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요리장! 요리장 따위가 도대체 뭐가 대단하단 말이야!”
닐스는 이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호즈만조차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클라우스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지만 바닥을 디디고 선 발에 단단히 힘을 주며 휘청거리지 않도록 버틴 채 말을 이었다.
“대단하다, 아니다를 외숙부님께서 평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녀는 제 고용인이니까요. 아체리아가 말했던 대로, 그녀를 계속 고용할지, 쫓아낼지는 전적으로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외숙부님께서 쫓아내라, 마라 하실 일이 아니지요.”
“클라우스! 나를 감히 이런 식으로 대하느냐! 네 외숙부인 나를!”
“그러는 외숙부님께서는 저를 조카라고 생각하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클라우스가 싸늘하게 대꾸하자 길길이 날뛰던 닐스도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호즈만은 때를 놓치지 않고 클라우스의 곁으로 다가와 시기적절하게 그의 몸을 부축했다.
“공작님, 안으로 드시지요. 무리하시면 몸에 해가 됩니다.”
“……호즈만, 외숙부님을 별채로 안내해 드리게.”
그 말을 들은 닐스의 얼굴이 파랗게 굳어졌다. 그는 지금껏 공작저의 본채에 딸린 응접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성씨를 쓰고 있긴 하지만,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것이 당연한 대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별채로 이동하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닐스의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대놓고 객식구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클라우스는 ‘별채에 머무시지 않겠느냐’고 정중하게 묻지도 않았다. 단지 집사장에게 통보만 했을 뿐이다.
“클라우스! 거기 서라!”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쉬어야 하겠습니다. 외숙부님께서도 이만 돌아가 쉬십시오.”
닐스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 대도 클라우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휘황찬란한 공작의 침실이 슬쩍 엿보였다가 곧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닐스의 표정은 더욱더 무시무시하리만치 딱딱해졌다.
‘오냐, 클라우스. 괘씸한 놈 같으니…… 나를 이렇게 대했겠다? 오늘 일은 반드시 되갚아 주고야 말겠다.’
어쩌면 시드레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고작 요리사 하나 따위를 저렇게까지 싸고돌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닐스는 주먹을 꾹 쥔 채 부들부들 떨면서 서 있다가 몸을 홱 돌려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 * *
닐스의 거처가 별채로 옮겨졌다는 것은 아체리아에게 있어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클라우스가 그를 다시 본채로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에야, 더는 식탁에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클라우스는 하룻밤을 꼬박 잠으로 지내고도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온몸의 힘이 빠져 버린 사람처럼 거동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침실에서 드실 수 있는 걸로 간단하게 준비할 거예요. 프레드, 요아킴과 함께 별채에 계신 후작님의 점심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요리장님.”
“저녁 시간에는 손님이 오실 가능성도 있으니 어제 계획했던 대로 메뉴를 짜도록 할 거예요. 물론 공작님께서 편찮으시면 소용없겠지만…… 재료를 준비해 두어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럼 시작할까요?”
할 일을 할당받은 요리사들은 즉각 자신의 위치로 이동해 일을 시작했다. 클라우스의 식사를 맡은 아체리아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오늘은 아픈 사람을 위한 요리를 해야 한다. 이런 간단한 요리야말로 아체리아의 맥을 빼놓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평소와 달리 매우 신중한 태도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메뉴는 간단한 것이었다. 달걀과 신선한 순무로 만든 피클을 곁들이로 내고, 텃밭에서 수확한 당근과 완두콩, 닭으로 맛을 낸 육수에 크림을 섞은 퓌레 수프. 그리고 굴 그라탕.
‘공작님이 편찮으시지만 않으셨어도 신선한 굴로 이것저것 만들었을 텐데. 아, 정말! 생각할수록 열받아!’
화가 치밀었지만 굴을 까는 솜씨만큼은 탁월할 만치 능숙했다. 단단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굴 껍질을 다섯 개째 양동이에 던져 넣었을 때, 누군가 주방의 문간을 똑똑, 두드렸다. 예시카였다.
“왜 그렇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굴을 까는 거야?”
아체리아는 고개를 들어 예시카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공작님께서 편찮으시잖아요. 얼굴이 좋을 수가 있겠어요?”
“얼씨구. 우리 빨간 머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공작님을 다정다감하게 챙기셨나 모르겠네.”
“그 말은 벌써 얀 헨릭한테서도 들었으니까 예시카가 또 할 필요 없어요.”
예시카는 호탕한 소리로 웃으며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녀는 아체리아가 까 놓은 굴 껍질을 보고 말했다.
“웬 굴이야? 닭들이 호강하겠군.”
굴 껍질을 깨끗이 씻어 구운 후 빻아서 사료에 섞으면 닭 모이로 제격이었다.
“신선한 굴들이 있길래 냉큼 사들였는데, 생각해 보니 공작님께서 편찮으시잖아요. 그라탕이면 좀 덜 부담스럽게 드실 수 있을까 해서 만들어 보려고요.”
“그렇게 앓아누우신 걸 보는 게 한참 만이기는 하지. 요새는 늘 힘이 넘치시는 것 같더니만…… 쯔쯧. 대체 후작님이 뭘 어쩌셨기에.”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하지만 그분은 정말 너무하세요.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조카에게 그럴 수가 있죠?”
“지금의 공작님이 아니었더라면 자기가 공작가를 차지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게지.”
아체리아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이 굴 껍질을 탕!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던졌다.
“귀족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그까짓 작위가 가족보다 중요한가요?”
“작위 하나 때문에 친형제자매 사이에도 피바람이 부는 걸 몰라서 그래? 공작님은 외동이시니 망정이었지, 만약 튼튼한 동생이라도 두엇 있었다면 어쩔 뻔했니?”
예시카의 말에 아체리아는 곧장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클라우스가 비스몽트 공작이 될 일은 결코 없었으리라. 튼튼한 자식이 있는데 뭣 하러 오래 살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는 허약한 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주겠는가.
“아무튼 전 공작님이 걱정돼요. 외숙부시라는 그 후작님이 더 오래 공작가에 머무셨다가는 이번처럼 또 쓰러지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 먹여서 튼튼하게 만들어 놨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말하다 보니 화가 치밀었는지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예시카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결국에는 빠져 버리고 만 거냐?”
눈이 둥그레진 아체리아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빠…… 빠지다뇨. 그런 거 아니에요, 예시카.”
“아니기는.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아체리아, 너도 참 딱하다.”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냥 해 보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말이었다. 아체리아는 굴을 까던 칼을 늘어뜨리며 맥없이 예시카를 바라보았다.
“저도 사람이에요. 저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래, 당연하지. 하지만 말이다, 아체리아.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일이 한 번 잘못되면 손해 보는 건 네 쪽이야. 공작님이야 뭐, 젊은 한때의 치기 정도로 소문이나 좀 퍼지고 말겠지. 하지만 너는? 만약 네가 공작님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공작님이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땐 어쩔 거냐?”
예시카의 말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아체리아의 가슴속을 쿡쿡 찔렀다. 클라우스의 마음을 알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를 예시카는 노골적으로 까발려 아체리아의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다.
“주인이 건드렸다는 소문이 난 고용인이나 하녀들이 어찌 되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아체리아?”
물론 잘 알고 있다. 이날까지 공작저의 요리사로 일을 하면서 주워들은 풍문만도 몇 개던가. 다행히 선대 비스몽트 공작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그런 추문에 엮여 들어가는 일이 없었지만, 주변의 귀족 저택에서는 심심하면 들려오는 이야기들이었다.
“덜컥 아이라도 생겨 봐라. 운이 좋으면 서자겠지만 아니라면 그 애는 사생아야. 아비 없는 자식을 둔 고용인을 계속 두고 보는 귀족 나리 따위, 내 평생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서자로라도 거둘 만큼 의리를 지키는 놈도 몇 없었어.”
“알아요, 예시카. 하지만…….”
“하지만이 아냐, 아체리아. 넌 요즘 공작님에게 너무 많이 휘둘리는 것 같구나.”
딱, 소리와 함께 또 다른 굴 껍질 하나가 양동이 안으로 떨어졌다. 몽글몽글하고 뽀얀, 그야말로 우윳빛 광택이 도는 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체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님이 그렇게까지 신의 없는 분은 아니세요.”
“그래서 너는 결국 공작님과 연애라도 하겠다, 이거니?”
“아직 그럴 생각까진 없어요.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에요. 앓아눕든 배를 곯든, 가만히 둘 수가 없다고요.”
“난 네가 공작 부인이 되건, 후작 부인이 되건 반대할 생각 없다. 운이 닿아 그렇게만 된다면 기뻐할 일이지. 하지만 명심하도록 하렴, 아체리아. 귀족들은 상상 이상으로 소문에 민감하단다.”
그러니 클라우스 역시도 방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아체리아와 관련된 추문이 사교계에 퍼지기라도 하면 공작은 언제라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다. 예시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런 문제였다.
“예시카가 저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도 다 알아요. 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있고 싶어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내가 무슨 말을 더 얹겠니.”
예시카는 졌다는 듯이 양손을 펼쳐 보이며 치맛자락을 털고 일어섰다.
아체리아는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띠면서 예시카를 가만히 응시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예시카.”
“나한테 고마울 것 없다. 난 우리 공작님께서 어떻게든 너에 대한 도리를 지켜 주길 바랄 뿐이니까. 생각 좀 해 봐라. 너라도 그렇지 않겠니? 넌 내 딸 같은 애였어. 얀 헨릭에게도 마찬가지였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체리아는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뜨겁게 달군 팬에 육수와 굴, 그리고 소스를 넣어 익히기 시작했다. 걸쭉해지기 시작한 소스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낸다.
거품이 솟아올랐다 곧 터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아체리아가 작게 한숨을 쉰 뒤 입매를 반듯하게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