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기분 나쁜 동화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현실에 접붙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페터는 잘 익은 닭고기를 잘라 제 접시에 덜어 놓으면서 나머지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했던 이야기를 잘 생각해 봐. 거인은 아이들을 잡아가서 굴뚝 안에 숨겨 놓았어. 그 덕분에 사람들의 낫에 머리가 떨어지는 걸 면했지. 지금 수도에서 아이들을 잡아가고 있는 사람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이들을 숨긴 것이 아닐까?”
“그랬을 수 있지만, 아이들을 잡아다 숨길 이유가 뭐란 말이야?”
릴리엇이 물었다. 페터는 잘 익은 감자 하나를 우물거리다 삼켰다.
“이유야 여러 가지일 수 있지. 첫 번째는 그 거인처럼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잘 보관해 둔 경우인데 이건 클라우스에게 현재 씌워져 있는 혐의이기도 하지. 하지만 밥맛 떨어지니까 빼고.”
나머지 사람들의 밥맛을 다 떨어지게 만든 주제에 그는 닭고기 한 점을 또 잘라 잘도 삼켰다.
“남자애만 데리고 갔으면 해적질, 여자애만 데리고 갔으면 악취미인 놈들 손에 팔아먹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듣자니 성별도 가리지 않는다지? 그러면 남은 건 뻔하지 않나. 노예지.”
“왕국에 노예가 어디 있어, 페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릴리엇이 뾰로통하게 대꾸했지만 페터는 모르는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이놈이 노예다, 하고 이마에 낙인을 찍어야만 노예인가? 노예처럼 사는 사람은 지금도 왕국 내에 많아, 릴리엇.”
“그러니까 페터 자네 말은, 애들을 데려가는 그놈이 아이들로 하여금 뭔가 일을 시킨다는 말인데.”
에른스트의 말에 페터가 바로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체 그런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힘깨나 써야 하는 일은 당연히 어려울 테고, 또 어떤 곳이건 간에 낯선 아이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말이 새 나갈 것은 뻔한 일이잖나.”
“아이건 어른이건,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일자리가 몇몇 있지. 산골의 약초꾼들, 남의 무덤을 파헤쳐 보석을 캐는 놈들, 바닷가에서 그물 짜는 일, 귀족들 거실에 깔릴 양탄자를 엮는 일, 혹은 광산.”
“광산이라고?”
에른스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갱도가 넓으면 상관없지만, 영지의 광산 중에는 갱도가 좁아 광부들이 들어가기 힘든 곳이 많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니 노다지가 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단 말씀이야.”
“페터,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주워듣는 거야?”
릴리엇이 황당하다는 듯이 묻자 페터가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내가 1년 중 얼마를 집 밖으로 돌아다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런 곳에서 아이들을 납치해 데리고 갔다……. 일리가 있는 말인가?”
“당연히 일리가 있지. 즉, 클라우스. 자네가 조사해 봐야 하는 곳은 몇 군데로 좁혀지네. 여러 영지 중에서 방금 내가 말한 것들로 수익을 내는 곳이 어딘가 생각해 봐. 약초 캐는 거야 큰돈이 못 되니 제쳐 두고, 무덤 파 뒤집고 다니는 놈들이 수도에만 머물고 있을 리 없으니 그것도 제쳐 두자고. 그러면 바다를 끼고 있는 영지, 혹은 융단 같은 수공예품이 많이 나는 영지, 광산이 있는 영지. 그중에서도, 아동 납치까지 할 만큼 절실한 필요성을 가진 곳.”
릴리엇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도 모르게 입술 위에 얹힌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있어, 그런 곳.”
나머지 네 사람의 시선이 릴리엇에게로 향했다. 릴리엇은 답답하다는 듯이 무릎 위로 주먹을 꽉 쥐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잊어버렸어? 동부 지역의 사파이어 광산 이야기!”
그러자 에른스트와 클라우스의 얼굴에도 비로소 놀란 표정이 드리웠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 왕성 연회에서 지나가듯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릴리엇이 말을 이었다.
“일전에 백작 영애의 티 파티에 갔을 때 시드레 백작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 새로 채굴된 희귀한 사파이어로 티아라를 만들기로 했다고……. 그 광산이 있는 영지가 누구의 영지였더라?”
“데르송 후작이야.”
클라우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아체리아만이 영문을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기, 저…… 그럼,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말씀은…….”
“‘여러분’은 아니지, 아체리아. 저 녀석의 말이지.”
에른스트가 애써 장난스럽게 페터를 턱짓했다. 아체리아는 오른쪽에 앉은 페터를 돌아보았다.
“도련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도련님은 무슨 도련님. 그냥 ‘페터’라고 해.”
불만스러운 말투이긴 했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페터가 원래 잘 툴툴거린다는 걸 알고 있는 아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페터 님은, 그러니까, 아이들이…… 광산으로 납치되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그리고 그 광산의 주인이 데리송…… 데르송 후작이라는 거고요? 그렇죠?”
“아직 증거가 있는 건 아니야, 아체리아.”
릴리엇이 달래듯이 말하며 테이블 위로 아체리아의 손을 꼭 쥐었다. 아체리아는 놀라고 긴장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자 걷잡을 수 없었다.
“증거는 없지만, 가능성은 높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클라우스의 말이었다. 여태까지 그들은 아이들을 데려가 봐야 별 쓸모가 없으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몸값을 요구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페터의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머릿속이 환히 트이는 것 같았다. 왜 몰랐을까.
하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 같은 것을 그들은 전혀 몰랐다. 이리저리, 발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온갖 것들을 보는 페터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은 손도 대지 않은 요리를 말끔하게 먹어 치운 페터는 느긋한 태도로 백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골방 폐인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자, 단서를 얻었으면 이제 엉덩이 들고 움직일 계획을 짜야지.”
* * *
“제가 해 볼게요.”
에른스트와 릴리엇, 페터가 돌아간 뒤 아체리아는 곧장 클라우스의 방으로 올라갔다.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내가 하겠다’는 말을 클라우스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습기 가득한 날, 흐린 하늘을 닮은 회청색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이던 그는 별 대답 없이 입에 머금었던 물을 삼켰다. 흰색 도자기로 만들어진 잔에는 떡갈나무 잎사귀가 상감되어 있었다.
“뭘 해 보겠다는 거야?”
“범인 잡는 거요. 제가 해 볼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절대로 안 돼.”
“왜요?”
아체리아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돌아서는 클라우스의 팔을 붙잡았다. 셔츠를 갈아입기 위해 목깃의 단추를 풀던 클라우스가 놀란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돌아보았다.
“나 옷 갈아입을 거야.”
“그런 건 좀 이따 하세요!”
“지금 갈아입고 싶은데. 계속 여기 서 있을 거야? 보는 데서 갈아입어도 돼?”
클라우스가 일부러 능글거리며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아체리아는 화난 표정으로 팔짱을 척 꼈다.
“좋아요, 갈아입으세요. 갈아입으면서 제 이야기 들으세요.”
“난 분명 안 된다고 했어.”
그렇게 대답한 클라우스는 진짜로 셔츠를 벗을 기세로 단추를 풀었다. 앞섶이 벌어지며 흰 피부가 드러나자 아체리아는 당황해서 몸을 옆으로 돌렸다.
“갈아입으라고 한 건 너다?”
“누, 누가 뭐래요?”
“내가 널 희롱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슬쩍 웃어 보인 클라우스는 단추를 다 푼 셔츠를 벗고 호즈만이 준비해 놓은 새 셔츠를 집어 들었다. 아체리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클라우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여전히 말랐지만 예전에 비하면 살도, 근육도 제법 많이 붙었다. 옷을 입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벗겨 놓고 보니 확실히 체격이 좋아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탄탄해 보이는 어깨도 생각보다 넓었다. 그가 새 셔츠를 걸치자, 얇은 옷감 아래로 날갯죽지와 등의 잔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런 걸 보고 흐뭇해할 때가 아니잖아!’
아체리아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풀어 내린 곱슬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공작님, 제가 할 수 있어요. 저 이래 봬도 빈민가 쪽 지리를 잘 안다고요.”
요제프의 집을 찾아가느라 헤매면서 근방의 지리를 다 익혀 버린 아체리아였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위험하긴 왜요? 제가 어린애인가요? 상대는 어린아이만 잡아가잖아요. 그리고, 저 혼자서 할 것도 아니에요.”
“그럼 누구랑 같이하려고?”
“요아킴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애는 잽싸고 힘도 좋으니까요.”
“요아킴이라면 그 초보 요리사 녀석? 깡말라서 나뭇단이나 들 수 있을까 싶게 생겼잖아.”
“마른 건 맞지만 힘은 좋아요. 비실비실해서야 요리사가 될 수도 없다고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요아킴은 또래 남자애들과 비교하면 매우 마른 편이었지만, 식욕도 왕성하고 체력도 좋았다. 무거운 곡식 포대 같은 것도 번쩍번쩍 잘 들었다. 락케 패거리가 쫓겨 나간 후부터는 매사에 자신감이 붙어서 더 튼튼해진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네가 직접 나서는 건 안 돼. 폐하께 보고하면 사람을 푸실 거야. 그분께 맡겨 두자고.”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거라고요! 공작님이 직접 그놈을 잡아서 고발하셔야 믿을 거예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아체리아. 놈들이 뭘 꾸미고 있을지 알 수 없어. 게다가 넌…….”
“저는 뭐요?”
클라우스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아체리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외모가 너무 눈에 띄어.”
“제 외모요? 제 외모가 뭐가, 어때서요?”
“이 일을 꾸민 사람은 광산을 가진 데르송 후작 한 사람이 아니야. 이 일에는 시드레 백작이 엮여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만약, 빈민가에 살지 않는 네가 갑자기 어슬렁거리게 되면 너의 인상착의가 시드레의 귀에 들어갈 확률도 높지. 그러면 그녀가 널 가만히 둘까? 절대로 허락 못 해. 이 일에 나서지 마.”
아체리아는 뭐라 항변을 하려다 말고 몸을 팩 돌려 방을 나가 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에 픽 웃었던 클라우스는 주변이 조용해지자마자 표정을 바꾸었다.
“호즈만, 밖에 있나?”
그러자 곧 문이 열리고 호즈만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사람을 좀 구해야겠군. 빠르고 힘이 세며 조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네댓 명 필요해.”
“어떤 일로 그러시는지요?”
호즈만은 클라우스의 굳어진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햇빛이 내리쬐는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말했다.
“덤터기를 쓰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 전에 선수를 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