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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3)화 (93/144)

93화

“폐하, 그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대공이 하도 시무룩해 있기에 내가 캐물었단다.”

그렇게 말하는 필리파는 마치 장난기 많은 소녀처럼 스스럼없는 모습이었다. 아체리아마저 저도 모르게 스르르 긴장을 풀었을 정도였다. 필리파가 말을 이었다.

“레이넌 대공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남편감인데, 조금의 욕심도 나지 않았니?”

표정은 장난스러웠지만 아체리아는 필리파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없어 대답을 망설였다.

실상 필리파에게 의도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클라우스나 에른스트를 대할 때처럼 허물없이 대할 수 없는 상대여서일까, 저도 모르게 누그러졌던 긴장의 끈은 한순간에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네, 욕심 같은 건…… 나지 않았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필리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체리아는 왠지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대공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폐하, 저는 요리사입니다. 대공비라는 지위가 제게 얼마나 높고 까마득한 것인지, 아마 폐하께서는 상상하기 힘드실 겁니다.”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발언에 타티아나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필리파는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젓고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 내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구나. 물론 대공비 따위 우습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야. 내가 상상하기 힘든 건…… 그래, 네가 생각보다 욕심이 적은 아이라는 거로구나.”

아체리아는 ‘아이’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었고, 심지어 필리파는 아체리아와 동갑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목소리는 매우 위엄 있게 들렸다. 왕녀였을 시절과 왕이 된 지금, 그녀의 외양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변한 것일까?

그건 아체리아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체리아는 공손한 태도로 눈을 내리깔면서 대답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가 욕심을 내는 분야는…… 요리뿐입니다.”

“클라우스의 마음은 받아들였잖니? 대공비와 공작 부인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공작님의 마음은…… 그건, 지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필리파는 대답을 하는 대신 접시 위에 놓인 아마씨를 몇 개 집어 입에 넣었다. 고소한 향이 날 때까지 볶아 설탕을 살짝 뿌린, 필리파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렇게 경직되어 있을 것 없단다. 조금 놀려 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예전엔 내 앞에서도 말을 잘 하더니 지금은 너무 딱딱하게 나를 대하는구나. 서운하니까 그러지 말도록 해.”

아체리아는 그제야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필리파는 오독오독 소리를 내며 아마씨를 씹어 삼키고는 손끝에 묻은 설탕 가루를 손수건에 닦았다.

“자, 내 사촌인 대공은 이미 너에게 차였으니 논외로 둔다 치고. 너와 비스몽트 공작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꾸나. 사실, 오늘 너를 부른 이유 중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단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필리파는 이번에도 잠깐 망설이는 것처럼 대답을 하지 않다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비스몽트 공작과 네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부쩍 많이 목격되었지. 그래서일까? 비스몽트 공작이 혼인도 하기 전에 고용인을 정부로 두었다는 소문이 꽤 파다하게 퍼졌단다.”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은 얘기였다. 그들이 이따금 귀족들이 모일 만한 곳에 얼굴을 내밀면 반드시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으니까.

클라우스는 그런 말에 일일이 반응할 것 없다고 말했다. 신경을 아예 꺼 버릴 순 없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 적응이 된 것인지, 아니면 클라우스의 덤덤함이 옮은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아체리아도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었다.

하지만 필리파까지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체리아가 쉽사리 대답을 하지 않자, 필리파는 마치 평범한 소녀처럼 비스듬히 턱을 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만 좋다면 내가 그런 소문을 일소시켜 줄 수도 있단다.”

이것은 분명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아체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필리파는 못된 장난이라도 꾸미는 것처럼 콧잔등을 찡그리며 씩 웃었다.

“너를 후작에라도 봉한 다음, 한 1년 정도 내 시녀로 두는 거지. 타티아나처럼 말이야. 1년 후에 네가 비스몽트 공작과 결혼한다고 하면 더 이상 정부라고 떠들어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란다. 후작이라는 작위에 왕의 직속 시녀. 아마 혼담이 줄을 이을걸?”

“폐, 폐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저는 그럴 수 없어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시녀라고는 해도 대부분의 일은 타티아나가 할 테니 너는 걱정할 것 없단다. 나를 위해서 차나 좀 끓여 주고, 간식이나 만들다 보면 1년 정도는 금방일 거야. 후작의 지위를 얻는 것은 덤이고. 그래도 싫으니?”

아체리아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멀미에 시달리며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던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은 이미 의식 저 너머로 휘발된 지 오래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현명한 것일까? 어쨌든 받아들일 수는 없는 제안이었다.

“폐하께서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작위를 원하지 않습니다.”

필리파는 이번에도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작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건 왜지? 후작의 지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을 다 통틀어도 후작은 몇 명 되지 않아. 공작 바로 아래의 지위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더더욱 제게는 불가한 일입니다. 폐하, 저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귀족들의 삶을 크게 동경해 본 일이 없습니다.”

“왜?”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이미 모두 하고 있으니까요.”

아마씨가 든 접시를 만지작거리던 필리파가 웃음을 터뜨렸다. 경쾌하면서도 높은 웃음소리에서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정말로 욕심이 없는 아이구나. 좋아, 너의 뜻을 받아들이마. 하지만 내 시녀는 못 되더라도, 나를 위해 간식 한 가지는 만들어 줄 수 있겠지? 마침 내 간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병이 난 참이거든.”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졸음도 달아나실 만큼 맛있는 것을 만들어 드릴게요.”

* * *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는 남부에서 막 들어온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항구가 즐비하게 늘어선 남부의 도시에는 예술가가 많았다. 수도 귀족들 중 예술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 이따금 남부로 내려가 후원을 할 만한 사람들을 고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도 있었다.

에른스트는 특별히 한 사람을 골라 후원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좋아해서, 남부에 있는 예술 아카데미 중 한 곳에 거액의 장학금을 익명으로 기부하곤 했다.

물론 금액도 금액이거니와, 똑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니 아카데미 측에서도 후원자의 정체쯤은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는 터였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양쪽 다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훌륭하군.”

한쪽 벽면을 반쯤 차지한 거대한 풍경화를 보던 클라우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른스트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예술에 대한 조예는 있는 편이었다.

화폭 가득히 그려져 있는 것은 초승달 모양의 섬이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움푹 들어간 해변에는 하얀색 꽃이 한가득 피어 있어, 이런 장소가 실재하긴 하는가 싶은 꿈같은 느낌을 주었다.

구석구석 뜯어보면 감탄할 거리가 더 많은 그림이었다.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이 장소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리라. 보통의 애정으로는 도무지 완성할 수 없을 만한 작품이었다.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도 않은 학생의 작품이라네. 굉장한 재능이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았다고? 말도 안 돼. 한 10년은 그림으로만 돈을 벌었다고 해도 믿겠는데.”

“이런 데에 관심 있는 귀족들이 앞다퉈 후원하고 싶어 한다지. 이만한 재능이 있으면 돈줄을 붙잡기도 쉬울 텐데, 어찌 된 일인지 한 군데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더군.”

“그런 고집을 부리는 예술가들을 몇몇 본 적이 있지.”

같은 화가라도 성격은 천차만별이게 마련이었다. 귀족보다도 더 콧대가 높고 까다로운 사람부터,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그려 내는 사람, 돈은 벌고 싶어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이외에는 결코 그리지 않는 사람 등 다양했다.

이만한 그림을 그린다면 콧대가 높은 것도 하나의 장점이 되리라.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예술을 하는 자들이 오만하지 않으면 매우 하찮게 여기는 희한한 경향이 있었다.

물론 끝끝내 고집을 부리는 자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예술가를 후원하는 귀족들은 ‘남들에게는 오만하지만, 나의 식견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는 예술가’를 좋아했다.

“지금은 아직 학생 신분이라 거절할 명분이 충분하겠지만, 졸업을 하고 난 이후가 문제지.”

“자네가 후원해 보지 그러나? 설마 대공의 후원도 거절할까.”

“연이 닿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글쎄, 먼 이야기지.”

정말로 탐이 나는 인재인지, 에른스트의 대꾸는 제법 진지했다. 클라우스는 섬의 풍광을 섬세하게 그려 낸 그림을 다시 한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볼수록 눈부신 재능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걸자면 회랑의 초상화를 몇 점은 치워야 하겠는데.”

클라우스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에른스트가 씩 웃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초상화 좀 치운다고 큰일이 나진 않겠지. 내가 대공인데 누가 뭐라 하겠나?”

“그렇게 말하니 나도 치우고 싶은 초상화가 한둘이 아니기는 하군.”

“공작저에는 어차피 초상화가 많이 걸려 있지도 않잖나. 초상화가 많은 건 자네 별장이지. 그러고 보니, 거기 방문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지? 한 10년은 된 것 같아.”

에른스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열네 살 이후로 클라우스는 외조부가 머물던 별장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10년도 훌쩍 지난 셈이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소를 생각하자 클라우스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어쩌면 외숙부인 닐스 엥글턴의 그림자가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여전히 공작저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는 살롱이나 파티 자리에는 꼬박꼬박 참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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