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공작저의 별채 앞에서 마차가 멈추어 서자, 닐스는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거처를 별채로 옮기게 되면서부터 생긴 습관인데, 아무 죄도 없는 하인들이나 마부에게 자신이 받고 있는 푸대접을 화풀이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옛날부터 클라우스를 모시며 어지간히 단련이 되어 있는 자들이었기에, 닐스의 헛기침 따위에 진심으로 겁을 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고용인들의 초연한 태도가 닐스를 더욱 불쾌하게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일부러 발을 쾅쾅 구르며 걷다가, 정원사가 가지런히 다듬어 놓은 모종을 걷어차기도 하며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어렸을 때 그도 이 저택에서 나고 자랐건만, 이곳에는 닐스의 마음을 풀어 줄 만한 좋은 추억이 단 하나도 없었다.
“빌어먹을.”
닐스는 나직하게 욕을 읊조리며 별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포석 깔린 정원의 길을 따라 가까이까지 들려왔다.
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탄 마차였으니, 당연히 별채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대로 별채로 들어갔으면 좋으련만, 취기와 불쾌감이 닐스를 마구 충동질했다. 누구라도 붙잡고 시비를 걸지 않고는 이 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닐스는 별채를 향해 걷던 발을 돌려 본채 쪽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던 하인이 당황하여 그를 불렀지만 무시했다.
닐스는 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함께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다른 귀족 가문의 여자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저 눈에 띄는 빨간 머리…… 적어도 닐스가 아는 한, 저토록 풍성한 빨간 머리를 가진 귀족 영애는 없었다.
“클라우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체리아는 물론이거니와 클라우스마저도 놀랐다. 막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다 고개를 돌린 그들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씩씩거리고 있는 닐스와 눈을 마주쳤다.
“외숙부님.”
“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닐스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하자 클라우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돌아보았다.
“들어가.”
“들어가긴 어딜 들어가! 클라우스, 너 설마 정말로 저 계집애를 침대까지 끌어들이기라도 한 것이냐!”
아체리아와 클라우스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아체리아는 뜻밖의 말에 당황한 표정이었고, 클라우스의 얼굴에는 싸늘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술에 취하셨습니까, 외숙부님? 이만 들어가시지요.”
“비스몽트 공작이 정부를 둔 역사는 없었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감히 가문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품을 여자가 없어서 저까짓 천한 계집애를 품어!”
“말을 조심하십시오. 여기는 제집입니다.”
그 말은 닐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클라우스의 멱살을 잡아챌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너의 집? 너의 집이라고 했느냐? 네가 진정 비스몽트 가문의 가주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란 말이냐? 허약하고 비실비실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던 것이, 이제는 분수 모르고 허영에 들뜬 계집애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고 있으면서!”
“호즈만!”
클라우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정문 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즈만이 즉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외숙부님을 별채로 모셔라. 그리고 내일이면 후작령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채비하여 배웅을 해 드리도록.”
“잘 알겠습니다.”
갑작스레 떨어진 축객령에 닐스는 그야말로 게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귀족이라면 응당’ 같은 고리타분한 말을 운운하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닐스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해 버린 뒤 아체리아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이 소란해지자 깨어난 고용인들이 기웃대며 상황을 살피다가, 클라우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저마다 숙소로 사라져 버렸다.
“공작님, 저기…….”
“너도 이만 들어가도록 해.”
아체리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짧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작님.”
“아체리아.”
돌아서던 아체리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 클라우스를 보았다.
“……오늘 일은 미안하게 되었어.”
클라우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체리아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겨우 그렇지 않다는 표시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작님께서 제게 사과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민을 해 보았지만, 결국 그렇게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혼자 방으로 올라간 클라우스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크라바트를 풀어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호즈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숙부님은?”
“별채로 모셨습니다.”
“내일 아침이 밝는 대로 그분의 모든 짐을 후작령으로 보내라. 그리고 별채를 비우실 수 있도록 조치해.”
호즈만은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표정으로 잠시 눈치를 살폈다. 손님으로 온 사람, 그것도 외숙부를 내쫓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타격을 받는 건 클라우스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아닙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이다. 점심 식사 전에는 모든 일이 끝나 있어야 할 거야.”
클라우스는 지친 사람처럼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어깨를 숙였다.
“……두 번 다시 그 얼굴을 내 저택에서 보고 싶지 않다.”
“잘 알겠습니다.”
호즈만은 클라우스의 잠자리를 살핀 뒤 인사를 하고 곧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클라우스는 손끝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아무렇게나 몸을 누였다.
외숙부를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히건 얼마나 미워하건, 어쨌든 손님이고 혈육이었으므로.
그러나 아체리아에게 그런 폭언을 쏟아붓는 것까지 용서할 수는 없었다. 비단 외숙부가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아체리아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혼자뿐인 방 안을 멍하니 돌아보던 클라우스는 쓸데없이 넓은 침대의 빈자리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아체리아가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바짝 긴장했던 몸이 늘어지며 까마득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닐스 엥글턴 후작이 공작저에서 쫓겨난 그다음 날.
시드레 백작은 오전부터 보수파 귀족 여러 명을 저택으로 초대했다. 살롱의 티 파티를 빙자한 그들만의 모임이었다.
“엥글턴 후작이 공작저를 나왔다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후작령으로 잠시 돌아가신다고 하던데.”
“곧 다시 올라오시겠지요.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엥글턴 후작이니까요.”
늙수그레한, 아무리 젊어도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자들은 저마다 노골적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 한 명이 배신한다면 모두들 목숨이 위험할 것임에도,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어 담대해진 탓인지 그들은 말을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데르송 후작. 후작의 영지에서 난다는 그 사파이어…… 채굴이 아주 까다로워 애를 먹고 있다지요?”
데르송 후작이라는 자는 수염을 마치 염소처럼 길러 한눈에 보기에도 그리 신임이 가지 않는 인상이었다. 그 삐죽한 수염을 손가락으로 연신 훑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턱 밑에 매달린 수염의 끄트머리는 늘 반지르르하게 뭉쳐 있었다.
“흠, 흐음…… 뭐,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법이지요.”
“갱도가 아주 좁다고 들었는데, 어떤 방식으로 채굴을 하는지…….”
“그것은 극비입니다. 알려 드릴 수 없으니 양해하시지요.”
데르송 후작의 말에 질문한 자의 인상이 불쾌한 듯 실룩였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시드레는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그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탄광 문제는 데르송 후작님께 맡겨 두기로 하고, 우리는 오늘 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해야 하지 않나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들은?”
“아참, 그렇지요. 잊을 뻔했군.”
“비스몽트 공작을 공격할 다른 패가 있는 건가, 시드레 백작? 그가 정부를 두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지만, 딱히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던데.”
“아직 타격을 입을 만큼 칼을 깊숙이 찌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죠.”
생글거리며 말하는 것치고는 매우 살벌한 말이었다. 노회한 귀족들도 시드레의 해맑은 살기에는 헛기침을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명색이 공작이라는 자가, 그것도 미혼의 공작이 고용인 따위를 건드려 침대에서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런 것은 사실, 아무리 깊숙하게 찔러도 피를 많이 보긴 힘든 거죠. 말하자면 이건 전채였다고나 할까요?”
“그럼 뭐, 다른 수가 있는 거요?”
“그럼요, 물론이지요. 이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비스몽트 공작은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은 물론, 법관들의 앞에 나아가 자신의 결백을 울며불며 증언해야 할 겁니다.”
“법관이라고? 이 일에 법관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거요?”
멍청한 영감. 시드레는 질문한 자를 향해 조소가 담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법관들을 직접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깐깐하기로는 이루 말할 데 없는 자들이었잖아요? 법관들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그들의 힘을 약간 빌리는 거지요.”
“대체 무슨 패가 있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요?”
시드레는 생글거리는 표정을 잃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를테면, 비스몽트 공작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어떨까요?”
둘러앉은 귀족들의 면면이 일시에 굳었다.
“범죄라고? 비스몽트 공작이?”
“대체 무슨 범죄를 저지른다는 거요?”
“사람이라도 죽이지 않고서야…….”
그 순간, 시드레가 양 손바닥을 살짝 부딪쳐 짝, 하는 소리를 내었다. 마치 어린아이들과 놀아 줄 때처럼 천진난만한 태도와 표정이어서 위화감은 더욱 강했다.
“그렇지요, 사람! 사람의 목숨보다 귀중한 건 없죠. 존귀하신 폐하께서는 자신과 뜻을 달리한다는 이유만으로 충직한 신하들을 가을 낙엽을 쓸어버리듯 쓸어 내버리셨지만, 그런 분도 역시 국민들의 목숨은 하나하나 모두 귀중하다 생각하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
“만약 비스몽트 공작이 폐하께서 소중히 아끼시는 국민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인물이라면…… 그런 자에게 공작가를 이끌어 나가는 큰일을 맡기시진 않으시겠지요. 모두 아시다시피, 폐하께선 매우 분별이 있으신 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