.

“소란은 좀 가신 것 같군.”

“예. 그렇지만…… 다시 또 올 것입니다.”

이제는 호즈만도 수도에 퍼져 있는 해괴한 소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리고 노발대발 뛰쳐나가려는 것을 예시카와 다른 하인들이 달려들어 겨우 막았다.

“저 무도한 자들을 싹 다 잡아들여야…….”

“진정해, 호즈만.”

당사자인 클라우스는 의외로 침착한 태도였다. 호즈만은 겨우 튀어나오려던 욕설을 참았지만, 시뻘게진 얼굴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몸을 기울인 클라우스가 호즈만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후작령 쪽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나?”

“예, 아직은…… 아무런 말도 없습니다.”

“그래. 나가 보도록 해. 아참, 아체리아를 좀 불러 줘.”

“알겠습니다.”

호즈만은 이제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의 방이나 서재에 드나드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공작저 내에서만큼은 아체리아를 클라우스의 약혼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름을 받은 아체리아는 곧 올라왔다. 뭘 하다 왔는지 앞치마에는 밀가루며 소스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부르셨어요?”

“주방에 있다 왔어?”

“그럼요. 요리사가 달리 어디 있겠어요.”

다행히 어려운 부분은 다 끝나서, 나머지는 다른 요리사들에게 맡기고 온 참이다. 지저분해진 앞치마를 벗어 손 안에서 구긴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에게로 다가섰다. 클라우스는 그녀에게서 앞치마를 빼앗아 의자 위에 툭 내던졌다.

“왜 그러세요?”

“그냥 네 에너지가 좀 필요해서.”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고.”

손을 맞잡은 순간,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손이 생각 외로 차가워 깜짝 놀랐다.

“손이 너무 차가워요, 공작님.”

“괜찮아. 좀 긴장했을 뿐이야.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따뜻해지겠지.”

“긴장을 하다니, 왜요?”

주방은 요란한 데다가 정신없이 바빠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아체리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클라우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만 으쓱하고는 따뜻하게 달아오른 아체리아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

“또 같이 음악극이라도 보러 가자고.”

그가 말하는 ‘일’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뻔했다. 아체리아는 왠지 기운이 빠진 듯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끝날 거예요, 공작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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