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시드레 백작저와, 그녀를 중심으로 모인 다른 귀족들의 저택에 머무는 것 같더군.”
더부살이라도 한단 말인가. 클라우스는 괜한 수치심을 느꼈다. 공작가의 명예가 어쩌고 하며 잘도 떠들어 대더니만, 다른 귀족들의 집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수도에 머무는 것은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대의 외숙부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정확한 것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요. 물론 목적만은 분명하지.”
“제가 공작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는 것이겠지요.”
필리파는 바로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 대공은 감히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지. 무엇보다도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대공과 척을 진다는 것은 곧 왕인 나와도 대적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오. 그들은 보다 쉬운 상대를 고른 것이오.”
“저에 대한 평판이 늘 좋은 것은 아니었지요.”
클라우스가 시니컬한 태도로 웃었지만 필리파는 진지한 태도로 눈을 깜빡였다.
“그들은 그런 점까지 더하여 그대를 악착같이 끌어내릴 거요. 그러니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주변에 두는 사람을 경계하도록 하시오.”
“폐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클라우스는 적당하다 싶은 선에서 필리파와의 대화를 중단했다. 그것은 필리파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노골적이었으나 그녀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수도로 돌아왔다는 닐스 엥글턴은 그 이후로 공작저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의 집을 전전하고는 있다지만, 과연 그가 언제까지고 숨어 있으려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 한 수를 노린다면 클라우스는 거기에 대응할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클라우스는 그 생각에 골몰했다.
대체 뭘 꾸미는 걸까?
* * *
며칠 후, 아체리아는 자신의 앞으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당황했다.
곁눈질로만 보아도 고급스러운 윤택이 느껴지는 비단 봉투였다. 테두리에는 진짜 은사를 이용해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 놓았고, 봉랍이 아닌 매끄러운 실타래를 이용해 입구를 막아 두었다.
“이거 정말 제게 온 편지예요?”
편지를 가져다준 시종은 보란 듯이 봉투를 뒤집어 뒷면을 보여 주었다. 받는 사람의 이름도 은사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틀림없이 ‘아체리아 클링’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보낸 거지?”
만약 그녀가 앞면에 수놓인 디기탈리스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창 문양을 알아볼 수 있었더라면, 매듭을 열기도 전에 누가 보낸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편지를 꺼낸 아체리아는 정교하고 유려한 필체에 우선 감탄했다가 놀란 표정으로 숨을 훅 들이켰다.
“폐하께서……?”
편지는 필리파로부터 온 것이었다. 간단히 안부를 묻는 내용만 보아서는 마치 친구에게 보낸 것 같은 편지였다. 아체리아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왕궁으로 오라고……? 그것도 나 혼자?”
아체리아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이 당혹한 기분을 나눌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들었지만, 편지를 가져다준 시종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나 혼자 무슨 수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편지에는 아체리아가 왕궁으로 올 수 있도록 마차를 보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마차가 도착한다는 시간은 몇십 분도 채 남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옷을 찾았다.
다행히, 그녀의 옷장에는 왕궁에 입고 갈 수 있을 만한 드레스가 몇 벌 있었다. 음악극이니 전시회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클라우스가 선물한 것들이었다.
‘드레스 같은 거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네.’
아체리아는 옷장 안에 있는 드레스 중에서 아무거나 한 벌을 골라 꺼냈다.
사실 그녀가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다면 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입고 갈 드레스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날씨와 왕궁의 유행, 왕께서 오늘은 어떤 옷을 입으셨을 것인가, 앞서 알현한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갔을 것인가…….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했지만, 아체리아는 그런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이걸로 해야겠다.”
아체리아가 고른 것은 세련된 샴페인색 옷감에 자잘한 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린 드레스였다. 어울리는 액세서리와 구두까지 고르고 나자, 편지를 가져다주었던 시종이 다시 아체리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체리아 씨! 왕성에서 마, 마차가 왔어요!”
목소리를 듣자 하니 시종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체리아는 아직 빗질하지 못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정리하면서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왕이 보낸 마차라니, 지체했다가는 왠지 불벼락을 맞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클라우스가 있었더라면 실수하지 않도록 몇 가지 조언이라도 해 달라 말할 수 있었겠지만, 때마침 그는 대공저를 방문하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아체리아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클링 양.”
마차에서 내린 시종은 아체리아가 마차를 타기 쉽도록 발 받침대를 놓아 주었다. 아체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면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이게 무슨 일이야! 긴장돼 죽겠어!’
필리파가 즉위한 이후로는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체리아였다. 아직 왕녀라고 해도 혼자서 만나러 가기는 겁이 날 판인데, 이제 그녀는 조용한 왕녀가 아니라 왕이다. 도대체 무슨 얼굴로, 어떻게 인사를 하면 좋단 말인가?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는 아체리아가 딱했던 건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종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클링 양. 폐하를 알현하는 예의에 관해서는 타티아나 양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아…… 네. 음, 실수하지 않아야 할 텐데요.”
“폐하께서 친히 클링 양을 부르셨으니, 다소간의 실수는 너그러이 보아 주실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아체리아는 숨을 고르며 애써 창밖을 내다보았다. 긴장 탓인지 경사가 진 탓인지, 머리가 핑핑 돌고 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마차가 멈추었지만 현기증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기 위해 신경을 바짝 기울인 채 시종의 뒤를 따라 걸었다.
왕의 집전실로 가는 회랑은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벽마다 걸린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초상화들, 살풍경한 느낌을 지우기 위함인지 곳곳에 마련해 둔 꽃병과 조각상들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문을 몇 개나 지나고 나서야 아체리아는 필리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왕관을 머리에 얹은 채 느긋하게 앉아 있는 표정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밝고, 또 피로해 보였다.
“아체리아 클링 양입니다.”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아체리아는 깜짝 놀랐지만, 그것이 곧 왕을 접견하는 의식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큰 소리로 방문자의 신분을 밝힌 타티아나가 앞으로 나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아체리아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필리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왕좌 가까이까지 다가갔을 때, 필리파는 익숙한 몸짓으로 반지 낀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아체리아 옆으로 타티아나가 다가와 속삭였다.
“폐하의 손등에 입을 맞추어 경의를 표하십시오.”
아, 그런 거구나.
아체리아는 허리를 굽혀 필리파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는지, 시종일관 엄숙한 무표정을 짓고 있던 필리파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단다.”
목소리만큼은 왕녀였던 시절과 똑같았다. 아체리아는 이유도 모른 채 그 사실에 약간 위안을 받았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체리아. 여전히 매력적인 빨간 머리고.”
몸을 일으킨 필리파가 왕좌에서 내려왔다. 두 줄로 도열한 궁인들이 줄줄이 뒤를 따르자, 필리파가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중들 사람 두엇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나가 있게 해.”
“모두 물러나라.”
타티아나가 명령하자 뒤에서 있던 궁인들이 모두 집전실 밖으로 나갔다. 필리파는 아체리아의 손을 가볍게 붙잡은 채 집전실 안쪽의 내실로 안내했다.
“자, 앉으렴.”
아체리아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 삐걱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필리파가 좀 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 풀고.”
테이블을 둘러싸고 놓인 의자는 단 두 개뿐이었다. 등받이에는 푸른색 바탕에 짙은 녹색으로 붓꽃을 수놓아, 시원하면서도 진중해 보였다.
궁인들이 차를 가지고 왔다. 후각이 예민한 아체리아는 미처 잔을 들기도 전에 그 차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작저에도 고급스러운 찻잎은 많지만, 이 차는 향기부터가 달랐다.
“향이 무척 그윽합니다, 폐하.”
아체리아의 말에 필리파는 ‘그렇지?’라는 듯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깨물었다.
“알아주니 반갑구나. 마음에 들면 좀 가져가련?”
“아뇨!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훌륭한 차향을 처음 맡아 봐서요.”
“공작저에서 사용하는 찻잎도 꽤 진귀한 것들일 텐데?”
“하지만…… 이 차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독특하고 깨끗한 향기 하며…… 어떤 차지요?”
“동부에서 새로 들여온 차란다. 네 말대로 깨끗한 향이 나지만, 사실 이 찻잎은 오래 묵힌 것이야. 의외지 않니?”
새순으로 끓인 것인 줄 알았는데. 아체리아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구나.”
필리파가 칭찬하자 아체리아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급하게 입고 오느라……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뭘, 드레스야 마음에 드는 것으로 입으면 그만이지. 유행을 따르니 마니, 남들과 겹쳤니 마니…… 그런 것들만 걱정하다 보면 일찍 죽을지도 몰라. 너무 짜증 나서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필리파가 입고 있는 옷은 수도의 최신 유행을 모조리 따른 드레스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필리파가 입는 옷이 곧 유행이 된다고 보아야 옳았다. 현재 베르데사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숙녀가 바로 필리파이므로.
“요즘 비스몽트 공작과 음악극 구경을 자주 다닌다지? 소문이 들리더구나.”
“아, 네…… 공작님께서 이런저런 구경거리를 제게 보여 주고 싶어 하셔서 자주 다니는 편입니다.”
“그리고 레이넌 대공의 청혼을 차 버렸다는 소식도 들었고.”
아체리아는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그대로 잔 속에 뱉어 버릴 뻔했다. 다행히 왕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이는 것만은 면했지만, 억지로 삼키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