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필리파의 하루는 일로 시작해 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제 막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쳤을 뿐이건만 그녀의 책상 위에는 오늘 안에 검토해야 하는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각각의 영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문에서부터 다종다양한 읍소, 고발문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중 필리파는 빨간색 실이 감긴 종이들부터 차례대로 펼쳐 살펴보았다. 베르데사에서 빨간색은 많은 것을 상징했다. 다른 나라에서 으레 그렇듯 정열이나 사랑 같은 고리타분한 것에서부터 피, 전쟁, 혹은 정의와 징벌.
종이 가득 빼곡하게 적힌 글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은 필리파는 매끄러운 관자놀이 위를 손끝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타티아나.”
왕녀의 시녀에서 이제는 왕을 모시는 시종장이 된 타티아나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대공은 왕궁에 머물고 있나?”
“네.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걸로 압니다.”
“불러오렴.”
타티아나는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나갔다. 필리파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텅 빈 벽을 응시했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하얀 먼지들이 반짝거리며 부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데 모여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군중 같았다. 방금 그녀가 읽은 고발문의 말들이 이제는 소리가 되어서 귓속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머잖아 다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필리파와 마찬가지로 에른스트의 몸단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일찍부터 오라 가라 해 미안하군요.”
필리파는 오로지 대공 에른스트에게만 왕녀 시절처럼 경어를 썼다.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신하를 찾으실 때 시간은 관계가 없지요.”
“그렇게 말해 주니 다행이에요, 사촌. 앉아요.”
에른스트는 시종이 가져다준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초조한 듯, 발끝을 자꾸만 까딱거렸고 손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내가 왜 불렀는지 벌써 알고 있군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필리파가 물었다. 에른스트는 입매가 일자가 되도록 당겼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폐하를 찾아왔던 이유와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며칠 전, 에른스트는 약속도 잡지 않고 다짜고짜 필리파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클라우스에 대한 괴소문을 털어놓으며 진위를 조사해 달라 호소했다.
수도 전역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아동 납치 사건은 최근 필리파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안건 중 하나였다. 경비와 순찰을 강화하고 빈민가 주변을 꼼꼼히 돌아보도록 했지만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병사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후로도 몇 차례나 아이들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사태가 이쯤 되니 왕궁에서는 더 강력한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범인의 윤곽조차 알지 못하고, 사라진 아이들의 머리털 끄트머리도 찾지 못했대서야 말이 안 된다. 수도 경비대의 체면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필리파는 괴소문을 들었다. 아이들을 납치해 가는 사람이 다름 아닌 비스몽트 공작이라는 것이었다. 레이넌의 대공 에른스트와 함께 왕의 오른팔로 급부상한, 요 몇 달 사이 기이할 정도로 건강이 좋아진 그가.
“그래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필리파는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발문들을 봐요.”
필리파는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종이 뭉치를 테이블 앞으로 밀었다. 에른스트는 그 내용까지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종이를 감쌌던 빨간색 실들은 정확히 알아보았다.
그것은 법관과 왕만이 받아 볼 수 있는 표식이었다. ‘정의에 따라 심판해 주십시오’, 그런 의미로 감는 실이었다.
“모두 비스몽트 공작의 신병을 구속하여 납치 사건에 대해 심문할 것을 촉구하는 고발문입니다.”
“폐하,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렇지요. 하지만 클라우스가 구속된 후, 빈 공작저에서 누가, 무슨 공작을 꾸밀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게 고발문이 왔으니, 법관들도 오늘 아침 이 고발문들을 받았겠죠. 그들이 클라우스를 심문하고자 결정 내린다면 나의 힘으로도 막기는 어렵습니다.”
베르데사의 왕은 기본적으로 법관들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법관들이 보다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최초의 그 뜻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접어 두어야 하는 문제지만.
에른스트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왕도 어쩌지 못하는 법관들이다. 대공인 자신이 나서 봐야 어차피 안 될 일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오히려 클라우스를 억지로 두둔하려다 그에게 엉뚱한 혐의만 더 씌우게 될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래요. 사촌의 말대로 이것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그 말씀은…….”
“법관들은 앞뒤가 꽉 막혀 있는 만큼 엉덩이도 무거운 자들이죠. 아무런 근거도, 증거도 없는 소문만 가지고 함부로 공작가를 건드릴 만큼 대담한 인물들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러니 이 소문이 아직 ‘근거 없는’ 말일 때까지 비스몽트 공작은 무사할 겁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이 고발문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나타난다면…….”
“……클라우스는 꼼짝없이 덫에 걸리겠군요.”
필리파는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것이 누가 친 덫인지는 굳이 캐 보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죠.”
“……그렇습니다, 폐하. 아마도 시드레 백작과 그녀를 위시한 보수파에서 꾸민 짓이겠지요.”
“그래요. 때문에 이것은 비스몽트 공작의 일이기도 하면서 또한 나의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사촌을 부른 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에요.”
“폐하의……?”
“내가 선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음을 증명하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태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나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클라우스가 만약 이 끔찍한 혐의를 벗지 못하면 필리파의 입지도 덩달아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범죄자를 오른팔로 둔 잔악한 왕, 혹은 그의 추악한 진면목도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은 왕. 클라우스를 지켜 내지 못했을 때, 필리파를 기다리는 것은 그런 오명뿐이었다.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절대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죠. 물론, 여기 구구절절 써 있는 것처럼 비스몽트 공작이 정말로 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적혀 있습니까?”
에른스트가 미간을 찡그리며 되묻자 필리파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적혀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로군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요. 이 소문은 오히려 귀족들보다도 시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공작가를 향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큰 사태예요. 물론, 소문을 퍼뜨린 저들이 바라는 것도 그것이겠죠. 만약 시민들이 공작을 끌어내어 죽이라고 폭동을 일으킨다면 나는 왕국군을 보내어 그를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왕성이 국민들을 등지는 꼴이 되고 말죠.”
그다음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면 그들은 분명 노련한 바람잡이를 사람들 사이에 풀어놓을 것이었다. 왕이 범죄자를 옹호하느라 시민들을 다 죽이려 한다, 왕은 자격이 없다, 새로운 왕을 우리 손으로 옹립하자고…….
“그러니, 우리는 치밀하고 빠르게 반격해야 합니다.”
고개를 약간 숙인 필리파의 눈은 햇빛을 등지고 있었음에도 번쩍번쩍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사냥감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준비를 한 맹수 같았다.
“제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에른스트가 물었다. 필리파는 형형하게 부릅떴던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손을 얹었다.
“일단은 비스몽트 공작을 수도로 데리고 오는 것이 첫 번째겠지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별장에 가 있습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죠.”
“우연의 일치겠지만, 소문이 크게 퍼지기 시작할 무렵 그가 모습을 감추었어요. 그건 절대적으로 불리한 일이죠. 뭔가 켕기는 게 있어 달아났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러니 그를 수도로 불러와야 합니다.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저택에 보란 듯이 머물게 해야 하죠.”
“잘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다음은요?”
“사라진 아이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언제, 어느 시간대에, 어디서 사라졌을지를 추측하여 공통점을 찾아내야죠. 범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대체 어린아이들을 몇이나 데려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팔아넘겼을까? 베르데사에는 노예 제도가 없죠. 그럼?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데려가 죽였을까요? 죽였다면 왜? 시체는 어디에?”
필리파의 말은 점점 빨라져 강렬한 남부 악센트를 띠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녀도 어렸을 때는 남부 방언을 사용했던 것의 영향이었다.
한차례 숨을 몰아쉰 필리파는 조그만 입술을 꾹 다문 채 에른스트를 쏘아보다가 의자 뒤로 등을 기대었다.
“그건 내 쪽에서 사람을 풀어 알아볼 겁니다. 사촌은 대공의 지위를,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 소문이 가짜라는 것을 퍼뜨리세요.”
“맞불을 놓는 거로군요.”
“걸어온 싸움을 되받아치는 거죠. 저쪽에서 소문으로 선공을 시작했다면 이쪽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반격을 하는 거예요. 내가 이 사건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많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어요. 하지만 사촌은 다르죠. 그의 친구니까. 친구를 옹호한다는 인상을 풍기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호소하세요. 란츠호프 후작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릴리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사교계 아가씨들 사이에서 발이 꽤 넓은 편이었다.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리파는 머리가 아픈 듯이 다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차갑게 식은 차를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비스몽트 공작에게 은밀히 감시를 붙이세요.”
“감시라고 하셨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필리파는 단호한 태도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감시를 붙여야 합니다. 그를 살피고 지킬 사람이 필요해요.”
“설마…… 암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저들이 우선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비스몽트 공작과 나, 두 사람입니다. 내게 손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비스몽트 공작이라고 가만히 둘까요?”
그렇게 말하는 필리파의 표정은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