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에른스트가 이토록 정색을 하고 말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클라우스는 좀처럼 명쾌한 답을 내리지 않았다.
가주인 그가 나선다면, 피가 닿은 친척이라고는 해도 객客에 불과한 닐스가 계속해서 뻔뻔스럽게 공작저에 눌러앉아 있기는 힘들었다. 물론 들어온 손님이 제 발로 나가기 전에 내쳤다는 것이 바깥에 퍼지게 된다면 또 한동안은 클라우스를 둘러싸고 시끄러운 말들이 오가긴 할 것이다.
귀족들은 사사건건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었지만, 방문 예절이나 손님을 대하는 매너 같은 것에는 특히 까탈스러웠다. 주인이 불편할 때까지 머무는 손님도 구설수에 오르내리긴 마찬가지지만, 그보다는 손님을 내쫓는 주인이 훨씬 더 혹독한 평을 들었다.
“그런 것 말고 뭐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나, 에른스트?”
이번에는 클라우스가 말머리를 돌렸다.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폐하께서 동부 지역의 탄광에 대해 관심을 보이시더군.”
“희귀한 사파이어가 발견되었다는 그곳?”
“그래. 알다시피 동부는 보수파 귀족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이지 않나. 폐하께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단 말이야.”
“빼앗기지 않으려 악착같이 애를 쓰겠지.”
“그 노력이 성과를 거둘지는 의문이지만.”
죽이 척척 맞는 대화다. 클라우스와 에른스트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싱긋이 웃었다. 예전에는 무슨 말을 하건 이렇게 마주 보고 웃을 일이 잦았건만, 요새는 도통 그러지 못했다.
“아무튼, 네가 건강한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
에른스트가 걱정을 덜었다는 듯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려고?”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가는 자네 집사장의 간이 다 쪼그라들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자네의 몸이 좋지 않다고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던지.”
“호즈만이 걱정이 많긴 하지.”
“그러니 오늘은 이만 가 보겠네. 자네의 몸이 다 회복되고 나면 그때 들르지.”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여 에른스트를 배웅했다.
방을 나선 에른스트는 말과는 달리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즈만이 다가오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물었다.
“아체리아에게 할 말이 있는데, 좀 불러 줄 수 있겠나?”
“예? 아체리아 말씀이십니까?”
“쉿, 조용히. 잠시면 되니 후원으로 좀 불러 주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충직한 호즈만은 주인의 오랜 벗인 에른스트에게도 똑같이 충실했다. 호즈만이 고용인 숙소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에른스트는 조금 전과 달리 약간 착잡한 표정을 한 채 공작저의 후원을 향해 걸었다.
오랜만에 들러 본 공작저의 후원은 에른스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나무들은 깔끔하게 가지치기가 되어 있고, 덤불도 가지런한 모양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후원이나 정원을 가꾸는 것은 보통 저택의 안주인들이 하는 일이다. 지금의 공작저에는 그런 일을 꼼꼼히 챙길 만한 공작 부인이 없었고, 클라우스도 조경에 그리 깊은 관심을 두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흰 사과꽃이 일찌감치 지고 난 사과나무에는 막 영글기 시작한 풋사과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는 이 나무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었는데,’
에른스트가 막연한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공 전하.”
아체리아였다. 에른스트는 아기 주먹만 한 크기로 자란 사과를 손끝으로 톡 건드려 보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띠었다.
“왠지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인걸, 아체리아.”
“저를 찾으셨다 들었어요. 호즈만 집사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그래, 맞아. 클라우스의 문병을 온 김에…… 네 얼굴도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 잠시 이쪽으로 오지 않겠어?”
아체리아는 다소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내 에른스트 곁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너도 마른 것 같네.”
“대공 전하께서는 여전하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날 걱정한 적 있어? 말만이라도 기분 좋은데.”
평소처럼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지만 에른스트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덩달아 아체리아도 그를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대체 예전에는, 이 사람을 어떻게 그토록 친밀한 친구처럼 대할 수 있었던 걸까? 청혼은 오히려 에른스트를 아체리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은 것 같았다. 그것이 에른스트가 원한 결말이 아니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엥글턴 후작 때문에 너도 고생이 많을 거라 생각해.”
“저야 뭐…… 공작님께서 고생이시지요. 쓰러지시기까지 하시고…….”
“클라우스와는 요즘 어때?”
에른스트가 진짜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아체리아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애써 머릿속에 묻어 두고 싶어 일부러 태연한 척 대답을 했다.
“늘 그렇듯이 똑같습니다. 저는 공작님께 맛있는 걸 만들어 드리고, 공작님께서는 예전과 달리 그걸 맛있게 잡수시죠.”
“그게 전부야?”
아체리아는 순간 말문을 잃고 에른스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때를 놓치지 않고, 에른스트는 배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아체리아의 한쪽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날 걱정한 적이 있다면…… 아체리아.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그 뒤로.”
‘그 뒤’라는 것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 모를 리 없건만 아체리아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른스트가 자신에게 클라우스만큼이나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아체리아는 자연히 말을 아끼게 되었다. 얼마나 좋게 포장을 한들, 결과적으로는 에른스트에게 상처만 주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이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아체리아는 차라리 예전이 더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클라우스는 까칠하고 까탈스러운 그대로, 에른스트와 릴리엇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친구로 존재하던 그때 그대로.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무슨 수를 써도 주워 담을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공 전하.”
드디어 굳게 다물려 있던 아체리아의 입술이 열렸다. 에른스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그녀의 손을 쥔 손끝을 살짝 떨었다.
“저는…… 대공 전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체리아의 입에서 말이 떨어진 순간, 에른스트는 자신이 그런 대답을 어느 정도로, 얼마만큼 예상하고 있었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떤 희망을 걸었던가? 실낱같은, 가망성 없는 도박이라는 걸 알면서도 판세를 뒤엎을 단 한 장의 패가 결국에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리라 생각했었나?
그런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자부하던 그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의 생각을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실망했고,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대공 전하께서 저를…… 아껴 주시고, 소중한 친구로서 대해 주셨던 것은 어떻게 말해도 모자랄 만큼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공 전하의 마음에 보답해 드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에른스트에게 줄 수 있었을지 모르는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어도, 사랑한다는 대답이 아니어도 기다릴 수 있다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아체리아에게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너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다고 해도?”
질문을 하는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체리아는 힘이 빠진 얼굴로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죠. 전하께서 그렇게 해 주시겠다 하시면,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실 거라는 걸 저도 믿어요.”
“그래도 나는 안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 전하.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 채로 감히 전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요. 전하께서 보시는 저는 단지 껍질일 뿐이에요. 저는…….”
“그런 말…….”
손을 맞잡은 채, 에른스트의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졌다.
“……전하?”
아체리아가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섬세하게 뻗은 속눈썹에 물기가 맺히고, 이윽고 한 방울의 눈물이 잘생긴 뺨을 타고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말 하지 마, 아체리아. 내 눈앞의 네가…… 나에 대해 한 자락의 마음도 가지지 않았다는 말 같은 건.”
“한 자락의 마음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대공 전하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그토록 열렬히 마음을 주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거로구나. 이미 클라우스가 있기 때문에.”
아체리아는 물기 어린 그의 눈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공작님을 사랑한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어요. 저도 아직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공작님께서는…… 저를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그런 분을 혼자 둘 수는 없어요.”
“만약 클라우스가 없었다면 너는 내 청혼을 받아 주었을까?”
순간, 에른스트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방어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야말로 에른스트에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 되었다. 그는 허탈한 듯이 미소를 띠었다가, 촉촉하게 젖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얼굴은 금세 말끔해졌고, 눈가가 약간 발개진 것을 제외하면 그는 평소처럼 멀쩡해 보였다.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아냐. 사실은…… 안 될 거라는 걸 나도 예상하고 있었어. 그래서 대답을 듣는 걸 차일피일 미뤄 왔고…… 비겁하게도 문병을 핑계 삼아 널 만나러 올 수밖에 없었지. 거절한 네 잘못이 아니야, 아체리아. 너의 마음에, 보다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내게 잘못이 있는 거지.”
“대공 전하께서도 잘못하신 건 없어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에른스트는 맥없이 웃으면서 양팔을 가볍게 벌렸다.
“친구로서 위로하며 안아 주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아체리아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른스트의 넓은 품에 가볍게 안겼다. 그의 재킷에서는 달큰하면서도 나른한 향기가 났다. 기분 좋은 오후, 목과 등에 와 닿는 햇빛처럼 포근했다.
“너와 클라우스가 행복한 미래를 맞길 바라고 있어.”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진심이야. 날 차 버렸는데, 네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되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