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87)화 (87/144)

87화

발칵 소리친 릴리엇은 목이 타는지 그제야 식어 버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클라우스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화를 내는군.”

“안 그러게 생겼어요?”

“아체리아는 이런 걸 본 적 없을 테니까, 한 번쯤 같이 가고 싶었어.”

“웃겨, 정말. 극장에 드나들지 않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잖아요. 말해 봐요,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 본 게 언제예요? 아홉 살? 열 살?”

“열두 살 때였던 것 같은데. 그때 <블루 펄>이라는 극이 유행했었지.”

“그러면서 무슨…….”

릴리엇이 조그만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클라우스는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극장이나 전시회, 파티 같은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릴리엇이 같이 가자고 아무리 졸라도 소용없었다.

그랬으면서 이제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냉큼 초대권을 받아 가? 친구 좋다는 것도 다 헛말이라니까. 릴리엇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식은 찻물을 들이켜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단조르 섬의 무희들>에 누가 나오는지는 알고 있는 거죠?”

유명세를 누리는 소프라노 이야기다.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엇이 말을 이었다.

“이런 것 즐긴다 하는 귀족들이 떼로 몰려올 거예요. 게다가 오늘은 첫 공연이잖아요. 아마 시장 바닥을 방불케 하는 북새통일걸? 그런 곳에 정말 아체리아와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박스석에 앉아서?”

“말했잖아. 난 아체리아의 인생을 망칠 생각도 없고 그녀를 버릴 생각도 없어. 그까짓 소문 좀 퍼졌다고 개처럼 꼬리를 말면 더 우습게 보고 달려드는 법이야.”

“그 말도 맞지만, 귀족들이 보통 극장에 정부들을 달고 온다는 건 당신도 아는 사실이잖아요. 시기가 너무 안 좋아요.”

“정부들과는 달라. 귀족의 정부들은 에스코트를 받으며 극장에 들어오지 않지. 왕의 정부라면 그나마 작위라도 받지만, 귀족의 정부는 그렇지 않으니까. 난 아체리아와 함께 들어갈 거야. 그런 걸 보고 정부라고 떠들어 댈 수 있는 입이 어디 있나 한번 보고 싶군.”

그래서야 문제가 더 커질 뿐,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던 릴리엇은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신경 끌 테니 알아서 하라는 몸짓이었다.

“그렇게까지 진지하다면 왜 약혼을 하지 않아요? 차라리 약혼을 해요. 정부라고 소문이 나는 것보다는 약혼녀가 훨씬 낫잖아.”

“아체리아만 원한다면 난 언제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

릴리엇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체리아가 원하지 않아서 약혼을 하지 않는 거라고요?”

“정확히는, 아직 날 사랑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대.”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릴리엇은 예전에, 페터와 에른스트가 함께 있던 자리에서 잠시 나왔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클라우스가 여자에게 매달리는 것이 상상이 가느냐’던 자신의 그 말…….

당시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클라우스가 그럴 리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릴리엇은 그 주장을 이제 철회해야만 했다.

“엥글턴 후작님은 언제쯤 돌아가신다고 해요?”

“그 질문도 여러 번 들었지만, 난 똑같은 대답밖에 할 수가 없어. 그 답은 ‘몰라’야.”

“난 그분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야비한 사람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 하며…… 선대 공작님이나 공작 부인과는 완전히 천지 차이라고요.”

“너무 오랫동안 촌구석에 박혀 살아서 사람이 삐뚤어졌나 보다 생각하고 딱하게 여겨 줘.”

“딱하게 여길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걸 딱하게 여겨요? 하필이면 시드레 백작과 죽이 맞아서는! 둘이서 도대체 무슨 공작을 꾸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릴리엇은 시드레 백작을 몹시 싫어했다. 사교 모임에서 마주치면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쓴 사람처럼 하하 호호 웃고 떠들었지만, 시드레 백작의 이기적인 면이나 사람을 아래로 내리깔아 보는 습관 같은 것들을 질색했던 것이다.

“둘이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빨리 그분이 후작령으로 돌아가셔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요.”

“무리일걸. 숙모님이 되시는 후작 부인이 돌아가신 지 오래인데, 빈 영지에 큰일이라고 해 봐야 뭐 얼마나 큰일이 생기겠어?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또 모를까.”

* * *

오후 무렵이 되자 루비가 아체리아의 몸단장을 도와주러 올라왔다. 예시카의 추천으로 견습 요리사가 되긴 했지만, 원래 하녀로 들어왔던 아이인 데다가 아체리아를 잘 따라서 클라우스가 일부러 그 아이를 붙여 준 것 같았다.

“요리장님은 어떻게 이렇게 머릿결이 좋으세요? 정말 부러워 죽겠어요.”

루비는 아직 물기가 남아 촉촉한 머리칼에 향유를 발라 꼼꼼하게 빗질을 해 주었다. 남의 시중을 받아 보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연회에 참석할 때도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곤 했으니까― 아체리아는 여전히 서먹하고 어색한 얼굴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빨간색에 억세기까지 하다고, 어릴 때는 예시카에게 잔소리깨나 들은 머리인데.”

“억세다뇨! 말도 안 돼요. 옛날엔 그랬더라도, 지금은 정말 고운 머릿결인걸요. 꼭 귀족 아가씨들 같아요. 이 윤택이며…….”

실제로 아체리아의 머리칼은 매우 윤이 나고 부드러웠다. 어렸을 때는 예시카의 말마따나 부스스하게 일어설 정도로 억세고 거칠었지만, 자라면서 체질이 바뀐 것인지 지금은 적당히 건강한 모발에 보기만 해도 탐이 날 만한 광택이 흘렀다.

“요리장님께서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져서 공작님도 좋아하시는 걸까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루비의 말에 아체리아는 그만 제 혀를 씹고 말았다. 찌릿한 통증에 아체리아가 윽, 하는 신음을 내뱉자 루비는 제가 빗질을 잘못한 줄 알고 쩔쩔맸다.

“어머나, 괜찮으세요?”

“괜…… 괜찮아. 그보다…… 루비, 너 정말 아는 것이 많구나?”

“네? 뭐가요? 아, 공작님이 요리장님을 좋아하신다는 거 말씀이세요?”

한 번 더 들어도 타격은 여전히 셌다. 아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루비는 황홀경에 빠진 것 같은 눈으로 빗을 감싸 쥐면서 말했다.

“그런 건 딱 보기만 해도 아는걸요. 공작님께서 요리장님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시는데요!”

“사…… 사랑스러운 눈이라고?”

“네! 설마 모르신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그 눈! 빙벽 같은 회색 눈동자가, 요리장님을 볼 때만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신다니까요!”

‘얘는 요리사를 할 게 아니라 뭐 다른 길로 나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과장스러운 몸짓까지 해 가며 온갖 장광설을 늘어놓는 루비를 보며 아체리아가 생각했다.

“그 눈이야말로 사랑에 빠진 눈이 아니고 뭐겠어요? 정말, 요리장님이 부러워요. 저도 누군가 그렇게 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 사는 게 행복할 텐데 말이에요.”

“넌 귀엽잖니, 루비. 당연히 널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

“공작저에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 틀린 것 같아요. 하지만 바깥으로 나다닐 수도 없고…….”

길고 긴 빗질을 끝내고서도 루비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조그만 체구와는 달리 무거운 밀가루 포대 같은 것도 번쩍번쩍 들곤 하는 아이니, 이만한 일로 팔이 아프다고 엄살 부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클라우스는 오늘 저녁의 외출을 위해 아체리아에게 드레스를 마련해 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매우 잘 어울리는 검붉은 빛의 드레스였다. 최신 유행을 따라 주름을 잡아 아름답게 부풀린 치맛단에는 은사와 자개를 이용한 오색의 백합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건 너무 화려한 것 같지 않니?”

낯선 사람을 보듯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체리아가 물었다. 그러나 루비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요리장님을 위해서 태어난 드레스 같은걸요!”

“……루비, 너 정말로 변죽이 좋은 아이로구나?”

“에헷, 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하지만 허풍 떠는 게 아녜요, 진짜로요! 이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세요. 꼭 왕비님 같으시단 말이에요.”

왕비라. 아체리아는 루비의 눈에 띄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손목에 쥘부채를 걸고 구두까지 신자 외출할 준비가 끝났다. 루비는 마지막으로 화장을 한 번 더 점검해 주고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환상적인 작품을 보듯이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활짝 웃었다.

“진짜 아름다우세요, 요리장님!”

“됐어, 아름답긴…… 다녀올게.”

“잘 다녀오세요!”

“참, 재료 남은 것들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다른 요리사들에게 말해 줘. 요즘 가만히 두고 봤더니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부위를 자꾸 버리더라.”

“네, 제가 잘 전할게요!”

루비의 요란한 배웅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간 아체리아는 홀 한복판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클라우스를 보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평소에도 차려입으면 몹시 날렵한 맵시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그런 매력이 한층 더 빛을 발했다. 너무 깡말라 보이지 않으면서도 반듯한 선을 드러내도록 몸에 꼭 맞는 옷에, 하늘하늘한 레이스로 된 크라바트를 매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

할 말을 잃은 것은 클라우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체리아가 오늘 입은 것은 어깨를 드러내는 디자인의 드레스인지라, 긴 목덜미 아래의 반듯한 빗장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액세서리로는 공작 부인이 젊었을 적 사용하던 루비 목걸이를 걸어 드레스와 색을 맞추었는데, 샹들리에 불빛을 받으며 걸어 내려오는 아체리아는 그야말로 풍성하게 피어난 한 다발의 장미꽃 같았다.

“……무척 어울리는군.”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클라우스가 말을 꺼냈다. 아체리아는 영 쑥스럽다는 듯이 드레스를 입은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내려다보았다.

“전 이런 색은 정말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공작님.”

“무슨 소리야? 붉은 드레스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다름 아닌 너일 것 같은데.”

‘이런 낯 뜨거운 말을 잘도 하네…….’

아체리아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기 위해 손등으로 자꾸만 얼굴을 가리려 했다. 클라우스는 그런 아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쥔 채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마차까지 데리고 갔다.

“그런데, 공작님. 우리 정말 어디 가는 거예요? 설마 또 왕궁 연회 같은 곳에 가는 건 아니지요?”

“연회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을 하러 갈 거야.”

“그러니까 어디요.”

아체리아가 재촉하자, 클라우스는 순간적으로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멋모르는 아가씨들이 보았더라면 애간장깨나 녹았을 법한 감미로운 웃음이었다.

“아주 휘황찬란한 곳.”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