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체리아가 테이블을 쾅, 내리치자 테두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컵이 와장창 쏟아졌다.
얀 헨릭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이 벽에 걸려 있던 타월을 내려 테이블 위에 쏟아진 것을 닦았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한 번 더 쾅, 내리쳤고 나뭇결 사이에 고여 있던 물들이 이리저리 튀었다.
“공작님이 애들을 납치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들을 납치해다 뭐 하려고!”
“소문에는 잡아먹는다고들 하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나. 아체리아가 헛웃음을 치자 얀 헨릭도 그 기분에 동감이라는 듯이 커다란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 있는데 전 어떻게 몰랐죠?”
“공작저의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잖아. 당연히 모를 법도 하지.”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체리아는 이윽고 머리를 싸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소문이란 어쨌든 퍼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귀에 들어오기도 하는 법이다. 비스몽트 공작저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 소문이 저 혼자서 벽을 뚫고 오지는 않으니, 그들은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얀 헨릭은 아체리아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염려하지는 말아라.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을 설마 잡아가기야 하려고.”
“그거야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요!”
실제로 아이들을 잡아가는 사람이 누군지, 그 단서가 없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클라우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상황인지라 무슨 말을 해도 클라우스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체리아는 이마를 싸쥔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것.
하지만 어떻게?
“아이들이 실종되는 것에 대해서 뭐 또 다른 단서는 없어요, 얀?”
“글쎄다. 내가 아는 것이나 사람들이 아는 것이나 비슷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아는 것’이 뭔데요?”
얀 헨릭은 주스가 든 커다란 컵을 손끝으로 슬슬 만졌다.
“주로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 밖에 나갔던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것. 가난한 집에서는 그 시간에 아이를 내보내는 게 흔한 일이잖느냐. 일을 해야 하니까. 상점에서 일하는 녀석들, 푸줏간에서 일하는 녀석들…… 수도 없이 많지. 그리고 지금껏 사라진 건 다 꼬마들뿐이야. 여섯 살, 일곱 살. 그 정도지.”
“그렇게 어린아이들을 대체 왜 데리고 가는 걸까요?”
“그게 영문 모를 일이라는 거지. 귀족들이 하인이 필요해서 그런 애들을 데리고 갔을까? 그럴 거라면 뭐 하러 납치하듯 데리고 가겠느냐? 그것도 아니라면 팔아넘겼을까? 하지만 어디로?”
베르데사는 물론 인근 왕국 어디에도 노예 제도는 없다. 아주 먼 옛날, 노예가 존재했을 시절에는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팔아넘기는 이들도 많이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일 뿐이다.
“결국 결론은, 아이들을 하나씩 잡아가서 할 만한 일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 우리 공작님께 화살이 돌아간 거겠지. 너도 알다시피 워낙 비밀이 많아 보이는 분이니까.”
“공작님의 건강이 좋아진 건 식사를 제대로 했기 때문이라니까요!”
“나야 그걸 알지만 사람들은 모르잖느냐. 그렇다고 방방곡곡에 그 사실을 써 붙이기라도 할 거냐?”
얀 헨릭이 핀잔을 주었다. 아체리아는 머릿속으로 아이들을 데려갈 만한 이유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느라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누가 아이들을 잡아가는지, 아직 목격자조차 나오지 않았으니 그게 문제인 거다. 법관들이 공작저를 뒤집어엎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더 커지겠지.”
“……공작님이 아이들을 데려간 게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믿기 시작할 테니까요.”
얀 헨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신뢰를 잃은 공작가는 더 이상 존경을 받을 수 없을 거다. 모두들 우리 공작님을 광장에 매달지 못해 안달을 할 테고.”
아체리아가 정치에 좀 더 밝았다면 클라우스를 매달아 버리고 싶은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귀족들 사이의 정치 싸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를 교수대의 까마귀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아체리아는 사람의 악의가 얼마나 진득하고 집요한지 몰랐다. 클라우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클라우스를 시궁창에 팽개쳐 서서히 죽어 가도록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할 거예요.”
아체리아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 * *
한낮의 열기 띤 공기가 초록색 정원을 눅눅하게 달구었다.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창가에 앉은 릴리엇은 자수를 놓고 있었다. 열어 둔 창문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지만,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동그란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장차 후작가를 이어받을 아가씨지만 여성적인 취미를 가져야 하는 것은 다른 부인네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마다 릴리엇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자수를 잘 놓아서 후작 작위를 이어받으신 게 아니었을 텐데.
팽팽하게 펼쳐진 천 위에는 꽤 그럴듯한 솜씨로 수놓인 디기탈리스가 있었다. 릴리엇은 동글동글한 꽃잎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 보다가 부지런히 바늘을 움직였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는 새 찻물과 함께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가만히 앉아 수를 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릴리엇은 고개를 천천히 젖혀 뻐근한 목을 풀었다.
“손님이라니, 누군데?”
“드라인 남작가의 페터 드라인 경이요.”
“페터라고?”
릴리엇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에는 페터 혼자만이 와 있었다.
“어쩐 일이야?”
“한가하고, 할 일도 없고, 시간도 비고.”
결론은 한가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릴리엇은 예쁘장한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고는 하녀를 시켜 차를 가져오게 했다.
“뭐 하고 있었어?”
“나도 한가하고, 할 일도 없고, 시간도 비어서 자수나 놓고 있었어.”
페터는 따분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후작이 되실 분이신데, 자수까지 잘 놓아야 하는 건 뭐 때문이야?”
“결혼 때문이지, 당연히. 수를 못 놓는 아가씨는 신붓감에서 제외되는 게 사교계 규칙이잖아.”
당연히 그런 규칙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특히 귀족들은 여전히 얌전한 아가씨를 신붓감으로 선호했다. 그리고 그 ‘얌전함’은 피아노나 자수 따위의 뻔한 취미들이 기준이 되었다.
“여행은 재미있었어?”
페터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건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릴리엇과 페터가 단둘이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취미와 관심사가 너무 달라서였다.
“꽤 괜찮았지. 멀리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던데.”
“그렇게 점점 멀리 나가다가 아예 이민을 가 버리는 건 아니고?”
“남작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페터는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고, 릴리엇과 마찬가지로 외동이었다. 형제가 있었다면 그는 결코 남작가를 이어받지 않았을 것이다.
“작위를 이어받는 게 왜 싫어? 난 이해할 수 없어.”
릴리엇의 말에 페터가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릴리엇 너는 왜 후작이 되고 싶은데?”
“되어서 나쁠 건 없잖아.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속만 시끄러운 정치판에 몸 담그는 게 왜 나쁜 일이 아니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물론 그런 일은 골치 아프지만, 누리고 싶은 게 있으면 책임지는 것도 있어야지.”
하녀가 차를 가지고 왔다. 릴리엇은 찻잔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접시에 놓인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구스베리 잼이 든 쿠키는 달콤하고 맛이 좋았다.
“이런 것들도 책임을 지는 게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페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 무슨 일로 온 거야? 갑자기 와서 놀랐잖아.”
“말했잖아. 한가해서 왔다니까.”
“페터, 넌 한가하다는 이유만으로 날 찾아오고 그러지 않잖아. 솔직하게 말해.”
릴리엇의 목소리가 약간 차분해졌다. 페터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뒷머리를 헤집듯이 매만졌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정말로 한가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진짜 심심하고 할 일이 없었다면 차라리 더 재미있는 뭔가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래, 맞아. 할 말 있어서 왔어.”
“뭔데? 빨리 얘기해.”
여태까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쏟아 내던 것에 비하면 페터는 이상할 정도로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다. 늘 냉소적이고 사람 놀리기를 좋아하는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라, 릴리엇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릴리엇.”
“그래, 말해.”
“나와 결혼해 줘.”
예상치 못한 말에 릴리엇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
빨리 이야기하라고 재촉한 건 자신이었지만 막상 본론을 들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릴리엇은 벌게진 페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난 진심이야.”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옛날에, 우리 둘 다 어릴 때였지. 내가 널 좋아한다고 했을 때 넌 나와 친구로 남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네가 왜 여태까지 혼담을 진행시키지 않았는지, 나보다 그 이유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릴리엇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후작의 외동딸이자 장차 란츠호프 후작이 될 아가씨, 그런 릴리엇 앞으로 들어오는 혼담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철이 들기 전부터, 열 살이 되기도 전부터 약혼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나이를 핑계로 혼담을 물리쳤다. 그러나 릴리엇이 열일곱 살을 넘기자 부모들도 슬슬 초조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또래의 아가씨들은 모두 약혼자가 있었지만 릴리엇은 아니었다. 구애를 하는 남자들을 그녀가 전부 차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