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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8)화 (98/144)

98화

시드레 백작은 이따금 릴리엇 쪽을 힐끔거리기는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제 무리들과 어울려 한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차피 서툰 아가씨가 주최한 티 파티, 이런 곳에서는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신경을 곤두세워 봐야 불필요한 힘만 빼는 것이다.

아가씨들이 모인 자리인지라 대화의 주된 내용은 자연스레 사교계에 유행하는 것들로 흘러가게 되었다. 예컨대 드레스나 구두, 보석 같은 것들…… 어떤 귀부인이 이번에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나왔는데 자수가 아주 훌륭하다더라, 혹은 촌스럽더라, 그런 내용들이었다.

평소였더라면 릴리엇도 화기애애하게 대화에 끼었을 테지만, 보란 듯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시드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데르송 후작님의 탄광에서 난다는 그 사파이어 말이에요. 얼마 전에 르쉴 백작 부인께서 처음으로 그걸 구입하셨다는데, 광채가 아주 독특하대요.”

“아…… 저도 들었어요. 목걸이를 만드셨다죠? 햇빛에 비추면 색이 오히려 진해지면서 반짝인대요.”

“앞으로 그 사파이어로 만든 것들이 유행할 거라고 저희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시던걸요.”

이야기는 어느새 곁길로 흘러나가 데르송 후작의 새로운 탄광에 대한 것이 화두로 떠올라 있었다. 릴리엇은 창밖을 쳐다보는 척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살아남은 보수파 중 한 명인 데르송 후작의 영지에서 귀한 사파이어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란츠호프 후작가를 비롯해 진보파인 귀족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필리파가 보수파를 대거 몰아내긴 했지만, 그들은 동부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몇백 년에 걸친 역사를 가진 가문들이었다. 고작 수도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맥없이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석은 돈이 된다. 귀족 사회에서는 그것이 곧 권력이었다. 아무리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어도 으리으리한 성채가 없으면, 호사스러운 보물 창고와 산더미 같은 금괴가 없으면 초라할 뿐이다.

보수파의 귀족들 중에는 오랜 세월 동안 부를 축적해 온 가문이 많았다. 숙청에 망설임이 없는 필리파였지만, 그들의 재력을 전부 다 국고로 끌어오지는 못했다.

손에 쥔 것이 많은 자들은 권력을 욕심내기 마련이다. 즉, 데르송 후작의 그 사파이어 광산도 언제든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릴리엇이 화기애애하게 대화에 끼어들 수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데르송 후작께서 다음번에 채굴되는 사파이어로 제게 티아라를 선물해 주시겠다 말씀하시더군요. 어떤 것일지 저도 무척 기대가 된답니다.”

시드레 백작이 거들먹거리며 말하자 또래의 소녀들은 탄성을 쏟아 냈다. 이 자리에 모인 아가씨들 중 시드레 백작을 제외하고서는 작위를 물려받은 사람이 없었다. 혹은 아예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위치, 즉 차녀나 막내 정도 되는 아가씨들도 많았다.

“시드레 백작님께서는 화려한 액세서리가 잘 어울리시는 분이니, 티아라도 틀림없이 아름다울 거예요.”

“맞아요. 아마 백작님께서 티아라를 쓰고 나오시면, 다음번 사교계 유행이 되지 않을까요?”

소녀들은 철없이, 혹은 시드레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를 담아 제각기 맞장구를 쳐 댔다.

가만히 앉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릴리엇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웃음소리가 문득 끊겼다. 릴리엇은 상관하지 않고 그 방을 벗어났다.

자리를 비운 사람은 언제나 뒷담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시드레를 왕녀라도 되는 양 떠받들며 아첨하기를 잘하는 아가씨가 속닥거리며 말했다.

“란츠호프 아가씨께서 오늘 기분이 참 별로이신 것 같네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하실 수 있담? 파티를 베풀어 준 백작 영애께 실례인데 말이에요.”

몇 명의 아가씨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몇 명은 애매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시드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릴리엇과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라 쉽사리 험담에 끼기는 힘든 인물들이었다.

시드레는 콧방귀를 뀌며 릴리엇이 나간 자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가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면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란츠호프 영애의 친구인 비스몽트 공작님에 대한 소문을 여러분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소문요? 아, 요리사를 정부로 두었다는 그 소문 말씀이시지요?”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아가씨가 끼어들며 나서자, 시드레는 고개를 저으며 깔깔 웃었다.

“그건 너무 오래된 소문이고요.”

“무슨 소문이 또 있나요? 저희는 모르는 이야기인데.”

“비스몽트 공작님이 워낙 베일에 싸인 분이니.”

“대체 무슨 이야기인데요? 말해 주세요, 시드레 백작.”

아가씨들은 제각기 지저귀는 새들처럼 한마디씩 떠들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 얼굴에 비스듬히 그늘이 진 시드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처럼 앞쪽으로 몸을 약간 굽혔다.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

듣고 있던 아가씨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지레 귀를 막는 시늉을 하는 호들갑스러운 아가씨도 있었다.

“요즘 수도에서 아이들이 자주 사라진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시드레가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가씨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았지요. 요즘 그것 때문에 골목의 경비들을 강화했다고들 하잖아요.”

“아주 어린 아이들이 자꾸 사라진다면서요?”

“무서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는지.”

튀어나오는 말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드레는 한쪽 손가락을 세워 입술 앞에 가져다 대었다.

“옛날이야기 중에 그런 게 있죠. 어느 나라에 아주 잔혹한 것을 좋아하는 남작이 살고 있었는데, 그 남작은 어렸을 때부터 남들에게 결코 말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해요. 가만히 두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병이었는데, 남작은 자신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게 되리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죠…….”

시드레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깔렸다. 아가씨들 중에는 성질 급하게도 고개를 숙인 채 귀를 막아 버린 사람도 있었다.

“좋다는 약은 다 찾아서 써 보았지만 남작의 병은 결코 낫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 남작은 찾아냈어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줄 단 하나의 약을.”

“그…… 그 약이 대체 뭐였는데요?”

“어린아이의 심장이에요.”

시드레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백작 영애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다른 영애들까지도 덩달아 놀라서 짧게 비명을 올렸다.

“시…… 시드레 백작님, 그 이야기 정말인가요? 정말 그런 끔찍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글쎄요, 옛날이야기이니 알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남작의 상황을요. 몸속에 깊고 깊게 자리 잡은 병, 무슨 수를 써도 낫지 않던 그 병이…… 어린애들의 심장을 먹고 낫게 된 거예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몇몇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시드레가 꺼낸 이야기의 진위를 눈치 빠르게 먼저 파악한 사람들이었다.

“설마…… 비스몽트 공작님에 대한 소문이라는 게……?”

“우연치고 참 이상한 우연이지 않나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비스몽트 공작께서는 아주 오랫동안 바깥출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셨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실종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음악극도 보러 오시고, 전시회도 다니시고…….”

“연회에도 자주 참석하시잖아요. 먼발치에서 뵀을 뿐이지만, 전혀 아픈 분 같지 않았어요.”

시드레가 혼자 키득거리고 웃었다. 다들 겁에 질려 있는데 혼자 웃어 대는 모습이 무척이나 괴이쩍어서, 아가씨들은 더욱더 혼비백산한 표정이 되었다.

시드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그럴 분은 아니신 것 같았는데…….”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시드레 백작님의 말씀이, 어쩌면…… 어쩌면 맞을지도…….”

“꺄악! 그런 건 싫어요!”

우당탕거리며 의자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 아가씨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벌써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릴리엇이 돌아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들어오자마자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릴리엇은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더 당황한 것은 시드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가씨들이었다.

시드레는 릴리엇을 보고 시치미를 떼며 생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누구 하나 시드레가 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모두들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차 마시는 시늉을 하기에만 바빴다.

“제가 없던 사이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했던 건가요?”

담담한 말투였다. 꾸며 낸 것이었지만, 입을 다물고 있던 아가씨들은 마치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시드레의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교활한 웃음이 지나갔다.

“무서운 이야기를 좀 했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였기에 이런 대낮에 이렇게들 겁을 먹었어요? 저도 궁금하네요.”

릴리엇이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며 말했지만 시드레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가면 같은 미소를 띠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무서운 이야기는 한 번만 해야 하는 거라고들 하죠. 여러 번 반복하면, 자기 이야기를 하나 싶어 궁금해하는 유령들이 주변에 몰려든다고 말이에요.”

“…….”

“그건 그렇고, 란츠호프 아가씨께서는 알고 계신 무서운 이야기 같은 거 없나요? 저희 모두 궁금한데. 그렇죠, 여러분?”

아가씨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은 표정을 하고서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어.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한 거지?’

릴리엇이 생각했다. 어디로 보나 수상한 분위기였지만, 증거도 없는데 사람을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듣는 것만 좋아하지, 아는 이야기가 별로 없군요.”

“그래요. 그럼 아쉽지만, 오늘의 무서운 이야기는 저로 끝나야 하겠네요. 그렇죠, 다들?”

시드레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자 릴리엇을 제외한 모든 아가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으로 끝나야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가 둔한 편인 아가씨들도 그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했던 말을 입 밖에 내지 마라’라는 뜻이라는 걸.

릴리엇은 찜찜한 기분으로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마시며 시드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신통한 일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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