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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84)화 (84/144)

84화

퓌레 수프에 이어 굴 그라탕이 완성되자, 아체리아는 준비한 요리들을 한꺼번에 공작의 침실로 가져갔다. 묵직한 접시를 세 개나 들고도 그녀는 전혀 힘이 든 표정이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깨어 있었다. 아직 침대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일어나 앉을 정도로는 기력이 회복된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있던 그는 접시를 든 아체리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여기까지 그걸 다 들고 온 건가?”

“식당으로 내려오시는 것보다는 이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아체리아는 침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테이블 위에 차례대로 접시를 올려놓았다.

“여기 든 건 뭐지? 굴인가?”

“맞아요. 굴 그라탕이에요. 몸이 좋지 않으시니까 생굴은 좀 부담스러우실 것 같아 익혔어요.”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쥐기 편하도록 식기를 그의 앞으로 돌려 주고는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딱 봐도 환자용이군.”

“지금 공작님은 어디로 보나 환자가 맞으니 불평하지 마세요.”

딱히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수프는 여느 때처럼 맛이 좋았고, 굴 그라탕도 마찬가지였다. 곁들인 피클도 새콤해서,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깔깔하던 입 안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너는?”

“공작님이 다 드시고 나면 저도 내려가서 먹으려고요.”

“식사할 때 네가 옆에 있는 것도 오래간만인데 같이 먹진 못하는군.”

‘난 환자가 아니니까’라는 농담을 하려던 아체리아는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만 끄덕였다.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클라우스는 다행히 모든 요리를 골고루 잘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체리아는 기쁜 한편, 왠지 맥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시카와 나눈 대화 때문일까? 그와 자신의 사이에 가로놓인 벽 같은 것을 의식할 때마다 늘 이런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영원히 깨뜨릴 수도, 무너뜨릴 수도 없는 벽. 사랑한다는 말로도 충분히 녹일 수는 없는 현실의 벽.

“표정이 왜 그래?”

아체리아가 전에 없이 시무룩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클라우스가 물었다. 아픈 와중에도 온 신경을 아체리아에게 쏟고 있었던 것의 결과였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그의 배려에 마음을 다해 기뻐하기 힘들었다.

“예시카가 말하길, 제가 좀 더 조심해야 한대요.”

클라우스는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조심하다니 뭘?”

“제가 공작님 옆에 있는 것 말이에요.”

“내가 널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서 조심하라는 건가?”

“정확히는, 제가 공작님에게 버려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였어요.”

피로와 병색 이외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던 클라우스의 얼굴에 희미하게 불쾌한 빛이 지나갔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사실 지금은 거의 믿고 있고요.”

“그런데 왜?”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후작님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요. 아무도 제가 공작님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체리아.”

클라우스는 수프를 떠먹던 스푼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체리아가 손을 내밀자, 두 사람의 손끝은 아주 자연스럽게 맞물려 잡혔다.

“그걸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야.”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빛이 바랜 뺨 위에 신열이 오른 것처럼 홍조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게 중요한 건 네 마음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해 대는 게 아니라고. 내가 나에 대한 뜬소문이 퍼지는 걸 몇 년이나 견뎠다고 생각해? 입만 열면 내가 곧 죽을 거란 말밖에 나오지 않던 때도 있었어. 그것도 내 부모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입에서.”

“하지만, 공작님. 이건 그거랑은 다른 문제…….”

“다르지 않아. 어차피 소문이란 것의 본질은 다 똑같아. 남을 까 내리고, 흠잡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지. 그런 것에 하나하나 마음을 쓰다가는 제명에 살지도 못해.”

이 사람은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 아닐까? 아체리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면 그의 말대로 본인에 관한 뜬소문을 하도 겪다 보니 면역이 된 건가?

“그러니까 네 마음이 어떤지만 내게 말해.”

클라우스의 말에 아체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굉장히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저는…… 공작님이 아프시면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여요. 아프게 만든 사람들에게는 화가 나고…….”

“응.”

클라우스는 계속 말하라는 듯이 아체리아의 손을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 도드라진 마디 사이를 훑는 손끝은 차가우면서도 섬세했다.

“혼자 식사하게 놔두고 싶지 않고…… 제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공작님과 싸우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

“그리고…… 공작님이 저를 좋아해 주시는 게 기뻐요.”

말을 끝낸 아체리아가 가만히 시선을 들었다. 클라우스는 마치 한 편의 시를 듣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윽고 클라우스가 눈을 떴다. 구름 낀 하늘 같은 회청색 눈동자가 아체리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걸로 족하잖아. 네가 지금 그런 마음이라면, 나는 그걸로도 좋아.”

“제가 공작님께…… 그, 음……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요?”

“그래. 또 말하지만 난 너를 기다리겠다고 했고, 그건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 혹은 그럴 마음이 들었을 때…… 그때 나에게 와 주면 되는 일이야.”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온 방해자 때문이었다.

호즈만은 뭔가 진지해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잠시 눈치를 살피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작님, 레이넌의 대공께서 문병을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비운 접시들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문을 나서려 할 때,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에른스트와 마주쳤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아체리아.”

필리파가 베풀었던 연회의 그 밤 이후 처음 보는 것이니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할 법도 하다. 아체리아는 의례적으로 고개만 까딱이고는 에른스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몸은 좀 어때?”

문병을 온 것치고 에른스트의 태도는 느긋했다. 따뜻한 음식을 먹어 배가 찬 클라우스도 오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안색으로 그를 맞을 수 있었다.

“간만에 침대에 붙어 있자니 좀이 쑤셔.”

“이거 놀라운 일이군.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듣게 되다니.”

몇 달 전의 클라우스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말에 에른스트는 과장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늘 비실비실하고 병약하던 친구가 건강해진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엥글턴 후작, 그러니까 자네 외숙부가 자네에 대해 이상한 말들을 퍼뜨리고 있는 것 같아.”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에른스트가 말했을 때, 클라우스의 얼굴에서는 조소 이외의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련하시겠어.”

“공공연히 떠들기에는 제법 센 것들도 있던데. 마치…… 네가 부당하게 이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

“알고 있어. 그럴 작정을 하고 왔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고.”

“그런데 이렇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드니까 이런 얘길 하는 거고.”

클라우스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에른스트의 말들은 외따로 떨어진 조각들이 되었다가, 뒤죽박죽으로 합쳐져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낱말들이 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조치를 취한다는 건 상대방이 말을 들어먹을 만한 사람일 때 할 수 있는 방법이지. 결국에는 나를 끌어내리고 까 내릴 생각으로만 가득 찬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요구한들, 그게 먹혀들어 갈 거라고 보나, 에른스트?”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아. 아니면, 적절한 시기라도 기다리고 있는 거야? 폐하께서 그러시듯?”

폐하라는 단어에 클라우스는 갑자기 옆구리를 찔린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존귀하신 폐하와 비교하기에는 난 너무 의욕이 없지.”

“자네가 나서지 않으면 아마 폐하께서 나서실걸. 시드레 백작과 자네 외숙부가 손바닥을 맞추고 있는 걸 어제도 뚫어져라 바라보시더군. 자네 외숙부에게,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이라도 엥글턴 후작령으로 돌아가라고 충고라도 해 주는 게 어때?”

“내 목숨이 붙어 있어 유감일 사람에게 뭣 하러 그런 친절을 베풀겠어.”

에른스트는 급격히 온도가 낮아진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정말로 필리파가 외숙부인 닐스를 쳐내 버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자네가 먼저 뒤로 넘어갈 것 같아 걱정이야.”

에른스트의 진심 어린 말에 클라우스는 초췌해진 뺨을 실룩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이쯤 되니 나도 오기라는 게 생겨서 말이지.”

“그래서 오기로 버텨 보시겠다?”

“어차피 그들이 떠들어 대는 말이라고 해 봐야 옛날에도 한 번씩 다 들었던 이야기들 아니겠어? 병약하고 신경이 예민하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건 사실 멍청해서다…… 뭐 그런 말들 말일세.”

“사실이 아닌 걸 떠들고 다니도록 놔두는 것이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진실을 알려 줘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힘을 써 봐야 헛고생일 뿐이야. 그럴 시간에 나는 차라리 다른 일을 하겠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입맛은 썼다. 에른스트는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분위기를 바꿔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어제 자네가 가 버리고 난 뒤에 시드레 백작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 걸 봤다면 기가 막혔을 텐데.”

“그 여자야말로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어. 외숙부님을 꼬드긴 게 시드레 백작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일 텐데, 도대체 뭘 노리고 있는 것 같나? 설마, 단순히 내가 고꾸라지기만을 기다리면서 이 지난하고 귀찮은 짓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도 에른스트는 별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드레가 클라우스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원한을 품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네가 단지 비스몽트 공작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더한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예를 들면?”

순간, 에른스트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을 잃은 클라우스가 초췌한 몰골로 거리에서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한 번 피어난 불안의 불씨는 마른 짚을 태우는 불길처럼 에른스트의 마음속에서 거세게 일렁거렸다.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클라우스, 친구로서 경고하는데 자네 외숙부를 하루라도 빨리 후작령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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