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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101)화 (101/144)

101화

아주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클라우스는 굵어진 빗줄기가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낮인지 저녁인지, 미처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하늘이 어두웠다.

몸이 그리 찌뿌둥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한밤중이 되도록 잔 건 아닌 것 같은데, 불을 밝혀야 할 정도로 어두컴컴해져 있어 시간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줄을 당기자 하녀장인 멜이 물 한 잔과 얼굴을 닦을 타월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러지?”

클라우스가 묻자 멜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불안하게 움직였다.

“저…… 공작님.”

클라우스는 일순 이상한 기분이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일까? 초조함일까? 전부 다일까?

“저기, 저…… 클링 양이.”

“아체리아? 아체리아가 왜.”

그때까지만 해도 머릿속 어딘가에 뭉근히 고여 있던 잠이 일시에 달아났다. 클라우스는 물이 반쯤 남은 잔을 꽉 쥔 채 멜의 얼굴을 응시했다.

“멜, 말해. 아체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그게…….”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인내심 있게 멜의 말을 듣고 있던 클라우스의 머리끝이 쭈뼛하게 곤두섰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고요 속에 잠겨 있던 저택을 통째로 뒤흔들 것처럼 컸다. 침대에서 내려와 벌떡 일어선 그가 발을 구르자 협탁 위의 잔이 따그르르, 작은 소리를 내며 떨렸다.

“빠, 빨리 돌아오겠다고…… 꼭 가야 한다고 해서.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빗줄기가 이렇게 거세어질 줄 알았다면 절대로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아체리아가 돌아오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녀가 나간 직후부터 조금씩 굵어지던 빗방울은 이제 아예 폭우가 되어 있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강줄기를 두 배쯤으로 불릴 수도 있을 만한 강수량이었다.

디퍼 씨의 집에 도착해 거기 머물고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멜은 확신할 수 없었다. 산만 곧장 넘으면 이웃 마을이 바로 내려다보이기는 해도, 이렇게 어둑해진 상황에서는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인들을 전부 불러 모아라. 아체리아를 찾아. 그 디퍼인가 하는 자의 집에 있더라도,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갔다. 클라우스는 이미 깜깜한 잿빛이 되어 버린 창밖을 바라보며 제 머리칼을 쥐어뜯을 듯 꽉 붙잡았다.

* * *

산길은 어둡고 미끄러웠다.

마을을 향해 산을 넘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비가 좀 많이 오기 시작한다 싶었지만, 아직까지 멀쩡히 앞을 분간할 수도 있었고 풀이 무성하게 돋은 오솔길도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디퍼 씨의 집에서 나와 산중턱에 다다랐을 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풉! 무슨……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오는 거야, 정말?”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리는 물줄기를 털어 내면서 아체리아가 투덜거렸다. 아직까지는 투덜거릴 힘이나마 남아 있어 다행이었지만 왠지 가도가도 산길이 끝없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별장의 요리장이었다는 디퍼 씨는 여든이 다 된 노인이었다. 거동이 불편해진 뒤로 안락의자에 앉아 하루 온종일을 보낸다고는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고, 아체리아는 그로부터 이 구역의 향토 음식이라는 쿠르비르 레시피를 얻을 수 있었다.

디퍼 씨의 가족들은 곧 비가 많이 오기 시작할 거라며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앞을 분간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실제로 지금 시간은 한밤중도 아니었다. 단지 구름이 너무 많이 낀 탓에 이토록 어두워진 것뿐이다.

아체리아는 빨리 돌아가 레시피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 그들의 걱정 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디퍼 씨의 손자는 산길이 금방 어두워질 거라며 램프 하나를 빌려 주었다. 아체리아는 감사 인사를 하고 그들의 집을 떠나왔다.

백양나무가 빼곡한 숲길로 들어섰을 때, 아체리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산을 넘어올 때는 본 적이 없었던 풍경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익숙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없는 풀숲만이 무성했다.

“맙소사, 길을…… 길을 착각했나?”

아체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램프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 치 앞만 겨우 볼 수 있을 뿐, 그 너머는 모조리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일단은 되돌아가자. 나무들 틈으로 마을의 불빛들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마치 먼 바다에서 환상 속의 등대를 보듯, 아체리아는 그 약한 불빛에 의지해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불빛들은 좀처럼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지?”

설상가상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램프의 불빛도 습기 때문인지 금방 꺼질 것처럼 약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구조를 기다릴 수도 없다. 어쩌면 이곳은 생각보다 깊은 숲속일지도 모른다. 짐승이 나타날지도 몰랐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대로 앉아 비를 맞고 있다가는 틀림없이 다음 날 아침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아체리아는 젖은 나무들을 짚으며 미끄러운 길을 천천히 걸었다. 비를 맞지 않도록 걸친 겉옷은 이제 아무런 소용도 없어서, 푹 젖은 치맛자락이 자꾸만 다리에 휘감겼다. 한 걸음 걷고 옷을 떼어 내고, 또 한 걸음 걷고 옷을 떼어 내느라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여기를 아까 지나왔던가? 아니, 어두워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젠장! 표지라도 있으면 좀 좋아!”

답답한 마음에 표지판을 달아 놓지 않은 빈약한 행정력에까지 욕을 퍼붓게 되는 와중,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이었다. 하늘이 번쩍번쩍 밝아진 순간 완전히 낯선 모습의 숲길이 눈앞에 드러났다가 곧 어둠 속에 파묻혔다.

그제야 아체리아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길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누가 지나갈지, 아닐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산속에서.

앞을 분간할 수 있을 때는, 그러니까 산이 어둠에 파먹히기 전에는 분명 이렇지 않았다. 오솔길을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되었다. 좀 가파르고 높은 언덕 정도였다고 할까?

그렇던 곳이,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다른 장소로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깊은 숲이 있었단 말인가?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하고 물에 빠진 사람은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깊이에서도 익사할 수 있다. 아체리아는 지금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백양나무 숲을 통과해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공작가의 별장 뒤뜰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모르는 사이 자신이 매우 깊숙한 어딘가로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손에 닿는 젖은 나무들을 짚으며 미친 듯이 걷던 아체리아는 별안간 트인 공간을 마주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숲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제는 갈 길이 없었다. 앞은 절벽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젖은 흙더미가 빗물에 쓸려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어떡하면 좋아…….”

강하게 다물려 있던 입에서도 기어이 질린 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램프의 불빛이 까물까물, 위태롭게 흔들렸다.

빗줄기는 여전히 아플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며 아체리아의 얼굴과 온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절벽의 바위와 흙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들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착각이었을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실제였든 환청이든, 아체리아의 귀에는 그 소리가 똑똑히 들렸으니까.

아체리아는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아주 옛날의 일이라, 꿈에서조차 잊고 있었던 소리다.

“안 돼…….”

아체리아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물에 쓸려 쏟아지는 흙더미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볼품없이 드러난 나무뿌리의 윤곽이 더욱 굵어진다.

돌 몇 개가 아체리아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뿌리가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흙덩어리와 돌들이 쏟아져 내리는 순간, 아체리아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 * *

여섯 살의 아체리아는 배가 고파 계속해서 뒤척거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비쩍 마른 빵 한 조각과 약간 상한 듯한 우유 한 잔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어제 식량을 아껴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동생들은 단 한 입에 빵을 다 먹어 치우고 서로의 것을 더 먹겠다며 빼앗으려 아우성을 쳐 댔다.

아체리아의 부모는 아이들이 싸우건 말건, 제 몫의 식사를 다 하고는 퀭한 얼굴로 각자 갈라져 잠을 자러 갔다. 아체리아의 집에는 침대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짚단을 대충 쌓아 그 위에 너저분한 천을 덮은 게 전부였다.

연이은 자연재해로 영지에 든 기근은 끔찍한 것이었다. 굶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주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닷새에서 일주일까지 물만 마시다 보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때도 많았다.

아체리아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짚단 위를 구르다가 발치에 누운 어린 동생의 머리를 실수로 걷어찼다. 놀라서 화들짝 일어났지만 동생은 배고픔에 지친 것인지 싸우다 지친 것인지,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나갔다 오자.’

이웃 마을에는 드넓은 과수원이 있었다. 아직 과일이 다 익을 계절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가릴 처지는 못 되었다.

아체리아는 촛불조차 없이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왔다. 만월이어서 다행히 길은 밝았다. 어린 아체리아의 걸음으로는 오래 걸리겠지만, 부지런히 걸으면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덜 익은 과일 몇 개라도 서리를 해 오면 내일 아침은 먹을 수 있으리라. 울다 잠든 바람에 눈가에 소금기가 허옇게 말라붙은 동생들과 지친 부모. 그 틈바구니에서 아체리아는 나이보다 조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이 무렵 영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어디나 아체리아의 집과 상황이 비슷했다. 영주라고 해서 하루 세 끼 식사를 매일 챙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니 알 만한 일이었다.

수도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식탁 위에 진수성찬을 올리고 산다던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와 다르게 생긴 게 아닐까? 입이 세 개 달렸다든지.

밤길이 주는 무서움을 잊기 위해 아체리아는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새소리처럼 높고 날카로운 음이 휙!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 사이에서 뻗어 나왔다.

그때 발밑이 떨렸다. 넘어졌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을 때, 아체리아가 살던 집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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