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07)화 (107/144)

107화

“페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 내가 혼담을 거절한 이유는…….”

“구속당하는 게 싫어서잖아.”

릴리엇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페터가 말을 이었다.

“얌전한 아가씨인 척 수를 놓고 있지만, 넌 사실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잖아. 차라리 네 아버지처럼 앞에 나서서 귀족들을 진두지휘하길 원하지. 아니라고는 말하지 마. 나만큼 널 오랫동안 봐 온 사람도 드물 테니까.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도 너에 대해 나처럼 많이 알지 못해.”

“그건 왜?”

도전적이다 못해 따지는 어조였지만 페터는 굴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밤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페터가 말했다.

“왜냐면 그 둘은 나보다 틀에 박혀 사는 인간들이니까. 요즘 클라우스가 의외의 행보를 보여 주고는 있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명함도 내밀지 못하지. 릴리엇, 넌 얌전한 아가씨에 별로 어울리지 않아. 너의 그 성격을 보란 듯이 휘두르고 사는 게 오히려 어울리지.”

“나에게 뭐가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페터 네가 할 일이 아니야.”

“알아. 하지만 나라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줄 수 있어. 너도 알겠지만, 드라인 남작가는 란츠호프 후작가에 꽉 쥐여 사는 상황이잖아.”

냉소적인 농담에 릴리엇은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사실이기에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페터의 집안인 드라인 남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란츠호프 후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곳이었다. 애초에 드라인 남작가의 가주가 귀족 대열에 끼게 된 것이 란츠호프 후작 덕분이었다던가? 까마득히 먼 선대들의 이야기였지만, 어쨌거나 남작가가 란츠호프 후작가에 어떤 방향으로든 신세를 졌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러다 보니 페터의 아버지는 릴리엇의 아버지에게 매우 충실했다. 자신의 생각보다도 란츠호프 후작의 생각을 더 우선시할 만큼.

“귀족들의 결혼이란 어차피 정치적인 거잖아, 안 그래? 네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난 그런 건 몰라. 하지만 네가 누구를 마음에 두었건 나만큼 널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릴리엇은 자신만만하게도 느껴지는 페터의 말에 화를 내지 않고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정략결혼을 제안하는 거야, 페터?”

“그편이 더 마음에 든다면 그렇게 말해도 좋아.”

“정말 웃긴다. 설마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얼굴도 모르는 놈팡이와 정략결혼을 하느니 얼굴이라도 아는 놈팡이와 정략결혼을 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싶어서.”

릴리엇은 작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페터의 말이 아주 황당무계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는 게 가장 당황스러운 점이었다. 그의 말대로, 릴리엇은 자신을 구속하지 않을 남편을 원했다. 누구누구의 부인이 아닌, 란츠호프 후작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남편이라면 더욱 좋았다.

그 때문에 줄을 잇는 혼담을 물리치며 후보를 꼼꼼히 물색해 왔다. 누구일까? 누구를 골라야 자신이 집 안에 들어앉아 수나 놓는 형편을 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페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페터, 오늘 네가 한 말은…… 고려는 해 보겠어.”

릴리엇이 한숨을 쉬듯 말하자 페터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일이 있을 때 으레 보이곤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날 선택하면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릴리엇.”

“함부로 장담하지 마.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사람일 테니까. 얌전 빼며 웃는 게 특기인 아가씨는 조심해야지. 속에 뭘 품고 있는지 모르는 법이거든.”

* * *

식사를 준비하는 아체리아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요리사들은 대체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수군거렸다.

아체리아가 그렇듯, 공작저의 요리사들도 수도에 퍼진 소문을 그리 잘 알지 못했다. 다른 귀족가의 고용인들과 자주 마주칠 일이 없는 그들이었으니 소식에는 발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요리장님, 괜찮으세요?”

조심스럽게 다가온 요아킴이 물었지만 아체리아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해 줄 정신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진짜 납치범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자를 잡을 수 있을까?

“요리장님!”

“앗!”

요아킴이 소리친 것과 아체리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온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끓는 솥에 닿은 손등은 금세 벌겋게 달아올라 수포가 잡혔다.

정신을 팔고 있다가 데이다니, 초보나 저지를 법한 실수다. 당황한 아체리아가 멍하니 서서 상처를 바라보고 있자 부주방장인 프레드가 수건을 적셔 뛰어왔다.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빨리 식히지 않고!”

“……아, 네. 그래야죠. 미안해요.”

“요리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프레드가 나무라듯 말했다. 부주방장이지만, 그는 아체리아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당연히 경력도 길었다. 아체리아는 차가운 수건으로 손을 싸맨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프레드, 주방 부탁해요.”

“몸이 안 좋으신 거면 치료사를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요.”

아체리아는 걱정스레 바라보는 요리사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는 주방을 나갔다. 뒤뜰로 통하는 문을 지나자 바람이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손은 여전히 화끈거렸지만 아체리아는 그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리고 사람들은 그 범인이 클라우스이리라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걸 떠올리면 침착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식재료가 터무니없이 적게 버려지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고 난 다음엔 더욱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최대한 낭비를 줄이려고 한 것뿐인데! 그게 어떻게 아이들을 잡아먹어서 그렇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거냐고!

뒤뜰 벤치에 앉은 아체리아가 얄미울 정도로 평화로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수레 끄는 소리가 났다. 빵 배달이 올 시간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렴.”

아체리아는 빵 수레를 끌고 오는 아이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 살은 되었을까? 뺨에 밀가루며 검댕 따위를 잔뜩 묻힌 아이는 낡은 모자를 들어 보이며 아체리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 앞을 지나쳐 가는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아체리아의 얼굴에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잠깐만, 얘.”

“네?”

돌아보는 얼굴은 확실히 낯설었다. 아체리아는 그제야 소년의 키가 너무 크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공작저에 빵 배달을 오던 아이는 소년보다 훨씬 어렸다. 당연히 수레를 끌고 오지도 않았다. 늘 바구니에 한 번 배달할 만큼의 빵만 들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요제프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저기, 너 셀론 빵집에서 온 아이 맞니?”

소년은 왜 그런 걸 묻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맞아요. 셀론 씨 빵집에서 이 댁에 빵을 배달하라 하시던데요.”

“셀론 씨 빵집에서 배달하는 아이는 너보다 어리지 않니? 요제프였던가…… 이름이 그랬던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런데 요제프는 그만두었어요.”

그만두었다고? 그 아이는 빵 배달을 해서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는 아이였다. 그만두다니, 왜?

“왜 그만뒀어? 다른 일을 찾았니?”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만뒀다기보다는,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안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 구역까지 배달을 하게 된 거예요. 전 원래 이쪽 구역으로는 배달을 하지 않았거든요.”

“갑자기 안 나와? 어디 아프기라도 하니?”

소년은 입술을 실룩이며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요. 그 애 집에 가 보지 그러세요?”

아체리아는 불길한 서늘함이 가슴속을 싸하게 훑고 지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요제프도 그렇고 이 소년도 그렇고, 보통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그만둘 수 있을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없어지고 마니까.

요제프는 그 어린 나이에도 착실했다. 빵 배달 시간에 늦는 법도 없었고, 이따금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 남은 것을 쥐여 주면 기뻐하던 아이였다. 이렇게 갑자기 일을 팽개칠 리 없었다.

생각을 거듭하던 아체리아는 빵 배달꾼 소년의 어깨를 덥석 붙잡고 말했다.

“요제프란 아이의 집이 어디니? 좀 알려 줘.”

* * *

에른스트는 아침 식사를 다 마쳐 갈 때쯤 클라우스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의 손에 이상한 것이 들려 있었다.

“그게 뭔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클라우스가 물었다. 에른스트는 눈으로 직접 보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그것은 깨진 달걀 껍질이었다.

“그건 왜 들고 다니나? 어디서 빵이라도 만들고 왔나?”

“속 편한 소리 하는군. 내가 이걸 어디서 구했을 거 같나?”

에른스트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즈만에게 달걀 껍질을 넘겨주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손끝을 닦았다.

“달걀 껍질을 구할 만한 데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닭장?”

“자네 집 담벼락이네.”

클라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우리 집 담벼락에 왜 그게 붙어 있던 거지? 닭들이 알 낳을 장소를 착각하기라도 한 건가?”

“농담 그만하게, 클라우스. 누군가 집어 던진 것이겠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공작저의 담벼락에 달걀을 집어 던지는 간 큰 인간이 있다고?”

“자네 집은 하인들의 경비도 허술하잖아.”

에른스트가 클라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문이 심상찮게 번지고 있어. 왕성에서 경비를 강화했지만 또 아이가 사라졌네. 이번에는 산에 갔다가 실종됐다고 하더군.”

“산이라고?”

“그래. 빈민가의 어린아이인데, 먹을 것을 구하러 산에 들어갔던 모양이야.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지. 그 아이가 메고 있었던 바구니만 발견됐네.”

“내가 산에서 아이를 잡아 올 정도의 체력이 있었으면 굳이 애들을 잡아먹을 필요도 없을 텐데.”

“사람들이야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지. 하인을 시켜서 잡아 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군.”

클라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짜증스럽다는 듯이 책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에른스트의 옆으로 다가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이러다 네가 화형당하는 것도 먼일은 아니겠어, 클라우스.”

물을 삼키던 클라우스의 입술 사이로 숨소리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화형보다는 교수형이 더 보기 좋겠지. 일단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흉악범의 경우에는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곡마단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자가 사형당하는 걸 구경하는 것 역시 사람들에게는 유희 거리로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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