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맛없는 재료 취급을 당해 자존심이 상했는지 클라우스는 평소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대구를 와구와구 잘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아체리아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떠날 줄을 몰랐다. 이토록 보람찰 줄이야!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네 요리를 한 번 더 드시고 싶다 하시던데.”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면서 허리를 바로 세웠다.
“폐하께서요?”
“응. 예전에 네가 연회에서 만들었던 요리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더라고.”
“또 가서 해 드릴 수 있어요.”
그까짓 것, 뭐 어렵겠느냐는 태도였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소심하다고 해야 할지, 드레스 입을 일은 더 만들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왕에게 바칠 요리는 언제 하건 상관없다는 태도에 클라우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왕에게 밉보이면 감옥에 갇힐지도 모르는데 겁도 안 나는 모양이지. 폐하께서 왕녀이셨던 시절에는 네가 실수하더라도 눈감아 주셨을 수 있지만, 왕이 되신 지금은 세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잖아.”
농담이랍시고 한 말인데 아체리아의 표정은 잠시 심각해졌다. 그러나 뒤이어 튀어나온 대답은 심각한 표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요리를 해서 밉보일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대단한 자신감인걸?”
“그 정도 자신감도 없으면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라고 할 수 없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는 정말로 왕의 점심 식사라도 준비하러 가겠다고 나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식사를 마친 클라우스는 냅킨으로 입가를 깔끔히 닦은 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은 요리하러 가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니, 다음번을 기약하도록 해.”
“요리하기에 좋잖은 시기도 있나요?”
“물론이지. 요리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왕궁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 시기야.”
“그건 또 왜지요?”
클라우스는 대답 없이 다시 한번 어깨만 들썩였다. 더 캐묻고 싶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분위기라, 아체리아도 비슷한 태도로 고개를 갸웃하고는 빈 접시를 치웠다.
주방을 향해 멀어지는 아체리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금세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요리하러 가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라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금, 왕성에서는 매우 고요하게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보수파 귀족들을 대거 내몬 필리파의 칼끝이 드디어 선왕의 다른 자식들, 즉 그녀의 이복형제와 자매들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필리파가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만을 대동한 채 죽은 선왕으로부터 왕위 이양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아 냈다는 것은 왕궁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3왕자와 5왕자가 추방된 이후 혹시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오지나 않을까 기대하던 왕자나 왕녀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필리파는 숙청에 어떠한 인정도 두지 않았다. 왕녀였을 시절, 그녀와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차 위협이 되겠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몰았다. 자신에게는 양어머니뻘이 되는 선왕의 후궁이나 정부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귀족들 중에서는 필리파가 너무 위험한 칼을 휘두르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균형 있게 밀고 당길 줄을 모르고, 오로지 목줄을 잡아채기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리파는 스스로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폐하, 비스몽트 공작이 알현을 청합니다.”
“들라 해라.”
나른한 고양이처럼 왕좌에 기대어 앉은 필리파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텅 빈 홀을 울리는 발소리는 가벼운 듯 들렸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왕좌 앞까지 도달한 클라우스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절을 한 뒤 들고 있던 문서를 타티아나에게 건네주었다.
“말씀하신 8왕녀와, 그 어머니인 란셀 후작 부인에 관한 자료입니다, 폐하.”
“수고했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필리파는 타티아나의 손에서 문서를 건네받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 전 클라우스에게 8왕녀와 그 어머니를 뒷조사하도록 명령했다. 8왕녀는 추방된 5왕자와 무척 사이가 좋았는데, 5왕자가 반란을 일으킬 때 그녀가 얼마간 자금을 대었으리라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8왕녀가 자금을 댔건 대지 않았건, 필리파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클라우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왕의 명령에 불복할 수도 없었다.
“란셀 후작 부인은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도 매우 사치스러운 사람이었지. 보석을 사들이느라 진 빚을 선왕께서 몇 번이나 갚아 주시기도 했고 말이야…….”
필리파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팔걸이의 장식을 톡톡, 두드렸다.
“선왕께서 돌아가셨으니, 후궁이나 정부들은 하사받았던 것들을 모두 내놓아야 마땅하건만. 란셀 후작 부인이 자랑해 마지않던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여전히 국고로 돌아오지 않았소. 당최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게 참 궁금해.”
클라우스는 별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필리파는 8왕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몰아낼 계획을 모두 마친 상태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용감한 신하라면 이쯤에서 왕에게 한두 마디 충언을 건넸을 법도 하건만, 클라우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을 택했다. 주군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이상, 그의 선택에 반발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필리파는 그 가혹한 숙청을 제외한다면 매우 훌륭한 왕이었다. 방탕한 선왕이 흥청망청 낭비해 버린 국고와 내탕금을 순식간에 채워 놓았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지방 영지의 상황을 보고받아 세금이며 행정 문제를 해결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가 싶을 정도로, 그녀가 짧은 기간에 해낸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필리파의 무자비한 숙청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녀가 뛰어난 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는 자들은 싹을 잘라 버려야지.”
필리파가 말했다. 마치 상한 나무를 뽑아 버리겠다는 것처럼 무심한 태도였다.
“반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요즘 왕궁 안에서 수상쩍은 움직임들이 계속 포착되고 있지. 아직 내 목을 틀어쥐러 올 만큼 담이 좋은 놈들은 없었지만, 아마 머잖을 거요.”
“폐하, 그리 쉽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경계를 더욱 강화하셔야 합니다.”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래도 필리파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렇지 않아도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의 수를 늘린 참이오.”
“총사대를 부활시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총사대란 왕의 직속 기사들을 말했다. 선왕 대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집단이었는데, 필리파는 무슨 이유에선지 즉위하자마자 총사대를 해체했다.
클라우스의 제안에 필리파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시기에는 총사대를 두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총사대의 기사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제들이 아닌가? 지금의 권력 구도로 보았을 때, 아직까지 총사대의 기사들을 완벽한 내 사람으로 채우기는 무리가 있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노골적으로 내 편일 게 확실한 사람들만 뽑을 수도 없지. 형평성 논란이 일 테니까.”
“……총사대가 위험이 될 일을 걱정하시는 것인지요?”
“그렇소. 어느 가문의 누가 영웅이 되기 위해 나설지 모르는 일이니, 이런 시기에는 오히려 없는 것이 낫지.”
필리파의 말을 듣고 있던 클라우스는 그녀를 향한 암살 위협이 생각보다도 바짝 다가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들도 의심해야 할 정도라면, 왕궁 어디에도 그녀가 안전하게 잠들 만한 곳이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시시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복 자매를 몰아내는 것과, 그로 인해 목숨을 위협당하는 이야기를 잡담쯤으로 치부해 버린 필리파는 그제야 무표정하던 얼굴에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공작의 아체리아는 잘 있소?”
그녀가 ‘공작의 아체리아’라고 표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클라우스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아주 잘 있습니다.”
“일전에 대공이 나를 찾았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지. 아체리아가 대공의 청혼을 거절했다 하더군? 공작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오?”
물론 클라우스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무슨 일인지, 에른스트가 다녀간 이후 내내 시무룩한 아체리아를 추궁해 기어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만 것이다.
“공작은 끝내 그녀와 혼인까지 치를 생각이겠지?”
다소 도발적인 질문이었지만 클라우스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입방아를 찧어 대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두 사람 모두 감당할 수 있겠소?”
그렇게 묻는 필리파의 목소리에는 걱정이라기보다는 일말의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보듯, 혹은 곡마단 광대들의 곡예를 보는 꼬마와 같은 호기심이었다.
클라우스도 필리파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제가 굳건히 버텨야 하겠지요.”
“물론이지. 공작이 무너지면 아체리아는 방패를 잃고 전장 한복판에 맨몸으로 내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요.”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폐하.”
“나로서는 그 애가 차라리 왕궁으로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군. 재미있는 아이니까…… 종종 들를 수 있도록 공작이 배려해 주시오. 나에게도 말상대는 필요하거든. 타티아나는 너무 진지하기만 해.”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졸지에 핀잔을 들은 타티아나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클라우스는 예의 바른 태도로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폐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이후 기회가 되면 같이 폐하를 찾아뵙도록 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공작을 보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소.”
“무엇입니까?”
“공작의 외숙부인 엥글턴 후작 말이오. 엥글턴 후작령으로 돌아갔다 들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후작령으로 돌아가던 마차가 수도로 되돌아왔다는 소식도 들리더군. 알고 있었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클라우스가 고개를 젓자 필리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픽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