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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82)화 (82/144)

82화

귀부인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다른 사람들까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닐스는 이즈음에서 이만 발을 빼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문이란 적당히 입을 다물어 줄 때 더욱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치기에 그러는 것을요.”

“아니…… 설마 그 빨간 머리 아가씨? 그 아가씨라면…….”

“요리사라지요, 틀림없이. 이전에 폐하께서 왕녀이실 때…… 그때 보신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설마 요리사를…….”

“아직 혼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정부를? 비스몽트 공작이?”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닐스와 시드레는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슬쩍 뒤쪽으로 빠졌다. 그러나 클라우스 쪽을 흘끔거리며 저들끼리 상상을 부풀리느라 바빠 그 자리의 누구도 닐스와 시드레가 빠져나간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필리파는 손짓으로 조용히 클라우스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필리파는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 후 클라우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클라우스는 그제야 그녀가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클라우스, 당신의 외숙부가 지금 당신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클라우스는 어느새 사람들 틈에서 물러나 있는 닐스 쪽을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내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보기엔 신통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군요.”

그것은 제안이나 권고가 아니었다. ‘반드시 알아내라’는 의지가 클라우스에게도 전해졌다.

“아마도 제 한심함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고 계실 겁니다.”

“소문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공작.”

호칭이 ‘클라우스’에서 ‘공작’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말의 무게도 달라졌다.

필리파가 엄하게 말했다.

“칼보다 빠르고 조용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바로 말이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아직 새로운 비스몽트 공작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그게 당신의 외숙부라면 더더욱. 부디 내 손으로 비스몽트 공작가의 대를 끊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처신하기 바랍니다.”

왕이 된 필리파는 이제 더 이상 말을 가리지 않았다. 적어도 에른스트나 클라우스 앞에서는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그녀를 폭군이라 칭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었으므로.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군요.”

필리파는 가도 좋다는 듯이 우아하게 손짓을 했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즉석에서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필리파가 알아보았듯, 실제로 클라우스는 상당히 안색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그리고 닐스와 시드레 쪽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모두 다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클라우스는 걱정하는 에른스트와 릴리엇에게만 간단히 말을 전하고는 연회장을 벗어났다. 시끌벅적한 소음을 등지고 밖으로 나오니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현기증이었다.

* * *

연회에서 빠져나와 공작저로 돌아온 클라우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덕분에 호즈만은 오랜만에 기겁을 하며 치료사들을 불러 댔고, 불이 꺼졌던 고용인 숙소까지도 이 소란통에 모두들 잠이 깨 버리고 말았다.

그중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아체리아였다. 오후까지만 해도 멀쩡히 마차를 타고 왕궁에 갔던 사람이 거의 반실신하다시피 해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허둥거리는 호즈만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호즈만이라고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심지어 그의 외숙부인 닐스 엥글턴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반나절 만에 환자 꼴이 되어 혼자 왔단 말인가? 아체리아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분통을 터뜨리며 후다닥 주방으로 내려갔다.

쓰러진 클라우스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끓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나빠진 거라면 약을 쓰고 푹 재워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몸 전체를 절절 끓이는 듯한 열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아체리아는 램프를 들고 텃밭으로 나가 열을 내리는 허브 몇 가지를 급하게 땄다. 음식을 만들 시간도 없어 차라리 차를 끓이기로 했다. 따뜻하게 끓인 허브티에 오렌지 즙을 몇 방울 떨어트리고, 꿀을 반 스푼 타 넣었다.

“집사장님, 공작님은요?”

“방금 치료사가 약을 썼다. 그건 뭐냐?”

“열을 내릴 수 있는 차예요. 이거 한 모금 드시고 주무시는 게 나을 거예요.”

호즈만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 보거라. 쉬고 계시니 소란은 피우지 말고.”

방 안은 조용했다. 아체리아는 침대에 길게 누워 있는 클라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의 클라우스는 낮이고 밤이고 좀처럼 앓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먹여 가며 겨우 건강을 회복시켜 놓았더니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공작님.”

머리맡에 찻잔을 내려놓은 아체리아가 조심스럽게 클라우스를 불렀다. 열에 들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클라우스는 천천히 눈을 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체리아.”

“좀 어떠세요?”

목이 아픈 건지, 그는 좀처럼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만에야 겨우 나온 대답이라는 것은 이랬다.

“오늘은…… 야식 못 먹어.”

쇳소리처럼 갈라진 목소리나마 농담을 하는 것을 들으니 약간 마음이 놓였다. 아체리아는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픽 웃었다가 그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목 뒤며 어깻죽지, 등 전체가 진득진득한 땀에 젖어 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는 것도 지금은 힘에 부치는지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열을 내리는 차를 좀 끓였어요. 마시기 좋으시도록 조금 식혔으니 한 모금 드시고 주무세요.”

클라우스는 대답을 하기도 힘들어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아체리아는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클라우스의 입가에 대어 주며 그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도왔다.

차는 미지근하면서도 맛이 좋았다.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던 목을 촉촉하게 적셔 주니 기분도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신 거예요?”

입가로 흘러내린 찻물을 닦아 주며 아체리아가 물었다. 클라우스는 쓴웃음을 짓고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열 때문인지, 그만한 일을 하는 데에도 까마득한 피로가 느껴졌다.

“외숙부께서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드시나 신경을 쓰다 보니, 그만.”

“후작님이요? 아니,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넌 신경 쓰지 마. 괜찮아. 내일쯤이면 열이 내리겠지.”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벌컥 소리를 질렀던 아체리아는 호즈만의 당부를 기억해 내고는 얼른 성질을 죽이려 애썼다.

“죄송해요, 소리 질러서.”

“하루 이틀 일인가.”

클라우스가 짓궂게 대꾸했다. 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아체리아가 준비한 차 한 잔을 기어이 다 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괴로운 갈증이 좀 가라앉은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누웠다.

“다른 필요한 건 없으세요?”

“응…… 아니, 몸을 좀 닦았으면 좋겠군.”

“나가서 시종을 데리고 올게요.”

아체리아는 빈 잔을 챙겨 들고 얼른 방을 나섰다. 클라우스의 옷시중을 드는 시종을 찾으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홀로 들어오는 문이 열렸다.

돌아온 닐스는 뻔뻔하리만치 멀쩡했다. 클라우스가 아프다고 해서 그도 역시 아파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 순간 아체리아는 화가 난 나머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대체 조카에 대해 무슨 말을, 어떻게 지껄였기에 사람을 저 지경이 되도록 만들고!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닐스 쪽이었다. 빈 찻잔을 들고 계단 한복판에 서 있는 아체리아를 본 그의 표정이 심상찮게 일그러졌다.

“이런 시간에 고용인들이 함부로 집을 돌아다니도록 놔두는 건가, 클라우스는?”

“공작님께서는 편찮으십니다.”

다 네 탓이 아니냐는 듯, 아체리아의 목소리는 책망의 기색을 띤 채 낮게 떨려 나왔다. 닐스는 허, 하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쳤다.

“그 눈은 뭔가?”

“공작님께서 쓰러질 지경으로 아프신데, 후작님께서는 조카가 걱정되지도 않으시던가요?”

“뭐가 어째?”

닐스가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기세였지만, 아체리아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자가 아니었다면 클라우스가 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스트레스만 받고 있었으니 몸이 버텨 나겠는가?

“네까짓 것이 감히 나를 책망하는 것이냐?”

“책망을 떠나서 사람으로서 그러시면 안 되지 않냐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 건방진 것! 지금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은 것이냐!”

“저를 쫓아내실 수 있는 건 공작님이시지, 후작님이 아닙니다!”

분노한 닐스가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순간이었다. 분명 뺨을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체리아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난간 위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내리십시오, 외숙부님.”

클라우스였다. 방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제대로 거동도 하지 못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기 서 있는 건지, 아체리아마저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닐스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고용인들을 대체 어찌 관리하기에 이토록 시건방진 것이냐! 내 이것부터 쫓아내서 기강을 세울 것이다, 클라우스!”

“아체리아, 너는 네 방으로 돌아가라.”

클라우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체리아는 닐스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거기 서지 못해!”

“외숙부님.”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고개를 휙 쳐들었던 닐스는 자신을 형형하게 노려보는 클라우스와 시선을 마주치고 저도 모르게 발끝을 움찔거렸다.

“고용인들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아체리아가 실례를 저질렀다면 내일 날이 밝은 후 제가 나무랄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제집의 고용인들을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뭐…… 뭐라고? 뭐라 했느냐? 클라우스, 너는 지금 이 나보다도, 외숙부인 나보다도 저 하잘것없는 계집애의 편역을 드는 것이냐?”

“아체리아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녀는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입니다. 누구에게도 하찮게 불릴 일이 없는 위치의 사람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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