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살벌한 농담은 이쯤 하고.”
“게다가 재미도 없지. 그만둔다니 잘 생각했네.”
에른스트는 미간을 찡그리며 클라우스를 보았다.
“자네,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있는 거야?”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지 않겠나?”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한번 말해 봐. 이 일을 처음 시작한 건 누구일까?”
다시 자리에 앉은 클라우스의 표정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침착하게 변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누가 이 일을 꾸몄을까?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내 생각에는 시드레 백작인 것 같은데.”
클라우스의 말에 에른스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네. 단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야. 보수파가 폐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 때문에 자네를 우선 공격한다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집요하지 않으냐, 이 말이야.”
“원인은 폐하가 아닐 거야.”
단정적이다시피 한 클라우스의 말에 에른스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가 아니라고? 그럼 시드레 백작이 자네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가졌다는 말인가?”
“그러고도 남지. 지난번 아체리아가 납치되었을 때, 거기에 시드레 백작이 연루되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알지, 물론. 그런데 그 일이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에른스트는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듯이 물었다.
당사자인 아체리아나 클라우스가 시드레 쪽에 원한을 가지면 모를까,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고발을 당해 잡혀간 것은 결국 락케 패거리뿐이지 않았던가? 시드레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하여 결국 아무 일도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단지 그렇게 끝나 버린 일에 이쪽이 더 분할 지경인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악의에 가득 찬 일을 벌였단 말인가?
“내가 시드레 백작을 찾아갔었지. 그리고 두 번 다시 아체리아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었어.”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나? 시드레 백작은 내 경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세. 자신이 쥐려다 놓쳐 버린 나를 파멸시키고 싶은 거겠지.”
“시드레 백작이 자네를 마음에 두기라도 했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에른스트, 자네와 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거겠지. 마치 자네에게 하듯 날 찾아온 적 있었거든. ……그러다 무슨 이유에선지 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내가 먼저 차 버린 거고. 그 드높은 자존심에 조금의 흠집이라도 나는 걸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지?”
에른스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무슨 정신으로 클라우스의 말을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혼란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그게 아니라면 시드레 백작이 내게 이를 갈 일 자체가 없으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그동안 보수파와 진보파의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네. 이게 단순한 정치 싸움이라면 내가 공격받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결국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면 클라우스는 영영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폭풍처럼 움직이는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이상에는.
그리고 시드레 백작은 개인적인 원한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게 얼마나 작은 원한이든지 간에.
“정리를 좀 해 보지.”
혼란한 머릿속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에른스트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걸세. 첫 번째, 누군가에 의해 아이들이 실종되고 있다. 두 번째, 사라지는 아이들은 모두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다.”
“세 번째로는 보수파 쪽에서 이걸 나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소문을 냈다, 가 되겠군.”
그들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문제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에른스트는 두 손을 감싸 쥔 채 도사리듯 어깨를 움츠렸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문제는…… 아이들을 납치한 것도 시드레 백작 쪽에서 벌인 일일까, 하는 것이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이들을 데려가서 무엇을, 어쩐단 말인가? 하인으로 쓸 거라면 그보다 나은 후보들이 줄을 잇고 있을 텐데. 날 음해하려는 목적만으로 납치까지 하기엔 뒷감당이 너무 번거로울 것 같지 않나?”
“그럼 클라우스, 자네는 두 사건이 별개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지만 논리적인 판단을 내려 보자면 그런 결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드레 백작 쪽에서는 적절한 시기를 잡았을 뿐일 것이다. 클라우스에게 납치 혐의를 씌우고자 진짜로 아이들을 잡아다 가둬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자, 그러면 아이들을 잡아갈 만한 동기가 누구에게 있는지 판단하는 게 우선이겠지. 누가 아이들을 필요로 할까? 숲속에 숨은 마녀?”
클라우스가 검지를 흔들며 말하자 에른스트가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 그만하게. 그런 농담이 아니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라 했지. 그런 아이들은 아직 힘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나이야. 생각해 보게. 누군가 일꾼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도, 굳이 어린아이들을 데려가 먹이고 가르치며 일을 배우게 시키겠나? 그럴 거라면 납치라는 방법을 택할 필요도 없지. 가난한 부모들에게 돈을 쥐여 주면 그만일 테니까.”
“그런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글쎄, 굴뚝 청소 정도일까. 하지만 굴뚝 청소를 시키기 위해서 아이들을 납치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
“납치범들은 아이들만 데려갔을 뿐, 누구도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어. 애초에 돈을 요구할 것이었다면 가난한 집의 아이들을 데려가지도 않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이상하네.”
납치범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벽이었다. 노동력으로 쓰지도, 그렇다고 돈을 요구할 수도 없는 처지의 어린아이들. 정말로 마녀가 잡아갔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는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에른스트는 결국 포기하겠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기 앉아서 뾰족한 수가 떠오르길 바라는 건 무리야. 폐하께서 사람을 풀어 조사 중이시네. 해답이 너무 늦게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야. 수도의 분위기가 정말로 흉흉하네, 클라우스. 자네도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저택의 경비를 강화하게. 낯선 사람이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아. 그렇게 해야 해.”
* * *
빵 배달을 하는 소년이 알려 준 곳은 향기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빈민가 골목이었다.
반듯하게 구획이 나누어져 있는 상점가와는 달리, 이곳의 골목은 여러 방향으로 어지럽게 뻗어 있었다. 시들어 가는 나무와 다 떨어진 울타리들, 울타리조차 갖지 못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바깥에 널린 너저분한 빨래 같은 것들이 아체리아의 길을 끊임없이 가로막았다.
이 골목이 맞나 싶어 들어가 보면 설명과는 전혀 다른 위치가 나타나 한참이나 길을 헤맸다. 대낮에 나왔건만 해는 벌써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었다.
아체리아는 네 번째로 잘못된 집의 문을 두드렸다가 돌아 나왔다. 돌아선 그녀의 눈에 다 해진 빨간색 깃발이 꽂힌 집이 보였다.
담벼락이 서로 붙어 있다시피 해 좁은 길을 빠져나가 깃발이 있는 집 앞에 선 아체리아는 잠시 바깥을 서성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거의 다 쓰러져 가는 집은 조용했고 인기척이 없었다. 작은 마당에는 밑이 다 썩은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망설이던 아체리아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문이 열렸다.
“누구신가요?”
“……아, 저기…….”
아체리아는 문을 열고 나온 여자의 모습을 마주하고 순간 당황했다. 몇 살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여자였다. 자신과 또래인 것 같기도 하고 마흔을 훌쩍 넘은 것 같기도 했다. 풍파에 찌든 얼굴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늙었으되, 병색이 완연한 눈가에는 세월이 좀먹은 주름의 수가 적었다.
“저, 셀론 씨 빵집의 종업원이에요. 좀 들어가도 될까요? 여쭤볼 게 있어요.”
여자의 지친 얼굴에는 미심쩍은 빛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아체리아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집 안도 바깥처럼 살풍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색 벽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고, 천장은 너무 낮아서 밑으로 푹 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 방 안에 아이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젖먹이였다. 아이들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굶주린 표정들이었다.
아체리아는 팔에 끼고 있던 바구니를 여자에게 먼저 내밀었다.
“저기, 이거.”
“이게 뭔가요?”
“빵이에요. 저기, 음…… 셀론 씨가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시장 골목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셀론은 구두쇠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별 의심 없이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사실, 의심을 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고 해야 옳았다.
셀론 씨가 아니라 다른 누가 준 거라고 해도 받아 들었을 것이다. 아체리아가 지나가던 행인에게서 강도처럼 빼앗아 왔다고 해도 두말 않고 받을 판이었다.
“고맙습니다.”
여자는 바구니 안에서 빵을 꺼내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오랫동안 밥을 먹지 못했는지, 이제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들은 앞다투어 빵에 달려들었다. 아체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이 싸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저…… 요제프의 어머니시지요?”
빵 귀퉁이를 떼어 입에 넣던 여자가 아체리아를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그 아이의 엄마예요.”
“……저기, 요제프가…… 요제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빵 배달을…… 아니, 그러니까, 셀론 씨의 가게에서 그 아이가 빵 배달을 했는데…….”
순간, 여자는 빵을 씹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어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말라서 퀭해진 눈이 번쩍, 빛나는 것 같아서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우리 요제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시는 건가요?”
“정확하게는…….”
여자의 눈에 갑작스레 눈물이 맺혔다. 아이들은 엄마가 울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바구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빵 하나를 더 꺼내 갔다.
“그 아이는…… 우리 요제프는, 사라졌어요.”
“……사라졌다는 말씀은…….”
“말 그대로예요. 없어진 거죠. 며칠 전, 그 아이는 산에서 복숭아를 따 오겠다면서 바구니를 가지고 나갔어요. 저게 바로 그 바구니죠.”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이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니, 한쪽 어깨끈이 찢어진 낡은 버드나무 바구니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