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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04)화 (104/144)

104화

연이어 내리는 비가 그친 후의 별장 풍경은 매우 아름답게 변모했다. 거무죽죽하고 어두워 보이기만 하던 석조 저택에 아침 햇볕이 들자, 간밤까지 내린 빗물을 촉촉하게 머금은 식물들이 요정의 옷자락처럼 싱그럽게 빛났다.

아체리아는 해가 머리 위로 다 떠오르기도 전에 정원의 차가운 물기를 밟으며 느긋한 산책을 했다.

동그랗게 모양을 다듬어 놓은 나무딸기 덤불 옆으로 작은 연못이 보였다. 물고기는 없었지만, 빗물에 한 번 넘쳤던 것인지 고여 있는 물은 투명하고 깨끗해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리 깊지 않은 물속에 손끝을 담근 채 휘적거리고 장난을 치던 아체리아의 뒤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클라우스였다.

“혼자 여기서 뭐 해?”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체리아는 이것 좀 보라는 듯이 연못 속에서 건져 낸 작은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굉장히 예쁘죠?”

돌은 아체리아의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금 더 컸고, 모서리가 매끌매끌하게 닳아 있었다. 마른 장미 꽃잎처럼 탁한 분홍빛에, 하얀색의 조그만 점무늬가 흐트러지듯 찍혀 있었다.

“마음에 들면 가지고 가.”

“친구들하고 있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한 아체리아는 다시 연못 속으로 돌을 던져 넣고는 치맛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가까이 다가선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클라우스는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고개를 살짝 숙여 아체리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체리아도 아무렇지 않게 그의 키스를 받아 주었다.

“좀 더 오래 잘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깼군.”

“제 얘기인가요? 아니면 공작님 이야기인가요?”

“둘 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잠에서 깨어 집안을 돌아보고 있던 달스턴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아주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다른 곳으로 후다닥 자리를 옮겼다.

아체리아는 약간 쑥스러운 듯이 킥, 하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클라우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쿠르비르를 만들 거예요.”

“아침부터?”

“레시피를 보니 아침 식사로 먹기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목숨을 걸고(?) 구해 온 쿠르비르 레시피는 비에 흠뻑 젖고 조난을 당하는 와중에도 다행히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군데군데 빗물이 번지긴 했지만 그 정도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주방까지 아체리아를 따라왔다. 페이스트리 반죽을 만드는 동안, 그는 조리대 한쪽에 서서 아체리아가 시킨 대로 양배추를 썰고 있었다.

“양배추 냄새가 이상해.”

“신선한 거예요.”

“비린내가 난다니까.”

“비린내가 아니라 싱싱한 냄새라니까요.”

전혀 방향성이 다른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일을 하는 동안, 주방에는 점차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멜이었다. 그녀는 나무집게로 코를 집은 채 양배추를 써는 데에 몰두하고 있는 클라우스를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달스턴을 데리고 왔다. 달스턴도 멜과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정원사를 데리고 왔다.

그런 식으로 별장의 몇 안 되는 하인들이 모두 양배추 써는 클라우스를 구경하고 가는 동안, 아체리아는 반죽을 마치고 속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근과 양파, 다진 쇠고기, 클라우스가 썰어 놓은 양배추와 바삭바삭한 식감을 더해 줄 튀긴 빵 조각.

썰어서 한데 모은 재료에 달걀을 깨 넣고 진득진득하게 만든 아체리아는 페이스트리 반죽 안에 소를 조금씩 떼어 넣은 다음 둥글게 빚었다. 클라우스도 몇 개 만들어 보려 노력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곧 그만두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는데?”

순식간에 동그란 주머니 수십 개가 만들어진 것 같은 쿠르비르를 보며 클라우스가 물었다.

“달걀물을 발라서 오븐에 구울 거예요.”

아체리아는 솔을 이용해 쿠르비르 위에 달걀물을 꼼꼼히 바른 다음 널찍한 오븐 팬에 넣었다. 쿠르비르가 구워지는 동안에는 닭 육수를 이용해 간단한 수프를 끓였다.

주방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차기 시작하자 배가 고파 왔다. 이윽고 아체리아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오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처음 만드는 음식이다 보니 잘 되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나 드셔 보실래요?”

“내가 먼저 먹어 보는 건가?”

“공작님 입맛에 맞으면 맛있게 완성된 게 틀림없으니까요.”

클라우스는 애매한 표정으로 쿠르비르 한 개가 든 접시를 받아 들었다. 포크로 겉껍질을 찌르니 파삭, 하는 소리가 났다. 일단 페이스트리는 완벽하게 구워졌다. 그럼 맛은 어떨까?

갈라진 쿠르비르 안에서는 허연 증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가두어져 있던 육즙이 주르르 흘러내려 접시에 고이는 것이 보였다. 클라우스는 반쪽을 집어 살짝 식혔다가 입 안에 넣었다.

“어떠세요?”

한동안 페이스트리를 씹는 가벼운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입 안에 든 것을 삼킨 클라우스는 나머지 반쪽도 금방 집어 먹고는 말했다.

“아주 맛있어. 어렸을 때 먹어 봤던 맛과 똑같아.”

“정말이세요? 만세!”

아체리아는 진심으로 환호했다. 이제는 다 같이 쿠르비르를 먹을 차례였다. 고용인들의 몫과 클라우스의 몫, 그리고 자신의 몫을 따로따로 접시에 담은 아체리아는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한 채 식당으로 걸어갔다.

고기도 들었고, 또 구운 것이라 무겁고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아체리아가 말한 대로 아침 식사로도 제격인 음식이었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작고 양이 적다 보니 더욱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쿠르비르를 갈라 열심히 먹고 있던 아체리아가 말했다.

“언젠가 엄청 커다란 쿠르비르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작게 만들어 먹는 게 먹기도 편하고 좋은데 굳이 왜?”

“맛있는 건 큼직할수록 좋잖아요!”

대체 어떤 사고방식이어야 그런 결론이 나오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클라우스는 고개만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식사를 하고 있던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는 동시에 놀란 얼굴을 들어 달스턴을 바라보았다.

손님이라니? 여기 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클라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아체리아는 그가 닐스가 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았다. 클라우스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아체리아가 달스턴에게 물었다.

“어떤 분이신데요? 혹시…… 그, 공작님의 외숙부님이신가요?”

“예? 닐스 님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여기 오실 리가요.”

“그럼 대체 누가 오신 거죠?”

“나야.”

손님은 어지간히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달스턴이 고해바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식당으로 불쑥 들어왔다.

“에른스트!”

“대공 전하!”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놀라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달스턴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에른스트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 준 뒤 식당을 나갔다. 그리고 물과 차를 차례로 가져다주었다.

에른스트는 물만 마셨을 뿐 차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먹고 있는 것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나도 줘. 새벽부터 말을 달려왔더니 배고파 죽겠군.”

아체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접시를 에른스트에게 밀어 주었다. 포크도 아닌 손으로 쿠르비르를 하나 집어 먹은 에른스트가 말했다.

“아주 맛있는데. 근데 이게 뭐야?”

“쿠르비르라는 이 지방 음식이에요, 전하.”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에른스트도 어렸을 때 클라우스와 함께 이곳에 몇 번 온 일이 있으므로 찾아오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 그가 여기까지 들이닥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클라우스, 자네 지금 당장 수도로 돌아가야 하네.”

클라우스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지금 당장?”

“그래, 지금 당장. 아체리아 너도 돌아가야지.”

“대공 전하, 잠깐…… 이해가 안 되어서요. 왜…… 돌아가야 하나요? 그것도 당장이라뇨? 공작저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비스듬하게 턱을 괴고 있던 에른스트는 한숨을 쉬며 쿠르비르 하나를 더 집어 먹고 말했다.

“그래. 일이 생겼어. 그것도 아주 심각한 일이야. 그러니까 남은 음식일랑 빨리들 먹고 짐부터 챙기도록 해.”

* * *

한 아이가 숲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아이는 자기 몸뚱이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바구니를 짊어지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피곤하고 굶주려 보이는 표정. 숲으로 식량을 구하러 나온 빈민가의 아이가 틀림없었다.

닳아 빠진 가죽신은 걸을 때마다 타달타달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꽤 험한 산길을 능숙하게 기어올라 비스듬히 자란 개복숭아 나무로 기어 올라갔다. 아직 다른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는지, 나뭇가지에 꽤 실한 과실이 몇 개 매달려 있었다.

“횡재했다.”

아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나뭇가지를 흔들어 개복숭아 몇 개를 떨어트렸다. 후두둑, 후두둑 소리를 내며 흩날리는 잎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도로 나무를 타고 내려가 떨어진 과일을 주워 들었다.

주먹보다 좀 더 크게 자란 개복숭아는 시고 떫어서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소중한 양식이 된다. 운이 좋아서 엄마가 설탕을 조금만 구해 온다면, 이 떫은 것을 절여 어떻게든 먹을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아이는 침이 괸 입술을 팔뚝으로 문질러 닦으면서 바닥에 떨어진 복숭아를 주워 바구니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좀 더 돌아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풀뿌리라도 캐어 볼 작정이었다.

그때, 오솔길을 따라 앙감질로 걷던 아이의 시야에 누군가가 비쳤다. 그는 남자였다. 키가 크고, 검은 얼룩이 묻은 갈색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멀찌감치 서서 아이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바구니에 달린 끈을 꽉 쥐고는 다시 앙감질로 걷기 시작했다.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오히려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아서였다.

아이가 남자의 옆을 지나가려는 순간, 그때까지도 정물처럼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아이의 가느다란 팔목을 휙 잡았다. 등에 매달려 있던 바구니가 기울어지며 개복숭아가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적당히 말랐군.”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고 낮았다. 아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뭔가가 아이의 코와 입을 덮치듯이 막았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는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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