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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90)화 (90/144)

90화

둘러앉은 귀족들은 시드레가 대관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개중에는 그녀가 정신이 좀 이상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시드레는 말짱한 제정신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클라우스를 끌어내리기에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여론을 형성하는 일입니다.”

“어떤 여론을?”

“클라우스 공작이 차마 입에 담기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보시오, 시드레 백작. 이런 일은 그냥 뜬소문을 퍼뜨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뭔가 이렇다 할 증거라든가, 뭐 그런 게 있어야 할 것 아니겠소?”

“맞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식으로 모함해 봐야 우스운 꼴을 당하는 건 되레 우리 쪽일 거요.”

귀족들이 모두 다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시드레는 태연했다. 아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설마 근거도 없이 여러분들께 도움을 요청했을까요?”

“아니, 무슨 말이오? 비스몽트 공작이 정말로 뭔가 저지르고 있다는 거요?”

“진짜로 저지르는지 아닌지, 그게 중요하겠어요? 여러분들은 분명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그 근거를 만들어 내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대체 무슨 수로?”

시드레는 기이할 만큼 여유로운 태도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작게 목소리를 낮춘 뒤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가, 종내에는 시드레를 따라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연, 그렇게 된 거군.”

“하지만 정말로 성공할 수 있을지?”

누군가 되묻자, 시드레는 그쪽을 쳐다보면서 생긋이 웃어 보였다.

“그거야, 여러분들께서 얼마나 호들갑을 잘 떨어 주시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 * *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평화로운 베르데사 왕국에도 빈민들은 존재했다.

빈부의 격차는 오히려 지방보다도 수도에서 더 극심한 양상을 보였다. 수도는 지체 높은 귀족들이 많이 모여 사는 탓에 다른 영지들보다 물가가 훨씬 높고, 사람을 대규모로 고용할 만한 일―농사나 탄광, 어업 같은―이 적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빈민들은 남쪽 광장 끄트머리에 자기들끼리의 마을을 형성하여 근근이 살아갔다. 그들은 한밤중이나 새벽녘, 인적이 드문 때를 틈타 귀족들이 사는 저택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그 시간이 되면 각 저택의 주방에서 그날 사용하고 남은 식재료들을 내다 버리기 때문이었다.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지 8년, 생일이 지나면 드디어 아홉 살이 되는 제미니는 오빠를 따라 오늘 처음으로 ‘새벽걷이’를 나왔다. 귀족들의 저택가를 돌며 남은 식자재들을 담아 오는 일을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너덜너덜하게 해진 자루 한 장만이 제미니가 가진 전부였다. 그들은 하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식재료 쓰레기들을 뒤졌다.

“오빠, 오빠! 이것 봐. 감자가 많이 있어!”

제미니가 소리치자 오빠 안톤이 쉿, 하는 소리를 내며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들키면 몰매를 맞는단 말이야.”

“피, 그래 봐야 버리려고 내놓은 걸 주워 가는 건데 왜?”

“귀족들은 원래 그래. 쓰레기랍시고 내놓은 것도 우리 같은 것들이 손대는 건 싫다, 이거지.”

올해로 열세 살인 안톤은 팍팍한 삶에 지쳐 나이보다도 훨씬 어른스러운 소년이었다. 남매는 싹이 돋고 뭉그러진 감자와 꺾이고 시든 아스파라거스, 당근 껍질 같은 것들을 자루 안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새벽걷이’를 나온 사람들은 안톤과 제미니뿐만이 아니었다. 엇비슷하게 낡은 자루를 들고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빈민가의 이웃들이다.

감자를 더 담고 싶어 하는 제미니를 말린 안톤은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다 가져가면 다른 사람들은 가져갈 게 없잖아.”

제미니는 순순히 오빠의 말을 따랐다.

몇 군데를 더 돌다 보니 오늘은 그래도 수확이 꽤 괜찮았다. 누군가 뜯어 먹다가 남긴 듯한 빵을 주운 안톤은 그것을 반으로 갈라 큰 쪽을 여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

버석버석한 빵을 우물거리며 걷던 제미니가 안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저기 봐. 저 집 엄청 크다. 저 집 쪽으로 한번 가 보자.”

제미니가 가리키는 곳을 안톤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곧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긴 헛물이야. 가 봐야 나오는 게 없어.”

“뭐? 저렇게 큰 집인데? 저기가 어디야, 오빠? 오빠는 알아?”

“알지. 저 집은 비스몽트 공작저야. 그런데 저 집은 이상할 정도로 나오는 게 없거든. 봐, 사람들도 저쪽으로는 얼씬도 안 하잖아.”

오빠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루를 든 사람들 중 공작저 쪽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그러지? 저렇게 큰 집이면 음식도 많이 만들 텐데.”

“글쎄, 깨끗하게 먹어 치우는 모양이지. 아니면 개 먹이로 주든가.”

제미니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소녀는 미련이 남는 듯, 인적 없는 공작저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갑자기 안톤이 으스스한 목소리를 내었다. 오빠가 그런 목소리를 낼 때면 늘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미니가 안톤의 허리를 조그만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싫어! 오빠, 또 유령 이야기 하려고 그러지!”

“아냐, 유령 이야기가 아니야. 들어 봐.”

“싫어, 싫다니까!”

“저 집에 사는 비스몽트 공작은 아주 특이한 사람이래. 얼굴은 하얗고 몸이 약해서 매일 쓰러지기 일쑤인데, 건강해지기 위해서 아주 특별한 걸 가져다 먹는다는 거야…….”

제미니는 오들오들 떨었지만 어느새 안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서운 이야기인 것 같긴 하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던 것이다.

“트, 특별한 게…… 뭔데?”

“바로 너처럼 조그만 아이들!”

“꺄악!”

안톤이 제미니의 어깨를 덥석, 붙잡자 그녀가 비명을 질러 댔다. 그와 동시에 몇몇 저택의 덧문이 열리며 하인들이 튀어나왔다.

“누구냐, 이놈들!”

“헉, 큰일이다. 제미니, 얼른 뛰어!”

안톤은 여동생의 손을 붙잡고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미니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오빠의 손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뛰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목 뒤가 스산하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제미니는 점차 멀어지는 공작저를 힐끔 돌아보았다.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니, 완전 괴물이잖아!

앞으로 ‘새벽걷이’를 또 나올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도망친 제미니는 주위가 조용해지자마자 오빠를 마구 때리며 투정을 부려 댔다.

* * *

클라우스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어, 아체리아가 더 이상 그의 침실로 식사를 가져다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닐스가 없을 때처럼 한 테이블에 앉아 같이 식사를 했다.

“오늘의 메뉴는…….”

아체리아가 여느 때처럼 설명을 덧붙이려는 찰나, 클라우스가 한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내가 맞혀 보지.”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체리아는 어디 할 테면 해 보라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클라우스는 마치 어려운 문제라도 푸는 사람처럼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먼저 수프를 한술 떠 입에 넣었다.

“마늘과 새우, 달걀…….”

아체리아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는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수프를 한 입 더 떠먹었다.

“크림과 버터.”

“중요한 게 한 가지 빠졌는데요?”

“뒷맛이 새콤한데. 레몬인가?”

“틀렸어요. 레몬그라스랍니다.”

아체리아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박수까지 짝짝, 치면서 즐거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메인은요?”

“케저리kedgeree 같은데. 이건 알아. 훈제 대구가 들어가는 요리잖아.”

“맞아요. 오늘은 좀 특별한 향신료가 들어갔으니 더 맛있을 거예요.”

훈제한 대구를 소스와 함께 끓인 뒤, 향신료를 듬뿍 넣고 볶은 양파를 함께 얹은 케저리는 미식가인 귀족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인 메뉴였다. 클라우스는 원래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제법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게 되어 한번 만들어 본 것이다.

제 몫의 케저리를 한 입 맛본 아체리아의 반응은 격했다. 요리를 한 건 분명 자기 자신인데도, 먹어 보니 또 새로운 맛이 나는 것 같다는 둥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 정말. 이 향신료를 쓰길 잘했다니까. 톡 쏘면서도 너무 맵지 않고, 부스러질 정도로 연한 생선살에 구석구석 스며든 맛이 너무 좋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음식을 제법 잘 먹게 되긴 했으되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호들갑을 떨어 본 적 없는 클라우스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뭡니까, 공작님. 좀 더 요란스럽게 맛있다고 해 주세요.”

“뭐 얼마나 요란스럽게 해 달라는 거야? 춤이라도 춰?”

“아, 그래 주시면 저야 기쁘죠. 이 감동적인 맛을 몸으로 표현해 보세요.”

클라우스는 말을 말자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수프를 한 그릇 더 청해 먹었다. 메인 메뉴보다는 아무래도 새콤한 맛이 있는 새우 수프가 그의 입맛에 더 잘 맞았다.

아체리아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그런 클라우스의 모습을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왜 웃어?”

“잘 드시니까 보기 좋아서 그러죠.”

“옛날에 읽은 동화 중에 그런 게 있었는데. 산속 오두막에 사는 마녀가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포동포동 살이 찔 때까지 온갖 맛있는 것들을 먹였지.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말이야.”

아체리아가 으, 하는 소리를 냈다.

“전 공작님을 잡아먹지 않을 거예요. 맛도 없을 것 같아.”

“방금 뭐랬어? 맛이 없을 것 같다고?”

“당연하지요! 모름지기 재료란 기름이고 수분이고 두둑하게 올라야 맛이 있는 법인데, 공작님은 전혀 아니시잖아요.”

졸지에 비쩍 말라 맛대가리 없는 취급을 당한 클라우스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쳤다.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제가 주방에서 재료만 보고 산 게 도대체 몇 년일까요?”

“비쩍 마른 게 의외로 맛있을 수도 있는 거지. 훈제 대구도 비쩍 말랐지만 맛있잖아.”

“맛있어지고 싶으시면 그 훈제 대구나 좀 더 드세요. 자꾸 수프만 드시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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