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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79)화 (79/144)

79화

클라우스의 외숙부인 닐스 엥글턴 후작이 공작저에 머물게 된 후로,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닐스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소문이 퍼졌다.

엥글턴 후작령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영지를 내팽개치고 도망쳐 온 것이라는 소문부터, 새삼스럽게 공작의 자리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본인의 귀에 들어가면 한바탕 난리가 나고도 남을 만한 말들뿐이었지만,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그 소문은 꽤나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람이에요!”

아체리아가 주스 잔을 쾅, 내려놓으며 열변을 토하자 저녁 영업에 쓸 재료를 다듬고 있던 얀 헨릭이 고개를 들었다.

“닐스 도련님이 그럴 분은 아닌데.”

몇십 년 동안이나 공작저에서 일을 한 얀 헨릭은 당연히 닐스 엥글턴 후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아체리아는 그를 두둔하는 듯한 얀 헨릭의 말투에 화가 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뭐가 그럴 분이 아니에요? 매일같이 뭔가 트집 잡을 게 없나, 눈만 번뜩거리면서 돌아다니기나 하는 사람이라고요.”

“귀족들이 대체로 그렇지. 고용인들이 뭘 실수하지 않나 트집 잡는 걸 취미 삼는 귀족들이 그렇게 드문 건 아니다, 아체리아.”

“공작님은 한 번도 그런 적 없으신데!”

“공작께서 독특하신 거지. 그토록 철저한 성격이시면서도 옛날부터 고용인들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대는 일이 많지 않으셨으니까.”

그야 집사장인 호즈만이 워낙 꼼꼼하게 사람들을 관리하는 덕분이기도 했지만. 아체리아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테이블에 이마를 묻고 엎드렸다.

“짜증 나 죽겠다니까요, 정말! 공작님께서 식사하실 때 나가 볼 수도 없으니 도대체 식탁에서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을지 알 수가 없잖아요!”

“안다 한들 네가 어쩌겠느냐. 공작님께서도 이제 어른이시다. 그 정도는 알아서 대처하실 수 있을 거야.”

“얀은 공작님 표정을 못 봐서 그래요! 이제 겨우 부담 없이 식사를 하실 수 있게 됐는데, 그 사람 때문에 다 망하게 생겼다고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아체리아의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다. 얀 헨릭은 감자를 깎던 칼을 던져 놓은 뒤 손을 씻고는 아체리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체리아, 귀족들 일에는 너무 깊이 끼어들지 않는 게 너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얀은! 공작님이 걱정되지도 않아요?”

“이 녀석아, 내가 설마 공작님께 무슨 일이 생기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으로 말하는 거겠냐?”

“지금 들어 보면 딱 그런 것 같단 말이에요!”

그녀의 머리에 얀 헨릭의 주먹이 꿍!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아체리아는 머리를 싸쥔 채 꽥꽥, 소리를 질렀다.

“자꾸 쥐어박지 말아요! 안 그래도 얀 때문에 정수리가 좀 납작해졌는데!”

“뭐라고? 과장 좀 하지 마라.”

“과장이 아니라니까요! 자! 만져 봐요! 만져 보라니까!”

숫제 난동이다. 얀 헨릭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두툼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네가 공작님을 이렇게까지 걱정하게 되다니 별일이구나.”

얀 헨릭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엔 그렇게 싫어서 안달이더니 말이야.”

“싫어하진 않았어요. 그냥 좀 얄미웠던 거지.”

아체리아는 주스를 다 마신 뒤 발치에 내려놓았던 묵직한 자루를 번쩍 들어 올렸다. 빼꼼히 열린 입구로 싱그러운 녹색의 풋자두가 보였다.

“가서 풋자두 절임이나 만들래요. 공작님이 그거 드시고 싶다고 하셨어요.”

“내가 만든 게 있는데, 좀 주랴?”

“어떻게 만드는지만 다시 한번 알려 줘요. 혼자서 만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얀에게 좀 물어보러 왔던 거였어요.”

얀 헨릭은 아체리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 구깃구깃한 종이를 한 장 가지고 나왔다. 그가 풋자두 절임 만드는 방법을 써 주는 동안, 아체리아는 손때가 제법 묻은 테이블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요즘에는 손님이 좀 많은 모양이에요, 얀?”

“말도 마라. 네가 그렇게 요란하게 마렌을 팔고 간 뒤로 오는 사람마다 마렌만 찾느라 난리법석이다. 덕분에 우리 가게 대표 메뉴가 마렌이 돼 버렸지.”

“뭐 어때요, 마렌 맛있잖아요. 얀이 이따금 만들어 주는 양고기 마렌도 정말 맛있었는데.”

“다음번에 놀러 오면 한번 만들어 주마.”

“약속한 거예요.”

* * *

닐스는 입맛이 쓴 표정으로 시드레 백작저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주인인 시드레 백작은 그가 왔다는 소식에도 금세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므로 닐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텅 빈 응접실에 덩그러니 앉아 호화찬란한 장식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자신이 물정 모르는 촌것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떨치기 힘들었다. 이래 봬도 엄연히 공작가의 피를 이은 인물이거늘, 후작령은 그의 허영을 채워 주기에 너무나 좁고 또 검소한 곳이었다.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군요.”

닐스가 응접실을 두 바퀴째 돌았을 때쯤, 드디어 시드레가 얼굴을 내밀었다. 연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한 떨기 장미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 뒤에 어떤 얼굴이 숨겨져 있는지 아는 닐스로서는 솔직하게 감탄할 수도 없었다.

“공사가 다망한 모양이오, 시드레 백작.”

뼈 있는 한마디에 시드레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물론이지요.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보수파의 입지가 너무나 좁아지지 않았습니까? 끈 떨어진 신세가 된 분들이 오죽 많아야죠.”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러니 더욱 궁금하던 참이오.”

“뭐가 말인가요, 후작님?”

“그대가 새로이 즉위하신 필리파 폐하의 숙청 대상에 들지 않은 것이.”

노골적인 직언에 시드레는 기분이 약간 상한 듯 코끝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닐스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아무래도 한때 대공 전하와 혼삿말까지 있었던 저이니, 폐하께서도 섣불리 어찌하시지 못하는 거 아닐까요?”

“그 대공 전하께서 백작을 내치셨음에도?”

“내치시다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시드레가 날카롭게 반박했지만 닐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그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다 하는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주워들은 것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시드레 백작이 에른스트로부터 대놓고 망신을 당했다는 일이라든지…….

“소문이 자자하던데. 대공께서 직접 그대를 찾아와 두 번 다시 눈앞에 띄지 말라 했다고.”

“듣는 귀가 좋으시군요, 후작님. 하지만 다 지나간 얘기죠.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 대공 전하께서는 제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실 분이 아니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드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도무지 감정을 숨기기 힘들어 보였다. 닐스는 그런 시드레를 속으로 비웃으면서 소파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별 이유 없이 남의 집 문턱을 드나들기도 슬슬 민망해지려는 참이니 이제 말해 주지 않겠소?”

“뭘 말인가요?”

“날 끌어들여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정확한 계획 말이오.”

화가 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시드레의 표정이 돌연 표변했다. 평소보다 화장을 짙게 해, 잘 익은 버찌처럼 새빨간 입술이 못된 꾀를 꾸미는 듯 실룩거리다가 광대뼈 가까이까지 올라갔다.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이봐, 난 그대와 장난을 할 마음이 없소.”

“저도 장난을 하고 있다고는 말씀드린 적 없어요, 후작님. 사실 이 일에 있어 저보다 진지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야말로 비스몽트 공작이 그 자리에서 굴러떨어져 아무것도 없는 신세로 전락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요.”

에른스트와 클라우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던 것은 이미 끝났다. 시드레는 이제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모욕을 준 클라우스를 어떻게 끝장낼 것인가, 그것에만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닐스는 시드레 백작의 그런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클라우스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이를 갈고 있단 말인가?

“대체 클라우스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시드레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눈동자를 위쪽으로 천천히 굴렸다.

“절 모욕하셨다고만 해 두죠.”

“그 녀석이?”

“왜요, 그래도 조카라고 역성이라도 들고 싶으신가요? ‘그럴 녀석이 아니다’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시드레는 웃고 있었지만 튀어나오는 말은 날카로웠다. 닐스는 미심쩍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자신이 깊이 관여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이나 알 이유가 없는 정보였다.

“클라우스…… 비스몽트 공작님은 매우 독특한 분이죠. 후작님은 그의 외숙부이시니 아마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어떤 점에서 독특하다는 거요?”

“모든 점에서요. 요즘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특히 그렇죠……. 그분이 공작이 되고 난 후 몇 년 동안이나 사교계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는 걸 아시나요?”

“내가 알 리 있었겠소?”

시드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또다시 비웃음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닐스는 지적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던 분이 어느 날인가부터 왕궁 연회에도 적잖이 얼굴을 비치게 되셨죠……. 게다가 이제는 폐하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리고요. 필리파 폐하께서 선왕의 비밀스런 유지를 이어받을 때 대공 전하와 함께 증인으로서 참석하기도 했고요. 대체 왜 그럴까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귀족이라면 응당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게 마땅하지 않소.”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다른 이유라니?”

“예를 들면……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거나.”

닐스의 미간이 의아한 빛을 띠며 찌푸려졌다.

“보호라니? 누구를?”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을 만나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후작님?”

“그 빨간 머리 여자 말이오?”

“네, 맞아요. 그 요리사의 이름은 아체리아 클링이라고 하는데, 그녀가 수석 요리장이 된 후부터 비스몽트 공작님의 행보가 아주 많이 달라지셨죠……. 그리고 놀랍게도, 필리파 폐하께서 왕녀이실 시절 베푸셨던 연회에 그녀를 대동하시기까지 했답니다.”

닐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던 그가 괴상한 모양으로 입가를 찌푸렸다.

“요리사를 연회에 대동해……? 무슨 자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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