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7)화 (97/144)

97화

고민하던 아체리아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아리송하게 말했다가는 오히려 이상한 오해를 살 것 같았다.

“저는, 비스몽트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에요.”

“……요리장이라고요?”

“네. 아체리아 클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멜 씨.”

아체리아가 악수를 청하자 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도대체 요리장이 공작의 별장행에 왜 따라온단 말인가? 아니, 아까 분명 굉장히 친밀해 보였는데…….

“저, 클링 양. 설마…….”

“정부는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그걸 물으려던 게 아니었지만 궁금한 것 중 하나이기는 했다. 멜은 의혹 섞인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공작님께서 하시는 일에 제가 입을 댈 순 없죠.”

그 말은 매우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공작이 그녀를 정부로 삼든 말든, 약혼녀로 삼든 말든, 혹은 그냥 요리사로 쓰려고 데리고 왔든 말든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별장의 하인들은 본저택의 호즈만이나 예시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클라우스를 보아 온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주인도 없는 이곳을 이제까지 충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이니만큼, 비스몽트 공작 가문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았다.

그들의 주인은 비스몽트 공작 한 사람뿐이었고, 따라서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건 함부로 충고하거나 끼어들 수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게 설령 요리장의 뺨에 키스를 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체리아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면 어떤 화제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곧 한 가지를 생각해 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근처에 시장이 있어 식재료를 살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정말인가요?”

“아, 그렇지요.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면 됩니다.”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클라우스가 데려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수석 요리장이라면 하녀장과 동등한 위치였기에, 멜은 한참 어린 아체리아에게도 함부로 말을 낮추지 않았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본저택의 하녀장님도 저를 그냥 ‘아체리아’라고 부르시는걸요.”

“본저택의 하녀장…… 혹시 예시카 씨가 아직도 하녀장 자리에 있으신가요?”

아체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시카 씨를 아세요?”

“알고말고요. 제가 공작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제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신 분이 예시카 씨였는데요.”

멜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예시카보다 몇 살쯤 젊어 보였다. 그녀의 후배라기에 딱 맞는 나이로 보였다.

“아직도 하녀장으로 건재하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마구 잔소리를 하시고, 주방에 있는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시종들을 혼내시는 분이죠.”

아체리아가 킥킥 웃으며 말하자 멜의 표정도 풀렸다. 그녀도 옛날에는 잠시 본저택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클라우스의 외조부가 점차 쇠약해져 요양 삼아 별장을 드나들게 될 때쯤 그를 따라 이곳으로 온 것이다.

멜이 본저택의 신출내기 하녀일 때는 예시카도 하녀장이 아니었다. 다만 이따금 본저택에서 사람들이 올 때 예시카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공동 화제 덕분에 멜과 아체리아 사이의 분위기는 잠깐 사이에 퍽 누그러졌다. 아체리아가 시장 구경을 가겠다고 하자, 멜은 버들가지로 짠 단단한 바구니를 직접 챙겨 주기까지 했다.

“비스몽트 공작저의 사람이라고 하면 상인들이 알아서 좋은 물건을 챙겨 줄 거예요.”

“고맙습니다, 멜 씨.”

아체리아는 한 팔에 바구니를 낀 채 신이 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어디 가?”

“악!”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놀란 아체리아가 바구니를 휙 치켜든 순간이었다.

“공작님?”

“이제 막 패려고 하네. 한 대 때려 봤다고 맛 들인 거야?”

능청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하는 클라우스를 살짝 흘겨본 아체리아는 들었던 바구니를 내리며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놀라게 하시니까 그렇죠.”

“바구니 들고 어디 가려고?”

“시장요. 시장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구경하러 가고 싶어요. 저녁에 만들 요리 재료도 살 겸…….”

“같이 가.”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자연스럽게도 아체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체리아는 뭐 하는 짓이냐는 듯이 그를 슬쩍 올려다보았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멜하고는 좀 친해졌나?”

“아, 좋은 분이셨어요. 예시카 씨의 후배라고 하시던걸요. 이 바구니도 멜 씨가 챙겨 주신 거예요.”

“그래, 좋은 사람이야. 내가 어렸을 때도 나를 잘 챙겨 줬지.”

클라우스는 기묘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뭔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것처럼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공작님.”

“왜?”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체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지.”

“뭔데요? 외조부께서 숨겨 두신 금괴라도 찾으신 거예요?”

“금괴 갖고 싶어?”

“아니, 제가 갖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이 텅 빈 저택에서 뭐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으셨을까 해서요. 옛날에 오는 것도 싫어하셨다더니.”

클라우스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손 안에 쥔 아체리아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그가 말했다.

“글쎄, 네가 같이 와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야.”

“……농담하시지 말고요.”

“농담 아냐.”

아체리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나 곧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고, 낯선 곳의 공기는 깨끗하고, 클라우스도 기분이 좋다. 그러면 되었다. 아체리아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시장은 아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상점들이 알차게 들어서 있었다.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처음 보는 식자재들이 눈에 띄었다.

신이 난 아체리아는 느긋하게 따라오는 클라우스를 내버려 둔 채 좌판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느긋한 시간대인지라, 나른하게 부채질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던 상인들은 이 낯선 빨간 머리 아가씨가 대관절 어디서 왔을까, 궁금한 표정이었다.

“와!”

싱싱한 채소들을 구경하던 아체리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듯 감탄하자, 그녀를 힐끔거리고 있던 주인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주인이 놀라건 말건 아랑곳 않고 주먹만 한 양파를 불쑥 집어 들었다.

“이거, 양파인가요?”

특이하게도 보라색을 띠는 양파였다. 주인은 그럼 그게 양파지 뭐겠냐는 얼굴로 아체리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슬쩍 웃었다.

“아가씨, 외지인이군?”

“네, 맞아요.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왔어요.”

멜이 가르쳐 준 대로 말했더니 상인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아, 아니, 공작저에서 오셨다고요? 아이구, 그럼 말씀을 하셔야지.”

“저기, 전 공작 가문의 아가씨는 아니고…….”

“이 양파는 요 근방의 지역에서만 나는 특이한 놈입니다. 토질 때문에 보라색으로 자라는데, 불에 익히면 색깔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서 재밌는 요리가 되지요.”

반말이던 주인의 말투는 순식간에 공손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공작저라는 말이 이 근방에서는 꽤 큰 의미를 가지는 모양이었다.

‘공작령도 아닐 텐데, 특이한걸.’

아체리아는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식재료들 앞에서 그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뒤따라온 클라우스도 보라색 양파에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먹고 싶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체리아는 양파 다섯 개의 값을 치르고 바구니에 담았다.

“그 이상한 색의 양파로 대체 뭘 만들 건데?”

“글쎄요? 양파로 만들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죠. 양파 수프도 만들 수 있고, 양파 커틀릿, 양파 소테, 양파 소스…….”

“흰 양파로는 부족해? 꼭 보라색이어야만 해?”

“신기하잖아요! 불이 닿으면 색이 죽기는커녕 더 살아난대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클라우스는 하나도 안 궁금하다는 것을 표정으로 어필하려 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클라우스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시장을 구경했다. 바다가 가깝지 않은 지역인지라 신선한 생선을 파는 가게만 없을 뿐, 푸줏간이며 신기하게 생긴 과일을 파는 곳까지 특색 있는 가게가 많았다.

저녁거리로 쓸 식재료를 바구니에 가득 담은 아체리아는 마치 상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겁지 않아?”

클라우스가 바구니를 보며 말했다. 바구니는 여전히 아체리아가 들고 있는 채였다.

“내가 들어 줄까?”

“농담하시는 거죠? 공작님은 못 드실걸요. 무거워서.”

코웃음을 치는 아체리아의 태도에 클라우스는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줘 봐. 내가 들 테니까.”

“아이 참, 못 드신다니까요.”

“너도 들 수 있는데 내가 못 들겠어? 이리 내.”

호기롭게 바구니를 빼앗은 클라우스는 순간 어깨를 움찔하며 걸음을 주춤거렸다. 바구니는 상당히 무거웠다. 아니, 엄청나게 무거웠다. 이런 걸 번쩍 들고 힘든 내색도 하지 않다니, 도대체 얼마나 힘이 센 거야?

“그것 보세요, 무거우시죠?”

“……안 무거워.”

진심이 아니라는 게 뻔히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응, 무겁네’ 하면서 바구니를 도로 넘겨줄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는 양손에 바짝 힘을 준 채로 바구니의 손잡이를 쥐었다.

“무리하지 마시라니까요. 전 밀가루 두 포대를 들고 뛸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요.”

“나도…… 할 수…… 있거든.”

“공작님은 밀가루 한 포대랑 비슷한 무게이실 것 같은데요.”

“아니야!”

“아니긴.”

아체리아가 킥킥 웃었다. 수도를 벗어나서일까? 그녀는 왠지 클라우스가 더 편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반말로 말해 버렸지만 깨닫지도 못했다.

“……안 무거워.”

묻지도 않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클라우스는 기어이 제 손으로 바구니를 들고 공작가의 별장까지 걸어갔다. 세수할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일 없을 공작이 얼굴이 벌게진 채 바구니를 들고 오는 걸 본 집사가 사색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 * *

백작 영애의 살롱에서 열린 티 파티에 초대받은 릴리엇은 평소와 달리 시종일관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딱 잘라 거절하기 힘든 애매한 관계의 지인인지라 초대하는 대로 오기는 왔지만, 설마 시드레 백작과 그 무리들이 초대된 자리였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초대장을 보냈겠지, 틀림없이.’

오늘의 주연인 백작 영애는 릴리엇보다 한두 살 어린 아가씨로, 사교계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당연히, 사교계 내부의 정치적인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릴리엇은 참을성을 발휘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시드레와 그 추종자 무리들이 들어온 순간 의자를 박차고 나가 버렸을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