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별장의 하루는 매우 빠르게도, 또 느리게도 지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럴 계절이기는 했지만, 이틀 내내 공기가 축축하니 그렇지 않아도 습기를 잘 머금는 석조 저택에는 더욱더 묵직한 분위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흐릿한 수채화처럼 보였다. 색깔을 전혀 쓰지 않은, 무채색만이 잔뜩 번져 있는 수채화.
아체리아는 창가에 흔들의자를 두고 앉은 채 회색으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참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의 침대에서는 낮잠을 자고 있는 클라우스의 평온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몸이 좋지 않던 옛날에는 자주 낮잠을 자곤 했지만, 아체리아가 식사를 꼬박꼬박 챙긴 뒤로는 좀처럼 없던 일이다.
‘평화롭네.’
유리창을 타고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의 수나 헤아리고 있으려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인들도 몇 없는 별장은 고요했다. 어딜 가나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던 수도의 저택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클라우스가 뭘 하건 늘상 그림자처럼 옆에서 맴도는 호즈만도 없으니, 마치 이곳에 클라우스와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던 아체리아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잠든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뒤척이느라 하반신만 겨우 덮은 이불을 끌어올려 새로 덮어 주자, 눈가를 움찔거리면서도 어린애처럼 몸을 웅크리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미쳤나 봐, 이 사람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다니.’
아체리아는 자신의 감정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얼마간 잠든 클라우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아체리아는 아예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평온하게 내리감긴 눈매를 따라 길게 뻗은 속눈썹을 바라보고, 그 아래로 드리운 우묵한 그늘도 보았다. 이마 위로 드리운 머리카락을 만지자 클라우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아체리아는 손끝으로 날렵한 코끝을 건드렸다가, 클라우스가 입술을 움츠리자 숨죽인 채 웃으며 얼른 손을 거두었다.
예민해 보이는 턱선과 혈색이 돌아 붉은 입술, 미끈한 목덜미와 셔츠 아래로 엿보이는 어깻죽지…….
이 얼굴이 잘생겨 보이기 시작한 건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뒤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전부터였을까. 깨닫지도 못한 사이,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에게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이렇게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잠든 이마에, 코끝에,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지면 그때는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그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친 것 같은 지금 이 마음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사랑하는 마음이란 뭘까요, 공작님?”
잠든 사람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지역이라더니, 비가 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피부에 닿는 공기가 정말로 차가웠다. 수도는 지금쯤이면 슬슬 더워질 시기인데…….
이 돌벽 때문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 손끝을 가져다 대었던 아체리아는 깜짝 놀랄 정도로 서늘한 감촉에 얼른 어깨를 움츠렸다.
복도를 따라가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던 아체리아는 이내 구석진 곳에 있는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방 안에 있는 것들은 모든 것이 작았다. 서랍장도, 옷장도, 선반도.
어린아이가 쓰던 방이구나. 아체리아는 금방 그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님께서 어릴 때 쓰시던 방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기겁을 한 아체리아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개만 홱 돌렸다. 언제 나타난 건지, 별장의 집사 달스턴이 곁에 와 있었다.
호즈만보다는 조금 나이가 적을까? 그러나 결코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다. 그는 멜과 마찬가지로 아체리아가 요리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클라우스가 그녀를 매우 아끼고 가까이한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공작님의 방이었어요? 여기가?”
“그렇습니다. 들어가서 구경해 보시지요.”
아체리아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도 쌀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기자기한 장식이며 다른 곳보다 밝은 벽지 색깔 덕분인지 그리 스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공작님께서 이 방을 사용하지 않게 되신 후로도, 별장의 하인들은 주기적으로 방을 관리하고 그대로 유지했지요. 언젠가 공작님께서 자식을 낳으시면 또 필요한 방이 될 테니까요.”
자식이라. 아체리아는 허리까지도 오지 않는 낮은 책장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멍하니 생각했다.
클라우스의 아이. 만약 자신이 클라우스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아체리아 자신의 아이도 될 것이다.
내가 아이를?
“……그렇네요. 공작님의 아이…….”
“분명 공작님을 닮아 총명한 도련님이겠지요. 아가씨일 수도 있고요.”
달스턴의 말에서는 마치 자신의 손자를 자랑하는 것처럼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체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어렸을 때의 공작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그거야 물론, 총기 있고 예민한 분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잘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도 들으시고, 다소 까다롭긴 하지만 심성이 착하셨지요.”
아체리아가 만났던 어린 클라우스는 별로 ‘심성이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꼬박꼬박 얄미운 소리만 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녀는 늘상 쀼루퉁한 표정만 짓고 있던 소년 시절의 클라우스를 생각하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저도 어린 시절에 공작님을 만났지요. 음…… 맞아요. 예민한 분이시죠.”
“몸이 허약하고 입이 짧으셔서 고용인들까지도 무척 걱정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공작님께서 며칠 전 이곳에 도착하셨을 때는 놀랐지요. 순간적으로 다른 분이라 착각했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뭐든 잘 잡수세요.”
“클링 양 덕분이겠지요?”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붉어진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왠지 말을 하다 보니 자기 자랑이 된 것 같았다.
“제 덕분이라기에는…… 공작님께서 그럴 마음을 먹어 주신 게 감사한 일이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던 분이, 클링 양에게는 무척 다정하셔서 놀랐습니다. 철없을 시절에도 고용인들에게 함부로 하지는 않던 분이셨지요.”
사실 그 다정한 도련님에 의해 한 번 쫓겨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순간, 아체리아의 머릿속에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공작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어릴 때 아주 좋아하셨던 음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게 뭔지 아시나요? 공작님께서도 이름이 기억 안 난다 하셔서, 여태까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만약 아신다면 제가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데.”
아체리아의 말을 들은 달스턴은 잠시 고민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긴 침묵이었다.
역시 이 사람도 모르는 건가. 아체리아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실제로 먹어 본 음식이 아닌지도 모른다. 꿈에서 맛본 것이었을 수도…….
“아, 생각이 났습니다!”
달스턴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쿠르비르’라는 이 지방 음식을 아주 좋아하셨지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수도에서 이렇게 가까운 지역인데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에 아체리아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게 어떤 음식인데요?”
“그러니까…… 대충 설명을 하자면…… 페이스트리 안에 고기와 채소 같은 것들을 다져 넣고 오븐에 구운 겁니다. 한 입 베어 물면 바삭바삭하면서도, 안에서 따뜻한 육즙이 흘러나와 아주 맛이 좋지요.”
“그 쿠르비르라는 것, 만드는 방법 아세요?”
“글쎄요, 저는 요리를 하지 않아서…… 어쩌면 멜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체리아는 달스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멜을 찾아 주방으로 달려갔다.
멜은 주방에 있지 않았다. 홀에 놓인 화병에 꽃을 꽂아 두고 있던 그녀는 요란하게 뛰어오는 아체리아의 발소리를 듣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내내 조용하던 곳이다 보니,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낯선 소음이 들리면 깜짝 놀라곤 했다.
“멜, 여쭤볼 게 있어요!”
“네, 클링 양. 뭔가요?”
“방금 달스턴 집사님께 듣고 오는 길인데, 혹시 ‘쿠르비르’라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아세요?”
“아, 쿠르비르요. 먹어 본 적은 있지만…… 저도 만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아마 이곳에 계셨던 예전 요리장님이라면 레시피를 자세히 아실 텐데…….”
잔뜩 기대하며 달려온 것치고는 허탈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맛있게 먹었던 거라면 그게 뭐든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 요리장으로 계셨던 분은 지금 이 근처에 안 사시나요?”
“은퇴하신 후로는 이웃 마을에서 자녀들과 함께 사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댁이 어딘가요? 가르쳐 주세요! 저, 쿠르비르 레시피를 꼭 알아야 해요.”
“공작님께 만들어 주시게요?”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멜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요리장이 산다는 곳을 설명해 주었다.
“별장의 뒷산을 넘어가면 작은 마을이 나와요. 그 마을 어귀에서 아마 동쪽으로 다섯 번째 집이에요. ‘공작저의 디퍼 씨’를 찾으면 금방 집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멜 씨! 그럼 저 금방 다녀올게요.”
“네? 지금 가신다고요? 안 돼요!”
당장이라도 밖으로 달려 나갈 태세를 취하고 있던 아체리아는 멜의 만류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비가 오잖아요. 뒷산이 야트막한 곳이라지만, 이렇게 흐린 날에는 산을 오르다 미끄러져 다치기 십상이에요. 날이 개거든 가세요.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고.”
“하지만…….”
클라우스는 습한 날이 되면 컨디션이 나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어젯밤에도 비가 와서 머리가 아프다며 식사를 잘 못 하지 않았던가.
그럴 때 입맛을 돋울 맛있는 음식이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이다. 아체리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빨리 다녀올 수 있어요. 저, 산도 잘 타거든요.”
“아니, 그래도…… 잠깐만요. 굳이 가야 하겠다면 이건 꼭 명심하세요. 만약 너무 어두워지면 차라리 디퍼 씨 댁에서 하룻밤 자고 오세요. 저녁에 산을 넘다가는 위험하니까요.”
아체리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