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체리아는 내내 불안한 상태였다. 클라우스가 뭔가 조치를 취해주었으면 싶었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속 터져 죽겠어, 정말!’
범인을 찾아보겠다는 걸 클라우스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아체리아도 섣불리 움직일 마음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은 수그러들 생각을 않는데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이 꾹 닫힌 클라우스의 서재를 흘겨본 아체리아는 잔뜩 화가 났다고 시위라도 하듯 발을 쿵쾅거리며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방에는 요아킴과 루비가 프레드에게서 소스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부주방장인 프레드는 요즘 비는 시간마다 두 사람에게 요리를 가르치면서 한가한 시간을 때우는 듯했다.
“요리장님?”
씩씩거리며 들어온 아체리아를 보며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요아킴이었다. 이윽고 프레드와 루비도 고개를 돌렸다.
“요리장님, 무슨 일이에요?”
“화나셨어요?”
각자 한마디씩 하는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주방 안으로 들어온 아체리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유가 든 통을 열었다. 점심때 마시고 남은 우유는 절반쯤이었다. 아체리아는 작은 컵을 꺼내어 우유를 한 잔 떠낸 다음 숨도 쉬지 않고 그것을 전부 마셨다.
“화났냐고요? 당연히 났죠! 사태가 이렇게 됐는데 도저히 긴장이라고는 안 하는 것 같은 누구 때문에요!”
그 ‘누구’는 지금 서재에서 유유자적 독서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사태라니, 무슨 사태요?”
“‘누구’라는 게 누구인데요?”
“누구는 누구야! 입 짧고 까다롭고 숙녀 앞에서 뻔뻔하게 셔츠까지 갈아입는 공작 말고 그럴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프레드와 요아킴은 서로를 멀거니 쳐다보았고, 루비는 뺨을 붉히면서 “어머” 하는 소리를 내었다.
“요, 요리장님…… 셔츠라니…….”
“설마 공작님과 그…….”
“오해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멋대로 부풀어 가던 상상은 순식간에 푹 꺼지고 말았다.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려나 싶었던 요아킴이 실망스런 한숨을 쉰 순간, 아체리아는 발을 탕, 구르면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미치겠어요! 밖에서는 우리 공작님이 애들을 잡아먹었다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사람들이 공작가 담벼락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단 말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작님이 애들을 잡아먹다니?”
“설마, 요즘 수도에서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걸 왜 공작님 탓으로 돌린다는 거예요?”
요아킴과 프레드가 한마디씩 물었다. 아체리아는 그제야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도로 싸쥐었다.
“아윽! 난 진짜 바보야!”
“잠깐만요, 요리장님.”
프레드가 앞으로 나섰다.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말이네요.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죠.”
아체리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의자에 앉았다. 나머지 세 사람도 아체리아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요아킴의 표정은 볼만했다. 루비와 프레드도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잠깐만요. 그러니까…… 공작님의 건강이 좋아진 게, 아이들을 잡아먹어서 그런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고요? 사람들이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진짜로 믿어요?”
“그렇다니까, 요아킴.”
“왜 하필 공작님이죠? 평소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집 안에만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소문이 퍼졌나?”
거기에는 시드레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얽혀 있었다. 아체리아는 귀족들의 사정까지는 시시콜콜하게 몰랐지만 시드레 백작이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시드레 백작이라는 사람이 공작님을 미워해요.”
“시드레 백작이라면…… 전에 락케 패거리가 끌려가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던 그 사람이잖아요?”
“설마 그 사람이 그때 일로 공작님께 원한이라도 가진 거예요?”
요아킴의 말에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어요? 아니, 그 소문을 믿는 사람들은 또 뭐예요?”
“아이들이 자꾸 사라지니까 다들 무서워서라도 범인을 빨리 잡고 싶을 거야. 실체가 없는 것보다야 낫잖아? 누군가를 지목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는 거겠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해요. 공작님이 너무 안되셨어요.”
마음씨 착한 루비는 진짜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내가 범인을 잡아 보겠다고 했는데, 공작님이 절대로 나서지 말라고 하시잖아.”
“그거야 당연하죠!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허락하겠어요?”
요아킴이 클라우스의 입장을 대변하여 소리치자 아체리아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주변의 지리를 잘 안단 말이야! 며칠 잠복해 있다 보면 분명 또 나타나겠지! 그때 잡아들이면 되잖아!”
그때 프레드가 벌떡 일어났다. 팬에 올려 두었던 소스가 끓었던 것이다. 육수가 든 솥에 소스를 붓고 몇 번 휘저은 다음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요리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공작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이해가 갑니다. 이런 위험한 일에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해라’ 하고 덥석 허락하시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하지만…… 이대로 범인이 잡히길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프레드 씨? 빨리 잡아 버려야 공작님이 사람들에게 몰매 맞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요.”
사람들이 쳐들어온다고 한들 감히 공작의 몸에 손끝 하나 댈 수 있으랴 싶었지만, 아체리아는 진심으로 클라우스가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프레드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요아킴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해 볼까요?”
모두의 시선이 요아킴에게로 쏠렸다.
아체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너랑 같이 하겠다고 공작님께 이미 말씀드렸어. 하지만 안 된다고 하셨다니까.”
“아니, 요리장님이랑 같이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 혼자 하겠다는 거죠.”
“너 혼자? 무슨 수로?”
아체리아가 놀란 표정을 짓자 요아킴이 씩 웃었다.
“옛날에, 락케 패거리가 밤마다 공작저를 빠져나가 요리조리 돌아다녔던 거 모르셨어요? 그때 저도 따라다니면서 온갖 잔심부름을 했어요. 시내 지리라면 머릿속에 빤하다고요.”
“하지만 혼자서는…….”
“아이들을 잡아간다 하더라도, 그 애들을 데리고 단번에 멀리까지 가지는 못할 거 아니에요? 분명 어딘가에 들를 거예요. 애들을 데려가려면 마차든, 배든 필요할 테니까요. 거길 찾아내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놓칠지도 모르지. 너랑 나, 둘이 나가는 게 좋겠어.”
“저도요, 저도 잊지 마세요!”
프레드와 루비까지 이어서 나섰다. 아체리아는 도저히 무슨 표정을 해야 할지 몰라 얼굴을 찡그렸다가, 웃었다가, 결국에는 입가를 괴상망측하게 찌푸린 채 이렇게 말했다.
“다들 나서 줘서 고마워요. 그럼 작전을 좀 짜 볼까요?”
그리하여 클라우스의 아동 납치 및 식인 누명을 벗기기 위한 4인조가 즉석에서 결성되었다.
* * *
닐스 엥글턴은 수도에 처음 왔을 때처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수도를 떠났다. 아마도 엥글턴 후작령으로 돌아갔겠지만, 시드레는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흥, 그런 소심한 작자 따위에게 자리를 줄 수는 없지.”
클라우스를 끌어내리고 나면 공작의 자리는 공석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닐스는 언제 꼬리를 말고 도망쳤냐는 듯이 다시 얼굴을 내밀겠지만, 시드레는 그에게 공작의 자리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스몽트 공작가는 클라우스의 대에서 끝장이 날 것이다. 공작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만, 망쳐지고 더럽혀진 명예를 지속적으로 까 내리고 위협한다면 결국에는 모두 떨어져 나가리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시드레는 티 테이블 위에 놓인 몇 장의 봉투를 차례로 뜯어보았다. 모두 묵직했고, 철저하게 봉인되어 있었지만 어디서 보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문양이나 표식은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보낸 것이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아야 하므로.
꽤 긴 내용의 편지를 그녀는 빠르게도 읽어 내려갔다. 종이 속의 글에는 많은 양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주로 왕궁과, 왕에 관한 정보들이었다.
“이런 방식은 내 취미에 맞지 않지만…….”
종이의 날카로운 테두리를 어루만지며 시드레가 조용히 읊조렸다.
“폐하, 스스로 뿌린 씨앗이니 기꺼운 마음으로 거두시겠지요?”
시드레의 눈동자에 비친 촛불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시드레는 종이에 적힌 내용과 날짜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그것을 벽난로 안에 집어넣어 불을 피웠다. 장작을 땔 만한 계절이 아닌지라, 하녀로 하여금 미리 준비시켜 놓은 나무는 기름에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보수파의 귀족들은 그들이 말하는 ‘거사’를 시시각각 앞당기며 준비하고 있었다. 동부와 북부의 파벌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의 세력은 시드레 백작이라 해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필리파의 폭주를 피해 은밀히 모인 그들은 서로 결탁하여 다음 대 왕으로 옹립할 사람까지 찾아냈다. 왕의 서자이지만 왕궁에 들어가지는 못한 왕자로, 이제 겨우 일곱 살이 되었을 뿐인 어린아이다.
그 아이는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라나고 있었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아이를 후원하는 것은 필리파의 손에 의해 탑으로 귀양을 가게 된 9왕자의 어머니였다.
“아이 옆에는 유모만 있다…… 딱 맞는 인물을 찾아냈군.”
일곱 살짜리 아이가, 그것도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아이가 왕궁에 들어와 무얼 어쩌겠는가. 결국 허수아비일 뿐인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9왕자의 어머니와 섭정이 되겠지.
그런 뒤에 시간이 1~2년쯤 흐르면 어린 왕은 아무도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는 가운데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릴 것이고, 돌아온 9왕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시드레는 보수파 귀족들이 그리고 있을 큰 그림을 이해했다.
그러기 위해서 보수파 귀족들은 필리파를 없애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암살, 누가 저질렀는지 파악할 수 없을 방법과 때를 찾아 차근차근 준비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시드레는 그들의 구심점이 될 새로운 수장이 되리라. 오랫동안 수도에서 자리를 지켰고, 용케 이번 숙청도 피해 간 시드레 백작은 충분히 보수파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지위도 더 이상 백작이 아닐 것이었다.
기대되는군.
시드레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꼬부라지며 재가 되어 가는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