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페터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삐딱하고 냉소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는 드라인 남작가를 이어야 하는 후계자임에도 도통 틀 안에 가둬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빈정대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취미는 여행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동행 없이 홀로 훌쩍 떠났다가 훌쩍 돌아오는 것을 즐겼다.
갈 때도 간다는 말이 없고, 올 때도 온다는 소식이 없으니 에른스트나 릴리엇, 그리고 클라우스는 페터가 보이지 않으면 으레 ‘어디로 떠났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어딜 돌아다니다 왔어?”
에른스트가 놀리듯이 묻자 페터는 피곤한 표정으로 다리를 뻗으며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북서부 지역 경계까지.”
“한동안 안 보인다 싶었더니 꽤 멀리 다녀왔군?”
“그렇지. 이건 선물이야.”
페터가 품 안에서 꺼내 놓은 것은 작은 목각 인형이었다. 뿔이 달린 수사슴 모양이었는데, 그리 정교하지는 않지만 친근함이 느껴질 정도로만 서툴렀다.
“독특한 장식이 또 하나 늘었군. 고마워.”
에른스트는 별 볼 일 없는 선물에도 꼬박꼬박 감사를 표했다. 페터는 조롱하듯이 낄낄 웃었지만, 악의가 없다는 건 서로가 다 아는 사실인지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편이었다.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오니 재밌는 소문들이 많던데.”
페터가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자네가 뻥 차였다는 소식도 들었지.”
“대관절 그런 건 언제 주워들은 거야? 귀도 좋군.”
에른스트가 투덜거렸다. 그 반응이야말로 페터가 원하던 것이었기에, 그는 더욱 신이 나서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웃어 댔다.
“아체리아에게 차이다니! 그 빨간 머리 요리사에게!”
“함부로 말하면 나한테 혼날 줄 알게.”
일전에, 페터가 아체리아를 상대로 싸늘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에른스트가 경고하듯 말했다. 페터는 여전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낄낄 웃으면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맹랑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클라우스의 정부라는 소리까지 들리던데, 진짜는 아니겠지?”
“물론 아닐세.”
페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하지만 웃을 거리를 하나 놓쳐 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클라우스와…… 연인 관계인 건 맞네.”
에른스트가 덧붙이자 페터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뭐랬나? 연인?”
“그래. 그리고 아체리아 이야기는 이쯤 해 주겠나? 아직 좀 아프거든.”
앞가슴을 움켜쥐며 익살맞은 제스처를 해 보이는 에른스트를 향해 페터는 작게 혀를 찼다.
“부족한 것도, 모자란 것도 없는 대공 전하 신세가 말이 아니시군.”
“살면서 한두 번쯤 실연도 겪어 보고 그러는 거지. 자네도 여러 번 겪은 일이잖나.”
능글거리는 듯한 에른스트의 말투에 페터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내가 언제! 생사람 잡긴.”
“릴리엇에게 여러 번 차였잖아.”
놀림당하던 대상과 놀리는 대상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페터는 골을 내면서도 아니라고 부득부득 우기지는 못했다. 그가 릴리엇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별로 비밀이랄 것도 못 되었으니까. 릴리엇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페터는 친구일 뿐이라며 늘 선을 그어 왔다.
끊이지 않을 것 같던 페터의 구시렁거림은 대공저의 집사가 술을 가지고 오는 순간 멈추었다. 그는 대낮에도 술을 즐기는 성미였는데, 아무리 마셔도 결코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진정한 주당이라 할 만했다.
“소문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잔 바닥에 깔린 독한 술을 단숨에 마셔 버린 페터가 제법 진지해진 투로 입을 열었다.
“클라우스는 요즘 어떤가?”
“어떻냐니?”
에른스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페터는 잠시 미간을 찡그린 채 아무런 말이 없다가 잔이 반쯤 차도록 술을 부었다.
“수도에 들어와서야 들은 이야기인데…… 좀 심상찮은 소문이었어. 정부니 뭐니 하는, 그렇게 웃어넘길 만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자네는 모르고 있었나? 요즘 수도에서 어린아이들이 자주 사라진다며. 누군가 납치했을 거라고들 하던데.”
그거야 에른스트도 진작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닐곱 살 정도의 아이들이 실종되는 일이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 상황이었으니.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저녁만 되어도 아이들을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거야 알지만, 그 일과 클라우스가 왜 같이 나오나?”
“아, 이 답답한 인간! 대체 내도록 수도에 머물면서 뭘 하나? 대공저의 문을 꽁꽁 닫고 칩거라도 했어? 클라우스가 아이들을 잡아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들리더란 말이야!”
페터가 술잔을 탕,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에른스트는 그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클라우스가…… 아이들을 잡아가? 그게 말이나 돼?”
“말이 안 되는 황당한 소리니까 자네 귀에까진 안 들어온 모양이군. 하긴, 나도 귀족들 입에서 들은 건 아니네.”
“그럼 누구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나?”
“우리 집의 하인들이 떠들고 있더군. 입들을 주먹으로 한 대씩 쥐어박아 줬지.”
비로소 에른스트의 표정도 심각한 빛을 띠었다. 페터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고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졌는데, 클라우스는 공교롭게도 자리를 비웠다지? 그것 때문에 수군거리는 인간들이 더 늘어났어. 하인들 사이에서 말이 돌고 있다는 건, 즉 수도에 있는 인간들 중 절반 이상은 그 소문을 알고 있다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체 그런 헛소문이 왜…….”
“누구에게서 말이 나왔는지 알 길이 없네. 하긴, 이만큼 퍼졌으면 찾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에른스트는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한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생각에 잠겨 서성거리는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고용인을 정부로 두었다는 소문은 단지 추문에 불과하지만 이건 완전히 궤가 다른 일이다. 아동 납치라니, 만약 범인이 붙잡히기만 한다면 아이들을 어찌했든 간에 종신토록 탑에 갇히거나 사형도 당할 수 있는 문제였다.
“폐하께 가 보아야 할 것 같네.”
에른스트가 절박하게 말했다. 페터는 콧방귀를 뀌며 술병의 주둥이를 불만스레 툭 건드렸다.
“폐하께 간들 뾰족한 수가 나오겠나? 내 생각에는,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있으실 것 같네만. 이만큼 퍼졌는데 왕궁엔들 흘러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러니 가 봐야 한다는 거야. 폐하께서 알고 계신다면 뭔가 생각하시는 바가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에른스트는 페터를 대공저에 남겨 둔 채 달음박질을 치듯 뛰쳐나갔다.
이만한 소문이 그냥 물 새듯 어디선가 흘러나왔을 리는 없다. 분명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리라.
에른스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귀족들 중에서 클라우스를 공격할 만한 사람, 그것도 이처럼 참담한 소문까지 퍼트려 가며 그를 무너뜨리고 싶어 할 만한 사람…….
“있지, 그런 사람이.”
에른스트가 어금니를 꽉 다물며 중얼거렸다.
* * *
“방금 뭐라고 했소?”
감람색 등받이가 달린 의자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남자는 닐스 엥글턴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시드레 백작이 인형처럼 고상한 자세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제 의사는 후작님께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내 손으로 조카를 죽이라, 이거요?”
시드레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짤막하게 웃었다. 후후, 하고 웃는 소리가 너무도 가벼워서, 닐스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와서 조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외숙부가 되셨단 말씀은 아니겠죠, 설마?”
“이보시오, 백작. 내가 백작과 한배를 타기로 한 건 클라우스 녀석을 공작의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함이었지, 목숨까지 빼앗고자 한 건 아니었소.”
“왜요? 못 그러실 건 뭔가요. 어차피 공작의 자리를 내놓고 나면 그자는 살아도 산 게 아닐 텐데요.”
이제 시드레는 닐스 앞에서 ‘공작’이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았다. 마치 낯모르는 불한당을 까 내리듯 ‘그자’라고 부를 뿐이었다.
닐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벌린 채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다.
“백작이 클라우스에 대해 수많은 소문을 퍼뜨린 건 알고 있소. 나도 그런 방법은 찬성이지. 하지만 직접 그 녀석을 죽이는 건 얘기가 완전히 달라!”
“굳이 후작님께서 손쓰실 필요가 뭐가 있나요? 돈만 주면 자청할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는 시드레의 표정은 한가롭기까지 해서, 닐스는 더욱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애초부터 잡아서는 안 되는 손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살인자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혈육을 죽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클라우스가 죽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죽어 가길 바란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비열한 욕망인지 닐스는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시드레도 닐스의 그런 점을 알았고, 경멸했다. 파멸을 원한다면 당연히 손을 더럽힐 각오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닐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도에 요즘 떠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소. 클라우스가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소문도 백작이 퍼뜨린 것이겠지. 대체 근거가 있는 거요? 근거도 없이 그런 소문을 퍼뜨려 봐야 무슨 소용이 있소?”
“글쎄요, 근거라는 건 만들기 나름이지요.”
닐스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지나갔다. 이 여자가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아무튼 내 손으로 클라우스를 죽일 수는 없소. 내가 그놈을 죽도록 미워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수는 없단 말이오.”
“아무래도 후작님은 공작이라는 자리가 절실하시지 않은 것 같네요.”
소파의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권태롭게 중얼대는 시드레의 얼굴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백작,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이까짓 일에 그토록 몸을 사리실 필요가 있을까요? 안타까워요. 후작님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이 일에 뛰어드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을 마친 시드레는 닐스에게는 더 이상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휙 일어섰다. 그녀는 비 내리는 창밖의 한 점을 물끄러미 쏘아보고 있었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비스몽트 공작저의 지붕 끝이었다.
“끝까지 못하시겠다면 이만 후작령으로 돌아가시는 게 더 낫겠어요.”
“이봐, 시드레 백작!”
“안심하세요. 클라우스 비스몽트는 틀림없이 죽게 될 테니까요. 후작님께서 못 하시겠다니 어쩌겠나요? 돌아가셔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곧 그의 뼈를 물려 드리지요. 애도의 눈물 한 방울만 준비하시면 모든 게 끝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