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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02)화 (102/144)

102화

공작가의 별장은 소란했다.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떠들썩한 의미의 소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 이곳의 생활에 비하면 매우 시끄럽고도 분주한 것이었다. 느릿느릿,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할 일만 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한곳에 모여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오솔길 등산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절벽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떨어진 흙더미가 조금 쌓여 있었고, 손이며 팔뚝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몇 시간 내도록 퍼부은 비로 지반이 드러난 곳이 약해져 작은 산사태가 일어났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쓰러진 아체리아였다. 얼마나 거기에 쓰러져 있었는지, 온기를 다 빼앗기다시피 한 몸은 죽은 사람처럼 차가웠다.

정원사가 그녀를 발견하여 별장 저택으로 업고 왔을 때, 밀랍처럼 하얀 얼굴과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 때문에 클라우스는 한순간 그녀가 죽은 줄 알았다.

다행히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치료사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집사의 손에 의해 끌려온 치료사는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아체리아의 머리와 손끝에 길쭉한 침을 놓았다.

“몇 시간 푹 쉬면 깨어날 겁니다.”

그런 말을 남긴 그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뚫고 기어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클라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잠든 아체리아의 옆에 앉아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식사를 할 여력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멜이 몇 번이나 수프와 차를 가지고 왔지만 모두 물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나자 방 안에는 아체리아와 클라우스, 둘만이 남았다.

아무리 손을 꼭 잡아 주어도 아체리아는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치료사가 침을 놓아 준 후로 뺨 위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오르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손끝도 이제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클라우스의 체온이 옮아간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아체리아.”

클라우스가 조그만 소리로 아체리아를 불렀다. 그래도 아체리아는 눈을 감은 채 미약한 숨만 내쉴 뿐 대답이 없었다.

“넌…… 바보야?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지. 이렇게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가 없단 말이야. 그까짓 레시피가 뭐라고 이 비가 오는 데 생전 처음 보는 산을 넘어? 그러다 쓰러지기까지 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데 클라우스는 혼자서 중얼중얼 잘도 말을 했다.

“깨어나기만 해 봐라. 절대로 달래 주지 않을 테니까. 난 절대로…….”

그때였다.

기도라도 하듯 앞으로 숙여져 있던 클라우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와 동시에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던 아체리아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클라우스는 너무 놀라 순간 말도 하지 못했다. 감싸 쥔 손이 작게 꼼지락거리는 것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아체리아?”

“……공작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갈라져 있었지만 다행히 말은 나왔다. 아체리아가 몇 번 기침을 하자, 클라우스는 얼른 머리맡에 있던 물잔을 가져다 그녀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마셔.”

아체리아는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가 입술을 움직여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잔을 대어 주는 클라우스의 손짓은 서툴기 짝이 없어서 물 몇 방울이 아체리아의 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몸은 좀…….”

“……콜록! 콜록…… 괜……찮아요.”

아체리아가 간신히 말했다. 잔을 내려놓은 클라우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어쩌자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해?”

방금 전까지는 평생 들어 본 적 없던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을 해 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체리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클라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난 분명 산에서…….

“……저를 어떻게…… 찾으셨어요?”

“지금 그게 중요해?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 비가 오는데, 멜도 말렸다면서! 그게 뭐라고,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 빗속에 겁도 없이 산을 넘어! 찾아서 망정이지, 못 찾았으면 어떡할 뻔했어! 산사태가…….”

소리치던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일순 흔들렸다. 소리를 치면 치는 대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체리아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둥실 떠올랐다.

“공작님, 지금…….”

우세요? 그러나 그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클라우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고, 공작님.”

“……만약에 산사태가 크게 나서 네가, 거기에 깔리기라도 했으면…… 더 크게 다쳤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사람을 걱정하게 해. 너 때문에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 같다고.”

뭘 그렇게까지나. 그러나 농담으로 받아치기에는 기운이 너무 없었다. 게다가 클라우스가 진짜로 울고 있어서 농담을 하기도 미안한 상황이었다.

결국 아체리아는 고민 끝에 이렇게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한 줄은 알아?”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머리칼을 넘겨 주는 클라우스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아체리아는 자신이 쓰러졌던 장소가 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나무들에 가려서 그랬겠지. 그리고 복도마다 불을 밝혀 놓지 않으니 어둡기도 했을 거고.”

“뒤뜰이라니……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니.”

“가까운 곳이어서 다행이었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으면 아직까지 널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원사가 그러더군.”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이야기다. 바깥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정말로 심각한 조난이라도 당했더라면…….

“저 때문에 다들 고생하셨겠네요.”

“그걸 말이라고 해? 쿠르 뭐인지 뭔지, 네가 만들어도 나 그거 안 먹을 거야.”

“그건 안 돼요! 얼마나 힘들게 구해 온 건데! 전부 다 드셔야 해요.”

그러나 클라우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음식 이야기를 하니 배가 고팠다. 애초에 아체리아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놀라서 정신을 잃은 탓에 기력이 빠졌을 뿐이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드물게도 아체리아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클라우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픽 웃고는 빨개진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배가 고픈 걸 보니 죽진 않겠군.”

“조금 더 굶으면 배고파서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엄살은. 잠깐만 기다려.”

클라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멜이라도 부르러 가는가 싶었는데 그는 뜻밖에도 아예 방을 나가 버렸다. 졸지에 텅 빈 방에 덩그러니 남은 아체리아는 가만히 자리에 누워 천장의 무늬나 헤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뭔가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 생각을 하니 불안정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서, 아체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불규칙한 무늬들을 눈으로 헤아리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뭘 하러 간 건지 한참이나 돌아올 기미가 없던 클라우스가 다시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쟁반 위의 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수프였다. 이렇다 할 재료도 별로 없이 육수에 건더기 몇 개만 있는 단출한 것이었다.

“저녁 식사로 드셨던 거예요?”

아체리아가 묻자 클라우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농담하는 거지? 네가 그렇게 쓰러져 있는데 식사가 입으로 넘어가겠어?”

“저기, 그러면…….”

“내가 끓였어. 그러니 맛은 장담 못 해.”

아체리아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껌뻑거렸다.

“……이걸 공작님이 끓이셨다고요?”

“육수는 멜이 만들어 둔 거지만. 너를 찾느라 지쳐서 잠든 바람에 깨울 수가 없더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멜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말을 듣지 않다가 이런 꼴이 됐으니. 심지어 얼마나 찾아다녔으면 지쳐 뻗어 버렸을까.

“아니, 하지만…… 공작님. 요리해 보신 적도 없으면서…….”

“빵은 하나 만들어 봤잖아.”

그걸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서, 아체리아는 제법 그럴싸한 냄새를 풍기는 수프 그릇을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스푼을 들어 저어 보니 어설프게 썬 감자와 순무 따위가 보였다.

“설마 감자도 직접 깎으셨어요?”

“껍질 벗겨서 물에 넣어 뒀기에 하나 꺼내 썰었는데.”

그건 아마도 내일 아침 식사로 쓰기 위해 멜이 준비해 둔 것일 터였다. 아체리아는 헛웃음을 치면서 수프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어 보았다.

간을 했는지 말았는지 첫 맛은 밍밍했다. 그런데 뱃속에 들어가는 순간 신기하게도 맛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무와 감자는 약간 덜 익어 심지가 아삭아삭 씹혔다. 하지만 아체리아는 불평하지 않고 수프 한 그릇을 전부 먹었다. 그릇을 비우자 클라우스는 왠지 다행이라는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한 것 같기도 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았나?”

“초보치고는 대단히 훌륭하셨어요.”

아체리아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클라우스는 그런 아체리아를 탓하지 않고 빈 그릇을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수프가 들어간 뱃속은 따뜻해서 기운이 좀 났다. 일어나 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체리아는 그렇게 했다. 눈높이가 가까워지자, 촛불이 일렁거리는 클라우스의 회청색 눈동자가 더욱 잘 들여다보였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

아체리아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듯 그렇게 생각했다.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을 갑자기 깨달았을 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또는 외면하고 있던 것을 마침내 마주했을 때처럼 홀가분한 기분도 없었다.

그 감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체리아의 마음속에서 불길처럼 피어 슬그머니 번져 갔다. 종이 위에 물감으로 점을 찍으면 결을 따라 곧 퍼지듯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넣으면 파문이 번져 나가듯이.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낙엽이 지면 겨울이 오듯이, 너무나 당연해서 이상하게 느낄 것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없었다. 그런 이유 같은 건.

사랑은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감출 수도 없는 것이다.

한 번 깨달음의 문을 열어 버린 마음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넘치고 넘쳐서 두 사람의 발치를 부드럽게 적시고 있었다.

“공작님.”

클라우스는 왜 그러냐는 듯이 아체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속을 알 수 없이 깊었다. 마치 아체리아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 공작님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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