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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5)화 (95/144)

95화

아체리아는 릴리엇이 시킨 대로 했다. 즉, 클라우스의 등짝을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졸지에 얻어맞은 클라우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아체리아는 얼얼한 손바닥을 탈탈 털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부탁받은 걸 전해 드린 것뿐이에요.”

“누가 이런 걸 부탁해?”

“글쎄요, 누구일 거 같으세요?”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보던 클라우스는 오징어처럼 몸을 뒤트는 걸 그만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뭐,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드레 백작이 제게 공작님 침대를 데우더니 위아래도 잊어버렸냐고 하기에 지금 위아래 모르고 설치는 게 누구냐고 한마디 해 줬을 뿐이에요.”

“뭐? 다시 말해 봐.”

클라우스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아체리아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란츠호프 아가씨가 벌써 한바탕 혼내 주셨으니 공작님께서 화내실 건 없어요.”

“……릴리엇이?”

“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방금 전 그것도 란츠호프 아가씨께서 전해 달라 부탁하신 거였어요.”

잠시 가만히 있던 클라우스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이 탁,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아체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고 그녀의 어깻죽지에 입술을 대었다.

“미안해.”

“공작님께서 미안하실 게 뭔가요?”

“그런 일 겪게 만들어서.”

“그것도, 공작님 탓은 아니죠. 제가 공작님을 차 버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굳이 누구 탓을 하자면요.”

아체리아는 웃고 있었지만 클라우스는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아체리아가 자신의 정부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언젠가 가라앉는 법이다. 더 자극적이고, 더 구미가 당기는 말이 곧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클라우스는 소문의 여부를 알면서도 굳이 정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긴, 클라우스의 눈앞에서 ‘저 여자가 네 정부라던데 사실이냐’고 물을 만큼 담이 큰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자신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는 자책이 이제야 가슴을 쳤다. 아체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라우스 자신마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양 넘길 수는 없었다.

오해를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사실 결혼을 해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아체리아를 정식으로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혀 버리고 나면 정부니 뭐니 하는 소문은 연기처럼 사라질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건 아체리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클라우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체리아에게 굳이 강요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분명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손은 어느새 허리로 내려가 있었다.

간지럽고도 더운 숨이 목덜미에 자꾸만 와 닿자 아체리아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약간 꼬았다.

“……공작님, 간지러운데요.”

“잠시만 더 이러고 있자.”

“아니, 얼마나 더…….”

“아주 잠깐만.”

클라우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자 꼼지락거리던 아체리아의 움직임도 이내 멎었다. 맞닿은 체온은 딱 적당할 정도로만 달아올라 있었다.

“너를 존중하고 기다릴 거지만, 이럴 때마다 인내심이 짧아지는 기분이 들어.”

“무슨…… 인내심요?”

“아무도 너를 두고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그런데 넌 아직 그걸 원하지 않지……. 그걸 기다리는 인내심 말이야.”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 아체리아를 놓아주었다.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던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눈치를 힐끔 살피면서 헛기침을 했다.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기분 나쁜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난 싫어.”

고집부리는 꼬마 같은 말투에 아체리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투를 오랜만에 들어서였을까?

아체리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클라우스가 한쪽으로 입매를 당기며 고개를 들었다.

“좋아.”

“뭐가 좋아요?”

“떠드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우리 둘이서.”

“거기가 어딘데요, 대체?”

“별장.”

아체리아는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별장이라고요?”

“응.”

아체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다시 한번 “별장이라고요?”라고 되물었지만 클라우스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그래, 별장.”

“그…… 뭐냐, 공작님의 외조부님이 계셨다던…… 거기요?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래, 거기. 공작저의 별장은 한 군데밖에 없어.”

공작까지 올 것도 없고, 백작쯤 되는 귀족도 별장을 서너 군데씩 가지는 게 기본이었다. 그런 것치고 비스몽트 공작저는 매우 검소한 편이었지만, 아체리아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으므로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거길 왜 가시겠다는 건데요? 아니, 거기에 누가 살고 있긴 한가요?”

“아무도 없지. 관리하는 하인만 몇 명 있을 뿐이야.”

아체리아의 머리칼을 쥔 클라우스는 향기를 들이마시듯 고개를 숙여 코끝을 대었다. 이윽고 황당해하는 아체리아와 눈을 마주친 그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내일 당장 출발할 거야.”

“제 의견은요?”

“안 갈 거야?”

그렇게 물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체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자, 클라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좀 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채비는 대강 해도 돼. 어차피 거기도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아, 그래도 옷은 좀 챙기는 게 좋을 거야. 좀 쌀쌀한 지역이거든.”

* * *

클라우스가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말에 놀란 것은 호즈만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주인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잠시 고민하던 호즈만은 곧 집사로서의 본분에 따라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분주해진 것은 하인들이었다.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작의 여행길인데 준비를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는 자신이 집을 비운 동안 저택의 총괄을 호즈만에게 위임했다. 그중에는 ‘혹시 외숙부님이 오시거든 절대 들이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다. 호즈만은 죽는 한이 있어도 클라우스의 명령을 지킬 것이 틀림없었다.

여행을 위해 준비된 사두마차는 쾌적하고 넓었다. 수도를 벗어나 한두 시간쯤 달리자, 아체리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역의 풍경이 펼쳐졌다.

“와!”

녹색의 바다 같은, 푸릇푸릇하게 익어 가는 밀밭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열린 창문으로 고소하면서도 풋풋한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아체리아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신나 할 줄 알았으면 진작 가자고 할 걸 그랬군.”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네요, 여행이란 건.”

“여행 가 본 적 없어?”

무심코 물었던 클라우스는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체리아는 어릴 때 가족을 모두 잃고 공작저로 와 그곳에서 자라났다. 여행 같은 걸 가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없죠. 수도 촌것이라는 말이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일걸요.”

“고향은 수도가 아니지?”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도 안 나지만, 아무튼 수도에서는 좀 떨어진 곳이에요. 산사태가 난 후에…… 사람들과 함께 수도 쪽으로 걸어온 기억이 나거든요.”

클라우스는 진지한 태도로 아체리아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아체리아가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몰랐다. 아체리아가 공작저로 왔을 무렵엔 그도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무어라 설명을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하기에는 너무 옛날의 일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아체리아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별장은 어떤 곳인가요?”

클라우스는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했다.

“조용한 곳이야.”

“그게 다예요?”

“옛날에는 발걸음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는 되었지만, 굳이 그런 곳에 왜 가겠다는 건지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유를 물을까, 말까 고민하던 아체리아는 고개를 흔들며 갑자기 몸을 앞으로 쑥 숙였다.

“왜 그래?”

클라우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 순간, 다시 몸을 일으킨 아체리아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이런 건 언제 실은 거야?”

“아까, 공작님께서 호즈만 집사장님과 이야기하고 계실 때요.”

바구니는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묵직해 보였다. 아체리아는 기대하라는 것처럼 씩 웃고는 양쪽에 달린 뚜껑을 휙 열었다.

“여행할 땐 이런 게 있어야죠.”

몸을 숙여 바구니 안을 들여다본 클라우스가 나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체리아의 몸통보다도 더 큰 바구니는 말 그대로 꽉 차 있었다. 뱃속에 말린 과일을 넣어 훈제한 오리부터 꿀을 발라 구운 사과, 일부러 차갑게 식혀 소스를 뿌린 남부식 감자볶음과 채소와 달걀을 오븐에 함께 구운 것, 그리고 라즈베리와 아몬드가 들어간 쿠키와 먹음직스러운 빵도 있었다.

“아예 식당을 차려도 되겠는데.”

“아, 그런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마차를 식당처럼 개조해서 돌아다니며 음식을 파는 거죠! 다른 지역에 가면 수도에서 유행하는 음식 같은 게 인기가 있지 않을까요?”

웃자고 한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아체리아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클라우스는 바구니 안으로 손을 뻗어 빵의 귀퉁이를 조금 떼어 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점심을 먹을 때였다. 배가 고프던 차에 음식 냄새를 맡자 허기가 졌다.

음식뿐만 아니라 바구니 안에는 접시와 포크, 나이프와 스푼도 들어 있었다. 둘은 마주 보고 앉은 채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성찬을 즐겼다.

“이런 걸 언제 다 준비한 거야?”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했죠. 오리는 어젯밤에 다듬었고요.”

“하룻밤 만에 이런 걸 준비하다니, 과연 수석 요리장이라고 할 만한 솜씨네.”

“그걸 이제 아셨어요?”

클라우스는 웃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오리와 말린 과일을 함께 집어 먹었다. 바구니 안에서 식어 차갑긴 했지만 비린내도 없이 깔끔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이것보다 괜찮은 것들을 준비했을 텐데, 미리 다듬어 놓은 재료 중에서 골라 준비하려니 이게 전부였어요.”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

꿀이 굳어 한층 오독오독해진 사과를 깨물어 먹던 아체리아가 또다시 바뀐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물었다.

“도착은 언제쯤일까요?”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 먼 곳은 아니니까 금방 도착할 거야.”

“식재료가 있을까요?”

“근처에 시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사면 될 거야. 참, 그곳의 주방은 아주 넓어. 네가 좋아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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