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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86)화 (86/144)

86화

하루 이틀 비실거리던 클라우스는 사흘째가 되는 날부터 기력을 꽤 되찾았다.

회복에 좋다는 음식을 끼니때마다 해 먹인 아체리아 덕분인지, 치료사들을 닦달해 가며 으름장을 놓느라 고생한 호즈만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몸은 놀랄 만큼 나아졌다.

닐스는 클라우스가 회복기에 접어들자마자 꽁무니를 빼듯이 공작저를 비우기 일쑤였다. 하인들의 말에 따르면 거의 하루 종일 나가 있다가 한밤중에나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요아킴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체리아는 이참에 그가 아주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빌었지만, 안타깝게도 닐스는 클라우스가 잠이 들었다 싶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별채로 돌아왔다. 그가 어딜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점심시간에는 릴리엇이 찾아왔다. 그녀는 아체리아와 클라우스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순간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체리아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난 식사를 하고 왔으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을 마친 릴리엇은 치맛단을 감아쥔 채 황급히 식당을 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아체리아는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테이블 앞에 도로 앉았다.

“란츠호프 아가씨께서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요.”

“알아서 진정하겠지. 내버려 둬.”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신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 밖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이야.”

조금쯤은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아체리아는 병아리콩으로 만든 카술레를 떠먹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저녁에는 나랑 같이 나갈 일이 있어.”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디를요?”

“가 보면 알아.”

“회복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이 정도면 괜찮아. 잊지 말고 시간 비워 두도록 해.”

어차피 클라우스가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으면 아체리아의 시간은 그대로 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강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체리아는 좀 궁금했다.

식사를 마친 뒤 응접실로 올라간 클라우스는 마치 못 올 곳에 온 사람처럼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는 릴리엇의 뒷모습을 보았다. 평소였더라면 마치 제집인 양 호즈만을 불러다 차도 마시고 했으련만, 하녀가 가져다주었을 것이 분명한 찻잔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앉아서 기다리지, 왜 그러고 있어?”

릴리엇은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연한 밀빛의 금발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대체 내가 아까 뭘 본 거예요?”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지 말아요! 아체리아와 함께 식사를 해요? 한 테이블에서?”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기가 막혀. 릴리엇은 도무지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펼치며 괴상할 만큼 어깨를 들썩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한 제스처였다.

“좋아요, 마침 잘됐어요.”

“뭐가 잘됐다는 거야?”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 말이에요. 당신이 정신을 번쩍 차릴 만한 소식이 있으니까 일단 좀 앉아 봐요.”

클라우스는 별말 없이 릴리엇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릴리엇은 기도라도 하듯 입술 앞으로 손을 모은 채 한숨을 쉬었다가, 눈을 깜빡였다가, 하여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몇 차례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클라우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알고 있어요?”

분주했던 것치고는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클라우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그렇죠? 당연하죠. 러플 백작 부인 알죠?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그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의 살롱에 초대를 받아 티 파티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오늘 거기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인기였어요, 클라우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는 형국이었지만 릴리엇은 기가 죽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그게 뭐 어쨌느냐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릴리엇을 보았다.

“내가 또 다 죽어 간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거야? 이제 너무 우려먹어서 심심할 텐데.”

“그런 이야기였으면 내가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릴리엇의 목소리는 이제 심각하게 바뀌어 있었다. 평소 늘 나오던 ‘병약한 비스몽트 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번엔 또 무슨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을까?

“그냥 말해, 릴리엇. 무슨 이야기였길래 그래?”

클라우스가 재촉하듯 말했지만 릴리엇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그런 광경―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을 보아서인지, 더더욱이나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이야기다. 숨이 찬 사람처럼 몇 차례 어깨를 들썩이던 릴리엇이 돌연 책망하는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아체리아를 남몰래 정부로 두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이번에는 클라우스도 권태로운 표정으로만 응수하지는 못했다. 그의 눈빛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을 본 릴리엇은 그것 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내가 경고했잖아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누구지?”

“이미 퍼져 버린 소문이에요. 출처를 어떻게 알아내겠어요? 하지만, 왕궁 연회에서 보았던 걸 생각해 본다면 답은 금방 나오지 않아요?”

닐스와 시드레 백작. 클라우스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릴리엇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레 백작일 거예요. 엥글턴 후작님도 물론 한몫했겠지만…… 여자들 사이에 소문을 퍼뜨리기에 좋은 인물은 그보다는 시드레죠.”

“아체리아가 ‘정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야? 아니면 내가 아체리아를 ‘정부로 뒀다더라’는 소문이야?”

“그게 중요해요? 어느 쪽이든 어차피 결과는 똑같잖아요. 말해 두자면 둘 다였어요. 처음에는 ‘정부일지도 모른다’에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죠. 소문이라는 게 모두 그렇듯이.”

릴리엇은 정말이지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팡, 내리쳤다. 그러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클라우스, 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뭔데?”

“당신이 빨리 약혼할 상대를 찾는 거지, 뭐긴 뭐겠어요?”

“농담하는 거지? 난 약혼할 생각 없어. 아체리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안 만나.”

“당신이야말로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미 소문이 퍼질 만큼 퍼졌어요! 앞으로 더 얼마나 퍼질지 알 수도 없죠! 아체리아 인생을 죄다 망쳐 버릴 작정이에요?”

“전부터 생각한 건데, 릴리엇 너는 왜 내가 아체리아의 인생을 망칠 거라고만 생각하는 거야? 정부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이미 그녀를 정부로 두었다고? 좋아, 그럼 정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내가 아체리아와 약혼하면 되겠군.”

클라우스의 말은 뒤로 갈수록 빠르고 격해졌다. 릴리엇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클라우스, 당신이 대책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이건 너무하네요.”

“그까짓 소문 때문에 이대로 아체리아를 포기할 수는 없어. 포기해 버리면 그때부터 그건 소문이 아니게 되어 버려. 그거야말로 아체리아 인생을 망치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애당초 그런 일은 없었다는 걸 보여 주란 얘기였죠! 아체리아를 대동한 것도 사실은 왕녀님, 아니지, 폐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걸 좀 더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당신이 아체리아와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걸 보이면……!”

“그럴 수 없어. 왜냐면 아체리아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닌 사이가 아니니까.”

릴리엇의 눈동자가 둥그렇게 벌어졌다.

“클라우스, 당신 설마…….”

“헛된 걱정은 안 해도 좋아. 난 아체리아에게 손끝 하나 안 댔으니까.”

그나마 그 정도 분별력이 있는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릴리엇의 표정에서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그게 당장 오늘 밤의 일이 될지, 10년 후의 일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클라우스가 말을 이었다.

“난 아체리아가 내게 마음을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네게도 분명히 말한 거지만, 난 아체리아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 애 인생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도록 보고만 있지도 않을 거고.”

“그럼 그 많은 귀족들을 상대로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작위도 없는 평민을, 그것도 고용인을 공작 부인으로 앉히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가만히 있지 않으면 가만히 있게 만들어 줘야지. 공작 작위는 뒀다가 어디에 쓸 건데?”

틀렸다. 릴리엇은 클라우스가 말이 통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아체리아를 자신의 옆에 두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한때의 유희가 아닌 평생의 반려로서.

정부 운운하는 소문을 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클라우스의 확고한 태도가 더 충격적이었지만, 릴리엇은 쉽게 포기해 버렸다. 아예 이쪽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상대를 붙잡고 열변을 토해 봐야 지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았다.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와요, 클라우스. 솔직히 말하면 정말 구제불능이다 싶을 지경이에요.”

“응원하는 뜻으로 알겠어. 그나저나, 부탁한 건?”

릴리엇은 얄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클라우스를 싹 흘겨보더니, 드레스에 달린 작은 장식용 주머니 안에서 얇고 조그만 종잇조각 두 장을 꺼냈다.

각 귀퉁이가 매끄러운 모양으로 잘려 있고, 표면에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더불어 짧은 글귀가 써 있었다.

<단조르 섬의 무희들>

릴리엇이 꺼낸 것은 극장의 입장권이었다. 몇 년 전 수도에서 명성을 떨치던 소프라노가 잠적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는 첫 무대였다. 란츠호프 후작가는 실력 있는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장이나 전시회의 초대권을 어렵잖게 구할 수 있었다.

“고마워. 내가 구하려 했는데 때마침 쓰러져서 말이야.”

클라우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초대권을 건네주려던 릴리엇은 갑자기 앞으로 뻗었던 팔을 거두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왜 그래?”

“이거 설마 아체리아랑 둘이 가려고 두 장을 부탁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됐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릴리엇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장권을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몰라, 난 이제 모르겠어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아, 골치가 다 아파.”

“머리 아픈 데에 잘 듣는 약이 있는데, 좀 줘?”

릴리엇의 미간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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