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클라우스의 외숙부라는 사람이 공작저에 기약 없이 머물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 아체리아는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저녁 식사는 아마 엉망이었을 것이다. 주방으로 돌아와 요리사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면서도 아체리아의 신경은 줄곧 조용한 식당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외숙부님이라는 분이 요리장님을 내보냈다고요? 왜요?”
프레드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아체리아로서도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 황당한 말을 면전에서 들은 것도 처음이었거니와, 대관절 서로 초면인 마당에 자신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그의 반응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내가 싫은 모양이던데요.”
“우리 공작님께서 겨우 즐겁게 식사를 하실 수 있게 됐나 했더니만.”
도미닉이 말했다. 아체리아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숙부라는 사람이 언제 떠날지는 모르지만, 떠나기 전까지 클라우스가 마음 편히 식사할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아체리아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불편함을 견디며 꾸역꾸역 뭘 먹다가 탈이 날 가능성도 높았다.
‘아니면 전처럼 아예 드시지 않게 된다든가…… 그럴 수도 있지. 이건 말도 안 돼! 제대로 식사를 하게 되신지 겨우 반년도 안 되었는데!’
이제 와서 클라우스가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살이 붙고, 체격도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한 이 마당에 다시 첫걸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웬 말이란 말인가. 청천벽력이었다.
“아체리아.”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호즈만이 조용히 아체리아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집사장님?”
“오늘 공작님께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셨다.”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접시 위에 음식이 그대로 있더군요. 집사장님, 그 외숙부님이라는 분은 대체 뭐 하는 분이신 거예요? 여긴 왜 오셨고, 언제까지 계실 거래요?”
호즈만은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건지, 아니면 모르겠다는 건지 그저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일이었다.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듯하구나.”
“그분 때문에 공작님께서 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시게 되면 어떡하지요?”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게다. 그러니 네가 공작님을 좀 더 잘 보살펴 드리면 좋겠구나. 번거롭겠지만, 밤중에 편하게 드실 수 있는 야식을 좀 준비해 다오. 요즘은 늦게까지 깨어 계시니 더욱 허기가 지실 게다.”
“그렇게 할게요.”
“고맙구나.”
호즈만은 아체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주방을 나갔다. 부모가 모두 죽고, 친척조차도 저런 별 볼 일 없는 인간뿐인 클라우스를 마치 자신의 손자인 양 보살피는 호즈만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클라우스는 진작에 큰 병을 얻었을지도 몰랐다.
아체리아는 이미 정리가 끝난 조리 도구들을 다시 내려 곧장 야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텃밭에서 작은 호박을 하나 따 푹 삶은 다음, 꿀을 넣고 달콤한 포타주를 만들었다. 클라우스가 만든 빵 중 남은 것도 다시 데우고 그 사이에 크랜베리 소스와 버터를 발랐다.
야식이 준비되자, 아체리아는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아마 그 외숙부라는 사람은 공작의 침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객실에 머물고 있으리라. 들켰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아체리아의 움직임은 마치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신중했다.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소파에 앉은 채 이마를 싸쥐고 있던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 식사를 제대로 못 하셨잖아요. 배가 고프실 것 같아 간단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가 내려놓는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맛은 전혀 없었지만, 달큰한 호박 포타주 냄새를 맡으니 뱃속이 조이는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번거롭게 했군.”
클라우스가 허탈한 듯이 말하자 아체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세요? 공작님께서 식사도 못 하시고 배고픔과 싸우며 꾸역꾸역 잠을 청하시는 꼴은 못 보죠.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그렇게까지 과장할 필요가 있냐고 물으려던 클라우스는 그저 픽 웃기만 하고는 스푼을 들었다. 스트레스만 꽉 차 있는 것 같던 빈속에 따뜻한 수프가 들어가자 온몸에 온기가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맛있어.”
“정말이세요? 다행이다. 전에 호박 포타주는 별로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서 걱정을 좀 했는데.”
“그때보다 맛있어.”
“만드는 방법은 똑같은데도요?”
클라우스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시기의 클라우스는 어떤 음식이건 기껍게 먹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체리아가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무엇이건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 외숙부님이라는 분은…….”
말없이 빵을 씹던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떤 분이신 거예요?”
“물어볼 줄 알았지.”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릴게요.”
클라우스는 다시 수프를 한 입 떠먹은 다음 깨끗한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못 해 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리 유쾌한 것도 못 되었기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분은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동생이시다. 내가 알기로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엥글턴 후작가의 데릴사위가 되셨다지. 선대 공작이었던 내 아버지처럼, 결혼을 함으로써 작위를 얻은 거야.”
“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분이에요. 공작저에 자주 오신 적은 없는 거지요?”
선대 비스몽트 공작이 살아 있을 때는 공작저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나밖에 없는 외숙부라면, 그리고 관계가 퍽 친밀했다면 아체리아도 한두 번쯤 얼굴을 보았을 법한데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래. 거의 오지 않으셨지. 내가 자란 후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으셨고. 그래서 나도 엥글턴 후작령이라는 말을 듣고도 금방 기억해 내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그런 분이 왜 갑자기 공작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클라우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글쎄, 나도 이제부터 그걸 좀 알아봐야 할 참이야.”
“그리고, 아까 식당에서는…….”
“외숙부님은 내 외조부와 매우 비슷한 분이다, 아체리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리송한 질문이었다. 그의 외조부인 17대 비스몽트 공작을, 아체리아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에른스트로부터, 그리고 또 클라우스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들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당연히 어린 시절의 클라우스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던 것이었다. 그 사람 때문에 클라우스가 음식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도 생각이 났다.
그런 사람과 비슷하다면…….
“……그분도 공작님을 괴롭히셨던 거예요?”
“글쎄. 나름대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어린애를 괴롭히는 데에 무슨 이유가 있어요? 그건 그냥 못된 짓이죠!”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말이야, 외숙부님 입장에서는 좀 다르게 생각하실 거야. 왜냐면 내 존재가 그분의 앞날을 송두리째 막아 버린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냉소적이었다. 그의 여러 가지 표정을 보아 온 아체리아마저도 생소하게 느낄 정도로.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그것도 아주 경멸스러운 누군가를 언급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앞날을 막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생각해 봐.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 자리에 누가 앉아 있겠어?”
잠시 눈을 깜빡이던 아체리아는 그제야 작게 신음하는 소리를 내었다. 클라우스 이외의 비스몽트 공작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있어, 클라우스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럼, 공작님께서…… 공작 자리를 차지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공작님을 미워하시는 거란 말씀이신가요?”
“미워하고도 남을 합당한 이유지. 설상가상 나는 아주 옛날부터 몸이 약했으니, 외숙부님께는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는 시간이 아니었겠어? 이제나저제나 내가 죽을 날만 기다렸던 사람에게는 말이야.”
잔인하게까지 들리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클라우스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무심한 태도로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어 삼킨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소공작으로서 일찌감치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는 공작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잠깐만요, 그럼 설마…… 공작님께서는 그분이 공작님의 자리를 노릴 거라 생각하신단 말씀이세요?”
“내가 외숙부님 때문에 피가 말라 죽어 버리면 다음 대 비스몽트 공작이 될 분은 한 사람뿐이니까.”
아체리아의 얼굴에 화난 기색이 드러났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목숨을……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지 말라고요.”
“화났어?”
“말이라고 하세요? 당연히 화나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참지 못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는데도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뜻밖에도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봐.”
클라우스가 말했다. 머뭇거리던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곧 남자치고는 가녀리게 느껴지는 팔이 아체리아의 어깨를 감쌌다가 허리를 안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화 풀어 주려고.”
“이런다고 화가 풀릴까요?”
“글쎄. 안 풀려?”
“당연히 안 풀리죠.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마세요.”
“‘얼렁뚱땅’이라. 말이 재밌네.”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가까이에 닿은 아체리아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특유의 윤택 덕분에, 불빛을 받은 빨간 머리는 평소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못 믿겠어요. 앞으로 또 공작님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실 걸 생각하니까 화가 치민다고요.”
“먹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탈이 나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기진 게 나으니까.”
“그러다가 또 쓰러지시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러기 전에 네가 이렇게 날 구해 주겠지.”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아체리아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클라우스의 손을 새침하게 뿌리치면서 토라진 표정을 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금방 해결하도록 노력해 볼게.”
“제가 그분 앞에서 접시를 깨면서 난동 부리기 전에 그렇게 해 주세요. 이대로 공작님을 자꾸 괴롭히면, 정말 그렇게 해 버릴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