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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4)화 (94/144)

94화

외숙부의 일을 떠올리자 클라우스는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에른스트는 그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는 슬쩍 떠보듯 물었다.

“별장에 한번 가 보는 건 어떤가?”

“뭣 하러. 초상화 치울 겸?”

“그렇지. 겨울에 쓸 장작거리를 마련하면 딱 좋겠군.”

남의 집 조상들을 그린 그림을 두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클라우스의 외조부, 17대 비스몽트 공작이 말년에 거주했던 그 별장은 클라우스에게 있어 악몽이나 다를 바 없는 장소였다.

외딴곳에 떨어져 공기가 좋다는 이유로, 클라우스의 몸이 조금만 좋지 않아져도 부모들은 그를 별장으로 요양 보냈다. 자신을 지켜 줄 사람 한 명 없이, 우는 소리를 들어줄 사람 한 명 없이 마귀 같은 외조부의 손에 떨어진 클라우스는 하루하루 공포에 떨며 살았다.

오늘은 할아버님께서 또 무슨 말로 나를 겁주실까, 오늘은 또 얼마나 아버지를 욕하실까…….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참혹할 만큼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는 절대로 별장으로 요양을 가지 않겠다고 버티곤 했다. 외조부가 죽은 이후로도 결코 그곳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클라우스, 자네는 그때의 일을 자네 안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에른스트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아직도 외조부의 손에서 다 놓여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든.”

“대공 전하께서는 아는 것도 많으시지.”

비꼬는 듯한 어조였지만 그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대화는 그들 사이에서 일상이었다.

짧게 웃은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긴 하지.”

“별장이라.”

굳이 이제 와서 그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에른스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클라우스는 여전히 외조부의 초상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회랑에 걸린 초상화 중 외조부의 초상화만 휘장으로 덮어 가려 두었을 정도였다.

“……그래, 나쁘지 않겠군. 땔감으로 쓸 만한 게 얼마나 되는지 한번 확인하러 가 보는 것도 말이야.”

* * *

아체리아는 필리파에게 간식을 만들어 준 후, 그 간식을 같이 다 먹고 나서야 겨우 왕궁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나마 간식을 만들면서 긴장을 많이 푼 덕분에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만은 면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마다 자신의 모습을 흘끔거리는 것 같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시종을 따라 회랑을 걸어가던 아체리아는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 중에는 아체리아가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시드레 백작이었다.

“이게 누구죠?”

그냥 빨리 지나쳐 가려던 아체리아의 계획은 시드레의 한마디로 무산되고 말았다. 걸음을 멈춘 시종은 귀족들을 마주할 때마다 으레 그렇듯 뒤쪽으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그가 아체리아를 도와줄 만한 형편은 못 되는 것 같았다.

“공작저의 요리사인 클링 양 아닌가요?”

시드레는 ‘요리사’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귀족 아가씨들은 ‘클링 양’이라는 이름을 듣고 저마다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비스몽트 공작님의 정부라던? 어머…… 왕궁까지 오다니 무슨 생각일까요? 혹시 공작님과 함께 왔다거나 그런 걸까요? 그렇다 해도 평민이 어떻게…….

대충 종합하면 그런 말들이었다. 아체리아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요. 그럼 저는 이만…….”

“기다려.”

시드레가 대뜸 반말을 던지자 뒤에 서 있던 아가씨들은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아무도 말리지는 않았다. 돌아서려던 아체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시드레를 바라보았다.

“감히 천한 신분 주제에 나를 똑바로 쳐다봐?”

“……눈이 달렸는데 어떻게 보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요?”

“공작의 침대를 데우다 보니 위아래도 잊어버린 거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백작님. 저는 비스몽트 공작님의 정부가 아닙니다.”

딱딱한 대답에 시드레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부가 아니라면 네가 공작의 약혼녀라도 된단 말이야? 네 주제에?”

클라우스와 아체리아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은 물론 시드레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뒤에 늘어선 아가씨들도 대부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부가 아니라는 아체리아의 말은 애초부터 그들에게 신빙성이 없었던 셈이다. 하긴, 시드레가 퍼뜨린 소문이 아니더라도 그들 중 고용인에 불과한 요리사가 귀족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입술을 다물고 있던 아체리아가 놀랍게도 시드레 쪽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워낙에 키가 큰 아체리아인지라, 가까이 붙어 서자 시드레가 아체리아를 올려다봐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뭐야?”

“백작님께서도 위아래를 잊어버리신 거 아닌가요?”

시드레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물들었다.

“뭐가 어째?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비스몽트 공작님은 백작님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지위도 높으시죠. 그런데 어째서 ‘공작님’이라 존칭을 사용하지 않으시나요? 함부로 불러도 좋을 만큼 그분이 우스우신가요?”

“네까짓 게 감히 나를 훈계해? 이 자리에서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니?”

“때리시지요. 머잖은 곳에 폐하께서 계신데, 그런 곳에서 백작님이 저를 때리시면 과연 그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도 궁금합니다.”

시드레는 잘 몰랐지만, 아체리아는 결코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예전에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시드레가 닦아세우는 대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지만, 침대를 데우느니 어쩌느니 하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얌전히 있을 아체리아가 아니었다.

게다가 클라우스까지 싸잡아 하찮은 취급을 하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격분한 시드레는 정말로 시종들을 불러 아체리아를 두들겨 패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시드레 백작?”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날뛰는 시드레의 모습에 당황해 있던 아가씨들이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체리아와 시드레도 흠칫하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릴리엇이었다. 하얀 이마를 찡그린 채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걸어온 릴리엇은 자신보다 키가 큰 아체리아의 손목을 잡아 등 뒤로 감추듯 하면서 시드레와 마주 섰다.

“란츠호프 후작 영애, 안녕하신지요? 영애께서 두둔하시는 그 여자가 귀족을 대하는 예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제가 가르치려던 참입니다만.”

억지웃음을 짓는 시드레의 입술은 눈에 띌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아체리아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릴리엇은 시드레 앞에서 겁먹지 않았다. 아직 작위를 받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 후작이 될 사람이다. 당연히 시드레보다도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클링 양은 제 친구라 잘 압니다만, 예의를 잊어버릴 사람은 아닙니다. 시드레 백작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오해라니요? 저 여자가 제게 뭐라고 했는지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건가요? 폐하의 집전실 앞입니다. 시드레 백작이야말로 감정에 치우쳐 당연한 예의를 잊어버리신 것 같군요. 제가 알기로 클링 양은 오늘 폐하를 알현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만약 시드레 백작이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과연 폐하께서 용서하셨을까요?”

시드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너무 화가 난 탓이었다. 턱이 구깃구깃해지도록 입술을 깨문 그녀는 소맷단 아래의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릴리엇은 그런 시드레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백작이야말로 예의를 다시 공부하실 필요가 있는 것 같군요. 제가 댁으로 예법서를 한 권 보내 드릴 테니 꼼꼼히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드레를 뒤로한 채, 릴리엇은 아체리아의 손을 잡고 그대로 회랑을 벗어났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릴리엇은 마차가 보이는 곳까지 다다라서야 겨우 긴 숨을 내쉬며 아체리아를 돌아보았다.

“괜찮니, 아체리아?”

그제야 아체리아도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전처럼 위협적인 릴리엇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공작저를 찾을 때의 릴리엇은 늘 어린 종달새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란츠호프 아가씨.”

“릴리엇이라고 부르라고 했잖니.”

릴리엇은 어느새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무해하고 순진한, 마치 병아리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도대체 귀족들은 가면을 몇 개나 쓰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아체리아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릴리엇의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아체리아의 어깨를 토닥여 준 릴리엇은 골이 난 꼬마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방금 지나온 회랑 쪽을 돌아보았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니까.”

“시드레 백작님요?”

“그래, 달리 누구겠니?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도 눈엣가시인데 이젠 너에게까지! 사람들 눈만 없었다면 뺨이라도 한 대 날려 주는 건데.”

저 조그만 손으로 누군가를 친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아체리아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저런 말에 일일이 대응할 것 없어.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야. 하여튼, 클라우스도 정말 생각이 없지! 널 대뜸 이런 데로 혼자 보내면 어떡한다니? 그래 놓고 뭐?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다고? 이게 알아서 잘 하는 건지 좀 물어봐야겠어!”

처음에는 차분한 목소리더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나중에는 아예 소리까지 빽 지르는 릴리엇을 보던 아체리아가 푹 웃었다.

“왜 웃고 그러니?”

“……아뇨, 그냥…… 귀족들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서요. 란츠호프 아가씨나 대공 전하 같은 분들도 계신가 하면, 시드레 백작님 같은 사람들도 있고…….”

릴리엇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시드레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편이지. 뭐든 물어뜯지 못해 안달 난 것들 같으니라고. 뼈다귀 핥는 개도 아니고 정말 지긋지긋하다니까.”

“……아가씨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 보네요. 좀 새로운 모습인걸요?”

“조신한 척하는 것도 힘들다니까. 참, 넌 이제 돌아가야지? 클라우스가 기다리겠다.”

왕궁에 들어올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저녁이 되어 버렸다. 땅거미가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엇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위로하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돌아가거든 클라우스 등짝 한 대만 때려 주렴. 내 몫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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