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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6)화 (96/144)

96화

클라우스의 말대로, 마차는 정오를 약간 넘긴 시간에 별장에 도착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를 무렵 출발했으니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에 사는 귀족들의 별장이 대부분 하루쯤은 꼬박 마차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지척에 있다고 해도 좋을 만한 거리였다.

“도착했어.”

먼저 마차에서 내린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개를 들어 별장을 올려다본 아체리아는 솔직히 뜻밖이라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보통 별장이라고 하면 바닷가나 강가에 위치한, 휴양지 같은 느낌을 떠올리게 마련이었다. 아체리아 역시도 마차가 굽이진 산길을 돌아갈 때쯤에는 그런 곳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별장은 휴양지 같지도 않고, 하다못해 ‘별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특유의 느긋한 느낌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잿빛의 석조로 이루어진 그 건물은 마치 방문자 일체를 거부하는 곳처럼 보였다.

“여기가…… 별장인가요?”

“그래. 단 하나밖에 없는 비스몽트 공작저의 별장이지. 자, 들어갈까.”

조용한 곳이라는 클라우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인 것 같기는 했지만, 집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온기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규모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별장을 관리하는 사람도 열 명이 채 안 되었다. 하녀장 한 명, 집사 두 명, 정원사 한 명과 마구간지기…… 꼭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만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방문한 클라우스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왜 안 그렇겠는가. 몇 년 동안이나 주인의 방문이 끊긴 곳이었는데. 그나마 그들 모두가 게으르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우울한 곳이기는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는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인들을 소개받은 아체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클라우스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물었다.

“공작님, 요리사가 없는데요?”

그때 하녀장이 손을 들었다.

“제가 요리사도 겸하고 있습니다.”

클라우스는 ‘들었지?’라는 듯이 픽 웃고는 아체리아의 어깨를 감싸듯이 잡았다.

“주방을 소개해 줘. 클링 양은 요리를 아주 잘하니까.”

‘아체리아’가 아니라 일부러 ‘클링 양’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에게 아체리아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하녀장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그렇듯, 그들에게도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멜을 따라가서 주방을 구경하고 와, 아체리아.”

말을 끝낸 뒤 클라우스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아체리아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아체리아의 뺨이 새빨갛게 붉어지자, 그는 킥 웃으면서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녀와.”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짐을 부리고 있는 하인들 쪽으로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멜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과장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주방 구경하게 해 주세요!”

* * *

클라우스는 별장의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가운데에 있는 3층짜리 본채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는 본채보다 작은 별채가 딸려 있는 구조였다. 그중에서도 본채 3층엔 별장의 주인, 즉 공작과 공작 부인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낡기는 했지만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문 앞에 선 클라우스는 한차례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얼핏 보기에 서재 같았다. 책과 종이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가 몇 개 놓여 있고, 반듯한 벽을 따라 유리 장식장이며 조각상, 도자기 같은 것들이 멋스럽게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사방의 벽마다 걸려 있는 수많은 초상화들이었다. 한 사람을 그린 것, 두 사람을 그린 것, 여러 사람을 그린 것…… 초상화는 그 개수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했다.

이 방은 그야말로 비스몽트 공작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귀퉁이부터 색이 바래기 시작한 초상화에서부터 엊그제 갓 그린 듯한 초상화까지, 다양한 면면들을 무감정한 표정으로 지나치던 클라우스는 어느 한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북쪽의 벽면 한쪽을 커다랗게 차지한 그 그림 안에는 클라우스보다 키가 조금 더 클 법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매서운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을 것처럼 엄격해 보였고, 주름이 지기 시작한 눈가와 강퍅한 뺨은 교활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을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할아버님.”

쉰 듯한, 자조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초상화 속의 인물은 17대 비스몽트 공작, 클라우스의 외조부였다.

초상화를 올려다보던 클라우스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면서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두려웠다.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그림 따위를 보고 있는데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외조부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애정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자식을 둘이나 만들 수 있었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외조모인 17대 공작 부인이 일찍 죽었다는 것도 아마 남편의 냉랭함에 기가 질렸던 것은 아닌가 싶어질 만큼.

“제가 여기 찾아오는 걸 반기지 않으시겠지요.”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텅 빈 방 안에 지나칠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는 차가워진 손을 꾹 쥐었다가 펴고,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학대하시던 할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없군요. 이렇게 그림으로만 남아서.”

초상화 속 눈동자가 한순간 번뜩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햇빛의 잔상일 뿐이었다. 클라우스는 자신과 꼭 닮은, 그래서 더욱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외조부의 회청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죽어서는 또 누구를 괴롭히고 계십니까? 제 아버님을 괴롭히고 계신가요? 아니면 어머님을? 누가 되었건, 할아버님의 성에 차는 사람은 그곳에도 없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셨잖습니까. 하긴 저는 지금도 할아버님의 발밑에 있군요.”

17대 비스몽트 공작의 전신을 그린 초상화는 매우 컸고, 그만큼 높은 곳에 걸려 있었다. 클라우스의 눈높이는 공작의 구둣발이 위치한 곳과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

클라우스의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 당신은 죽은 사람일 뿐이니까.”

다시 한번 햇빛이 번쩍, 초상화 속의 눈을 비추었다. 그림 속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에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클라우스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비스몽트 공작가의 명예? 귀족으로서의 몸가짐? 그런 건 다 당신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지. 그 허상에 휘둘린 내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죽은 당신의 무덤을 뒤집어엎어도 모자라.”

당연하게도 그림은 대답이 없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당장에 터져 나오고도 남았을 호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림 속 외조부는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클라우스가 무엇을 하건 뭐라고 지껄이건, 대답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저주 같은 말을 퍼붓지도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겠어. 당신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클라우스는 이제 그림으로부터 열 발자국은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창백하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와 있고, 꽉 쥔 손바닥 안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피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것을 감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 자신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 자신이 죽기를 바랐을지 모르는 외조부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땅속에 묻혔다. 이제는 뼛가루 몇 줌밖에 남지 않았겠지. 관 아래에는 벌레들이 들끓고 있을 테다.

“당신은 먼지로 돌아갈 뿐이야. 더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지. 귀족의 몸가짐 같은 건 개나 주라고 해. 당신의 그림자 따위에 파묻혀 자학하는 건 이제 그만두겠어. 세상을 준다고 해도 사양이야.”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단호하게 몸을 돌려 방을 걸어 나갔다. 뚜벅거리는 발소리에 이어 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텅 빈 방 안을 울렸다.

초상화는 그대로 있었다. 클라우스를 쫓아오지도, 그를 겁주지도 못했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은 클라우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숨을 쉬지 않았던 사람처럼, 길고 평화로운 한숨이었다.

* * *

“맙소사.”

하녀장인 멜이 안내해 준 주방으로 간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부터 대뜸 내뱉었다.

별장이라더니, 수도에 있는 본저택의 주방보다도 더 규모가 컸다. 사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북적거린 흔적은 없지만, 조리 도구며 오븐, 불을 때는 아궁이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렇게 큰 솥이 있다니! 이런 건 본저택에도 없는 건데!”

아체리아가 찜솥을 보며 감탄하는 동안, 하녀장인 멜은 문간에 기대어 선 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주이신 공작께서 데려온 아가씨니 분명 어딘가의 귀족 아가씨일 텐데……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클링 양’이라고만 소개한 것이 좀 이상했다. 보통 어느 가문의 누구라고 소개할 텐데.

그리고 요리를 잘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요즘 수도에서는 귀족 아가씨들이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하는 게 유행이기라도 한 건가?

아니, 혹시 귀족이 아닌 건 아닐까?

“저어.”

고민하던 멜의 입에서 드디어 말이 떨어졌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팬과 솥들을 구경하고 있던 아체리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멜은 움찔했다. 아체리아의 표정이 너무 신나 보였고, 또 해맑아서였다. 저렇게 순진한 걸 보면 험한 일을 하며 산 것 같지는 않은데…….

“저어, 그러니까…… 아가씨께서는, 그, 공작님의…… 약혼녀이신가요?”

신나서 주방을 구경하던 아체리아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멜은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나 싶어 황급히 사과부터 했다.

“시,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뇨,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 음…… 약혼녀까지는 아니고……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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