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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05)화 (105/144)

105화

에른스트의 재촉에 떠밀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클라우스는 숨 한 번 돌릴 사이도 없이 왕궁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뭔가 반갑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마차에서 내린 직후부터였다.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던 귀부인들은 클라우스를 보며 귀엣말을 소곤거렸고, 착검한 채 열을 맞춰 지나가던 경비병들도 이쪽을 흘끔거리지 못해 안달이 난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왕궁의 분위기도 평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클라우스는 급하게 갈아입은 재킷의 앞섶을 살짝 당기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에른스트,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다들 날 죽음의 신이라도 보듯 쳐다보는데.”

에른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왕의 집전실을 향해 빠르게 걷기만 했다. 그가 대답해 주지 않으니 클라우스도 말없이 걷는 수밖에 없었다.

집전실의 문이 열리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필리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누가 들어왔는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집전실 안의 분위기도 평소와 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통 집전실 내부에는 시중을 드는 시녀나 궁인이 있을 뿐, 경비병들은 입구 근처에서 문을 지키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러나 지금은 필리파의 뒤에, 양옆에, 무장한 군사들이 그녀를 지키고 서 있었다.

“레이넌의 대공과 비스몽트 공작의 알현입니다.”

한쪽에 서 있던 타티아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리파는 그제야 숙였던 머리를 들고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앉게.”

둘은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적어도 한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비스몽트 공작, 휴가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을 텐데 이렇게 급히 불러들여 미안하게 되었네.”

딱히 휴가랍시고 떠났던 것은 아니지만,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의 부름을 받자와 왔습니다. 저를 어찌 찾으셨는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로군. 긴말은 하지 않겠네. 그럴 여유도 없거니와.”

클라우스는 필리파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궁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필리파가 말했다.

“공작은 최근 공작을 둘러싼 괴소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가?”

“괴소문이라니요?”

클라우스는 대답을 바라는 눈빛으로 에른스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사교계는 물론이거니와, 수도의 시민들 사이에서도 퍼진 소문이네. 전혀 모르는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폐하.”

클라우스와 필리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필리파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최근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동 실종 사건에 공작이 관여되어 있다는 소문이네만.”

클라우스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필리파의 뒤에 서 있던 군사들이 위협하듯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클라우스가 당황하자, 필리파는 손을 들어 그들의 움직임을 막고는 이어 말했다.

“모두, 내가 불러들일 때까지는 나가 있도록 해라.”

명령을 받은 군사들은 곧 그대로 움직였다. 번쩍이는 투구 아래의 험악한 시선을 마주한 클라우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군사들이 모두 나가고 나자, 필리파는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타티아나가 그녀의 찻잔을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필리파가 말했다.

“왕궁에는 숨어서 지켜보는 시선이 많지. 그 시선들을 만족시켜 주는 게 첫 번째라 위협적인 광경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네.”

군사들을 배치한 것이 자신의 본의는 아니었다는 필리파의 설명이었다. 클라우스는 금방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 중요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저에 대한 소문이라는 게 대관절 무엇입니까?”

“답답하긴. 어찌 이렇게 새하얗게 모를 수가 있는가. 대공, 오는 길에 설명을 해 주지 않았습니까?”

에른스트는 클라우스를 힐끔 바라본 뒤 말했다.

“그가 직접 듣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필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는 클라우스는 답답한 표정이었다. 필리파는 타티아나가 새로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클라우스, 최근 수도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소?”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의 범인이 바로 그대라고 믿고 있소. 뿐만 아니라 더 해괴한 소문도 있지.”

“더 해괴한 소문이라니요?”

“공작, 그대가 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오.”

클라우스의 눈에 한순간 핏발이 섰다. 갑작스런 말에 당혹해 팔걸이를 쥔 손끝마저 떨리고 있었다. 필리파는 그의 모습 하나하나,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모조리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절대로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그런 소문이 나게 된 것인지 저로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라는 대답은 충분하지 않소, 공작.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으니까. 게다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니오.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대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리라 믿고 있지.”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그렇게 믿고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클라우스는 마치 항변하듯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필리파는 그런 클라우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손끝으로 제 이마를 슬슬 쓸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수도의 빈민들 사이에서 먼저 이러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더군. ‘새벽걷이’에 대해 알고 있소?”

“……알지 못합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귀족들 중 ‘새벽걷이’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필리파조차도 그 일을 조사했던 군사의 보고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수도 빈민들이 한밤중이나 깊은 새벽에 귀족의 저택 근처를 돌아다니며 버려진 식재료들을 주워 가는 것을 ‘새벽걷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왕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나, 나도 이번 사건으로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소.”

“대관절 그 일이 이번 소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새벽걷이를 하는 빈민들은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버려지는 식재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더군. 그 점이 이번 실종 사건과 맞물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소문이 된 거요.”

“그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긴 하지. 하지만 사람들은 흥미롭기만 하면 사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으니까.”

필리파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공작,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그대의 저택에서 버려지는 식재료가 극히 적은 이유가 뭐요?”

버려지는 식재료가 적은지 많은지, 그런 것은 클라우스의 관심 분야가 아니었다. 사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식재료가 덜 나온다는 것도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 아체리아 덕분일 겁니다.”

필리파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필리파가 테이블 한쪽에 쌓인 종이 뭉치를 구겨 버리며 말했다.

“공작에게 혐의가 없다는 건 잘 알았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 않는가. 그러나 클라우스는 입술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이번 일은 모든 요소들이 기묘할 정도로 시의적절하게 맞물려 벌어진 거요.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과 더불어 공작의 건강이 갑자기 좋아진 일, 아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 그리고 누군가가 불어넣었을 공포심.”

“제 건강이 좋아지게 된 건…….”

“아체리아 덕분이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요리사 한 명이 해낸 일이라고 공표하는 건 어렵지 않겠는가? 아체리아를 사람들 앞에 세워 놓고, ‘공작의 건강이 좋아진 건 사실 이 아이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소?”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일로 소문이 잦아들 것 같지도 않거니와 이 일에 아체리아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시선을 굴리고 있던 클라우스가 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공작이 할 일은 일단 보란 듯이 공작저에 머무는 것뿐이오. 소문의 출처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은밀히 침투시킨 사람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단서를 잡지 못했소. 누가,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납치하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지만 이 일에 공작이 나서서는 안 되지. 공연히 사람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까.”

“그냥 소문이 잦아들 때까지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러기엔 일이 너무 커졌다고 말하지 않았소? 공작을 고발하는 문서들이 나뿐만 아니라 법관들 앞으로도 전달이 되었소.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들의 손에 의해 잡혀 들어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란 말이오.”

클라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필리파의 앞에 불려 와 심문을 당하는 것과, 법관들에게 구속되는 것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법관들 앞에 불려 가게 되면 필리파도 클라우스를 도울 수 없게 된다. 혐의에 불과할 뿐이니 고문은 당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클라우스를 언제 풀어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심문을 위해 사람을 가둬 두고 보내 주지 않는다. 그 기간이 한 달이 될지,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설령 무혐의로 풀려 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10년이나 그 안에 갇혀 있는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고발이라면…….”

“겁을 주기 위해 한 말은 아니오.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특별히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필리파가 굳이 그 이야기를 해 준 이유도 분명했다.

클라우스의 표정이 굳어 있자, 필리파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감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공작이 지금 처한 상황이 그렇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작이 왕궁에 오는 걸 막지 않는 정도랄까.”

필리파가 농담을 했지만 클라우스는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사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클라우스가 왕궁을 나왔을 때, 정오를 지난 햇살이 너른 정원에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군사들이 줄을 맞추어 지나가는 것을 본 클라우스가 물었다.

“군사들의 수가 좀 늘어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폐하를 노리는 자들이 많아진 것을 제외하고 말인가? 별일 없지.”

“폐하를 노리는 자들이라고?”

“시드레 백작이나 다른 보수파 쪽의 움직임이 있어. 아직은 정황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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