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공작저의 정원을 벗어나 한참을 달린 마차의 속도가 슬슬 느려지기 시작했을 때쯤이 되어서야 아체리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수도의 북쪽에 위치한 광장이었다. 왕궁에 살짝 못 미치는 위치, 귀족들의 저택과 거대한 분수대, 그리고 솔라티나 대극장이 있는 곳.
“맙소사,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창문을 통해 바깥을 슬쩍 내다본 아체리아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북쪽 광장은 남쪽의 향기 광장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그럼에도 오늘은 발 디딜 틈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마차며 사람으로 완전히 꽉 차서, 마치 축일의 야시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북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걸어가는 게 낫겠군.”
클라우스는 마부석과 연결된 유리를 살짝 두드려 마차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아체리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함께 내렸다.
아체리아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기 힘들었지만, 나중에 보니 사람들은 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 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 솔라티나 대극장에서 열리는 극뿐이었다.
“대체 무슨 극이길래 이렇게까지…….”
“율리아 이너시어라고 들어 본 적 있어?”
“네? 율리아…… 누구요? 들어 본 적 없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극과 음악계를 주름잡던 스타 소프라노야. 내가 소년이었을 무렵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했는데, 오늘 저 솔라티나 대극장에서 그녀의 복귀 무대가 있지.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 거야.”
아체리아는 유명 소프라노는커녕 저택의 고용인들이 가끔 떠들어 대는 배우들의 이름조차도 제대로 몰랐다. 연극이나 연주회의 티켓은 아체리아 같은 서민들이 취미로 보기엔 값이 매우 비쌌던 데다가, 그녀는 애초에 그런 데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곳은 차라리, 저 말고 란츠호프 아가씨나…… 대공 전하와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내가 너랑 오고 싶었어.”
팔짱을 끼고 있는 아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클라우스가 말했다.
극장의 입구는 완전히 인산인해였다. 그나마 초대권을 가진 귀족들은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사람들 틈에 파묻혀 줄을 서는 일만은 면했다.
아체리아와 클라우스는 파란색과 노란색 유리로 장식된 아치형 입구를 지나 너른 홀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뻗어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샹들리에가 압권이었다.
“……저, 좀 긴장이 되는데요.”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안심해.”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몇몇 귀족들 중에는 클라우스와 아체리아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곤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맙소사, 이래서야 진짜 예시카 말대로 될 것 같아. 내가 무슨 정부라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아체리아.”
잡생각에 골몰해 있느라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아체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우린 오늘 음악극을 보러 여기 온 거야.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어.”
말이야 쉽지. 아체리아는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 클라우스의 옆에 더욱 가까이 붙어 걸었다.
좌석은 무대가 잘 보이는 박스석이었다. 오페라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아도 배우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릴리엇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자리를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박스석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커튼으로 가리고 나서야 아체리아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굳이 옆 박스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 들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맞은편 박스석에 앉은 사람들은 클라우스와 아체리아를 보며 신이 나서 수군거리고들 있었지만, 지금의 아체리아는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의자는 편해?”
클라우스가 물었다. 아체리아는 풍성하게 퍼진 드레스 자락이 자꾸만 의자 다리에 밟히자 어쩔 줄을 모르고 엉덩이를 몇 번이나 들썩거리며 자세를 고쳤다.
“의자는…… 편한데, 옷이 불편해요.”
“다음번 드레스는 치맛단을 좀 수수하게 하는 것도 괜찮겠군.”
타고난 외모가 화려하니 드레스가 좀 담백한 것도 잘 어울릴 것이다.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체리아는 뜻밖에도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드레스 입을 일을 또 만들지 말아 주세요.”
“왜? 다른 아가씨들은 입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옷일 텐데.”
“아니,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전 이런 옷이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정말로요.”
“차차 익숙해질 거야.”
아체리아가 뭐라 반박하려는 순간 극장의 불이 꺼졌다.
“시작한다.”
박스석도 어둠에 잠겼다. 아체리아는 괜히 긴장이 되는 기분을 숨기기 위해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쥘부채를 꼭 쥐었다.
무대가 밝아지자 섬의 풍광처럼 꾸며 놓은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뜻한 음악과 더불어 발레단의 군무가 시작되고, 배우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거나 동작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섬
당신 안의 섬
그 섬으로 나는 돌아가고 싶어
우리가 만난 섬
파도를 견디며 서 있던
단 하나의 섬
그 섬으로 나를 돌아가게 해 주오
소름이 끼칠 만큼 맑은 목소리였다. 아체리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소리가 난 곳을 찾으려 박스석의 난간 쪽으로 몸을 당겼다. 무대의 오른쪽, 막 조명이 밝혀지기 시작한 곳에서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밤에도 하얗게 반짝이는 곳
조가비 같은 별들이
끊임없이 빛나는 곳
무희들의 고향
우리들의 고향
당신 안의 고향
단조르 섬
소프라노의 노래가 끝나자 객석은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아체리아는 음악극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이 극이 합창이 아닌 독창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극이라는 것도, 또 무대 연출이 남부의 방식에서 따왔다는 것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감탄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지? 정말 사람이 낸 목소리가 맞기는 한가?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체리아를 보며 클라우스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어 무희 복장을 한 배우들이 쏟아져 나와 제각기 아름다운 춤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었다.
아체리아는 감탄과 즐거움이 뒤섞인 얼굴로 무대를 내려다보느라 클라우스가 옆에 있는 줄도, 맞은편 박스석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굳이 아체리아를 극장에 데려가려는 이유가 뭐예요?’
클라우스는 낮에 릴리엇과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극장이라니,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좋은 곳에 뭣 하러 아체리아를 데려가 구설수를 만드느냐는 것이 릴리엇의 주장이었다.
극장에 오는 귀족들 중 진짜로 무대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가십거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었다. 누가 박스석에 정부를 데리고 왔다더라, 누구의 애인이 바뀌었다더라…….
그런 자극적인 소문들은 대체로 귀족들이 많이 참석하는 극장에서부터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릴리엇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클라우스는 그들의 입에 먹이를 물려 주기 위해 아체리아를 대동하고 극장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아체리아에게 이 음악극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음악극뿐만이 아니라 드레스, 보석, 자수나 피아노, 그 밖의 많은 취미나 좋은 것들을 아체리아가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중에서 아체리아가 요리만큼 좋아하는 것을 찾아낸다면 그걸 더 자주 즐길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수군댈 것을 염려해서 아체리아를 저택 안에만 둔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거야말로 떳떳지 못한 정부를 두는 것과 똑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체리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기 때문이야.’
극이 점점 전개되어 갈수록 아체리아의 표정도 흥미진진하게 바뀌어 갔다. 반면 클라우스는 무대에 거의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아체리아의 얼굴만을, 어두운 박스석에 앉아 홀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체리아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요리 말고도 좋아하는 것들은 없는지, 뭘 재미있어하는지…….’
‘정말 답도 없이 반했군요, 클라우스 당신.’
릴리엇의 핀잔에 자신은 웃었던가? 고개를 끄덕였던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자신은 아체리아에게 흠뻑 반해 있었다.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것들이 늘었고,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많은 욕심들이 생겨났다. 다만 아체리아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속으로 갈무리하고 있을 뿐이다.
‘음악극은 성공한 것 같군.’
느긋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클라우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엥글턴 후작, 클라우스의 외숙부인 닐스는 매일같이 시드레 백작과 비슷한 부류의 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느라 바빴다.
속내야 어떻든,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닐스를 환영했다. 그야말로 다음 대 비스몽트 공작이 되어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고,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은 영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시늉도 제법 잘 해내었다.
닐스는 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공작이 되지 못한 비운의 후계자, 아버지와의 불화로 원치 않는 혼인을 치러야만 했던 비극의 주인공…….
‘흥, 웃기는 놈들. 뭘 안다고 떠들어…….’
앞에서는 닐스도 그들이 자신을 추어올리는 걸 즐겼지만, 등을 돌려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속으로 침이라도 뱉을 듯이 자조했다. 그의 아버지인 17대 비스몽트 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대개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도의 보수파 귀족들은 17대 비스몽트 공작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의 강단과 엄격함을 혀가 마르도록 추앙하느라 정신을 쏙 빼놓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닐스로서는 자신을 내쫓은 아버지가 그토록 존경받는 것이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는 허영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그런 동시에 무척 깊은 앙심을 품는 인물이기도 했다. 알지도 못하는 작자들이 입에 침이 다 마르도록 17대 공작을 칭찬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그 영감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게 돼도 과연 그런 말이 나올까.’
아버지, 즉 17대 비스몽트 공작에 대한 닐스의 평가는 이중인격자에 아동학대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 평가는 오로지 자신이 당한 일만을 생각하며 내리는 평가였다. 같은 아픔을 겪은 클라우스에 대한 동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현재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이 됐다는 것도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모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