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호즈만의 말을 들은 클라우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마치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그게 누구였더라’ 하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옛날의 기억 중 한 조각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외숙부라니. 그가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하도 오랫동안 소식을 들은 일이 없어 그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외숙부님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분이 갑자기 공작저에는 왜 오셨지?”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아체리아와 단둘이 있을 때처럼 부드럽고 낮지 않았다.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목소리는 누군가를 찌르고, 다시 돌아와 클라우스 자신을 찌를 것처럼 초조하게 들렸다.
“정확한 말씀은 공작님께서 들으시는 것이 옳을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호즈만은 이마에 흘러나온 비지땀을 연신 닦아 내고 있었다.
호즈만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공작저에 충성을 바쳐 온 그는 엥글턴 후작, 즉 닐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누나 부부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이따금 선대 공작 부부와 마주칠 때마다 분위기가 얼마나 냉랭해졌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것도 호즈만을 초조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클라우스에게 호감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그가, 공작저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늙은 집사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식당으로 모셔라.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겠다.”
“잘 알겠습니다, 공작님.”
호즈만이 가 버리고 난 뒤, 클라우스는 한숨을 쉬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체리아는 호즈만이 가자마자 조심스럽게 클라우스 쪽으로 다가갔다.
“공작님,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군. 오늘은 식사를 제대로 못 할지도 몰라.”
“외숙부님이라니, 대체 어떤 분이세요?”
클라우스는 또다시 기묘한 표정을 띤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랬다. 아체리아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도록 튕기자 그제야 눈을 깜빡였지만 정신은 여전히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설명할게.”
“전 오늘 함께 식사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혹시 기뻐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렇지는 않은데요.”
그러자 클라우스는 별안간 몸을 기울여 아체리아의 뺨 한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 그런 거면 됐어. 식사를 부탁하지.”
아체리아는 시종들을 불러 미리 준비해 놓은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식당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클라우스는 옷을 갈아입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테이블에는 낯선 사람 한 명이 이쪽을 등진 채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셔츠를 갈아입은 클라우스가 식당으로 내려왔다. 머리까지는 미처 다듬지 못해서 평소보다 덜 까다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외숙부님.”
클라우스의 말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닐스가 일어섰다. 그는 짐짓 반갑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클라우스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오랜만이구나, 조카야.”
“기별도 없이 오셔서 놀랐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더 빨리 환영을 해 드렸을 텐데.”
왜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한 거냐고 타박하고 있음을 알아챈 사람은 아체리아뿐이었다. 닐스는 클라우스의 말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뼈를 알아차렸는지 못 알아차렸는지, 그저 껄껄거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나더구나.”
“제 생각이 나셨다고요?”
“그래. 이렇게 살아서 만나는 것도 사실 뭣보다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장성한 너를 보게 되리라고 누가 기대를 했겠느냐 말이다. 아니 그러하냐?”
클라우스의 입매가 뒤틀리듯 삐딱하게 올라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체리아는 그들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적어도 클라우스 쪽에서는 그런 것 같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지금 이 만남이 유쾌하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클라우스의 외숙부라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클라우스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공작저의 회랑에는 역대 공작과 공작 부인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보았던 클라우스의 외조부와도 생김새가 무척 비슷했다.
번득거리는 것 같은 눈매며 뚜렷한 콧대, 까다롭고 엄격해 보이는 시선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클라우스의 경우에는 그보다 좀 더 선이 가느다랗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분위기만 놓고 보았을 때는 어느 누구도 그들이 혈육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요즘도 툭하면 쓰러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닐스가 자리에 앉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클라우스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공작이라는 자리가 네게 부담이 클 것이라는 건 나도 짐작했던 바다. 너는 옛날부터 도저히 큰일을 할 만한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원체 약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렇게 살아 있으니 일견 어엿한 가주로도 보이기는 하는구나.”
“식사부터 하시지요, 외숙부님.”
클라우스는 속이 불편한 사람처럼 입매만 당겨 웃음을 지어 보인 뒤 아체리아를 향해 눈짓을 했다. 뒤쪽에 대기하고 서 있던 아체리아가 테이블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요리를 설명했다.
“오늘의 만찬 메뉴는 푸른 올리브를 곁들인 닭 요리입니다. 레몬 껍질 절임의 상큼한 풍미와, 향신료를 많이 쓰지 않은 담백한 소스가 잘 어울리지요. 또한 수프는…….”
“잠깐, 잠깐.”
닐스가 손을 들어 아체리아의 말을 막았다. 아체리아는 당황했다. 그가 단순히 말을 막은 것만이 아니라, 마치 불쾌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거냐?”
“지금부터 드실 요리가 무엇인지 설명을…….”
“나는 요리사 따위에게 질문하고 있는 게 아니다. 클라우스, 이게 뭐 하는 거냐? 네가 말해 봐라.”
‘요리사 따위’라고?
아체리아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에 놀라서 뭐라고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클라우스도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아체리아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수석 요리장의 설명입니다, 외숙부님. 어떤 요리가 나오는지, 무엇이 들어갔는지…… 제 아버지께서도 이 과정을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자형은 먹는 것을 워낙 좋아했다지만 너까지 이렇게 음식에 연연하며 분별없이 구는 것이냐?”
“연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뭘 듣고 서 있는 건가? 당장 물러가지 않고! 감히 요리사가 주인의 테이블 옆에 서서 중얼중얼 떠들고 있다니 말이나 되는가! 공작저의 기강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이번에는 아체리아를 향한 말이었다. 당혹한 아체리아가 클라우스를 흘끔 바라보고 물러가려는 듯 고개를 숙이자, 클라우스가 말했다.
“가지 마, 아체리아.”
“클라우스, 지금 뭐라 했느냐?”
클라우스는 닐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아직 갈무리하지 못한 불안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요리는 접시 위에서 하릴없이 식어 가고 있었다.
“외숙부님, 공작저의 기강을 어떻게 바로잡을지 결정하는 것은 가주인 제 몫입니다. 외숙부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나는 집안의 어른이다. 이 집의 주인이 너라고는 해도, 너는 어른을 대하듯 내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클라우스. 내 아버님의 가르침을 잊은 것이냐? 식도락을 즐기는 자들은 결코 고귀하다고 말할 수 없어. 자고로 귀족이라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하는 것이다. 구구절절, 끼니때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만 하며 돼지처럼 킁킁대는 게 아니라!”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황당한 소리에 아체리아마저도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클라우스가 이 당혹스런 폭언에 한마디도 제대로 대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대꾸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설명을 듣는 정도로…… 그렇게 반응하실 건 없지 않겠습니까.”
클라우스는 이미 외숙부의 기세에 눌려 한풀 꺾인 것 같았다. 기가 센 것 빼면 시체일 지경인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아체리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을 골라 모자를 벗었다.
“실례했습니다, 후작님. 그리고 공작님. 식사를 편히 하실 수 있도록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닐스는 콧방귀를 뀌며 빨리 꺼지라는 듯이 아체리아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클라우스도 이번에는 아체리아를 붙잡지 못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식기를 들지도 못한 채 입을 일자로 다물고만 있었다. 접시 위의 음식들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귓가에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호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대고 있었다.
닐스는 제 아버지를 꼭 닮은 인물이었다. 어쩌면 클라우스보다 먼저 그에게 학대를 당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지 몰랐다.
어린 시절, 이따금 닐스와 단둘이 식사를 할 일이 있을 때면 클라우스는 늘 체기에 시달리곤 했다. 할아버지처럼 음식을 적당히 먹으라며 윽박지르는 것은 물론이었거니와, 클라우스의 행동 하나하나를 사소하게 트집 잡아 빈정거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뭐 하느냐? 설마 아직도 식기 쥐는 법을 다 익히지 못한 건 아니겠지, 조카야.”
이 인간을 어떻게 잊고 지냈던 걸까 싶을 만큼, 기억은 빠르게도 클라우스의 머릿속으로 되돌아왔다. 엥글턴 후작령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단번에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만남이 뜸했던 게 다행이었다. 이런 자와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내야 했다면 자신은 진작에 미쳐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아닙니다, 오늘은 입맛이 별로 없군요.”
“쯧, 네 녀석은 옛날부터 그랬지. 와구와구 먹어 대는 것도 꼴사납지만, 사내 녀석이 모이 쪼는 새마냥 깨작거리는 것도 결코 좋은 꼴은 아니다. 공작답지 못한 일이지.”
잘 먹어도, 안 먹어도 트집을 잡아 타박을 한다. 클라우스는 맛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식사를 하면서 스스로가 이젠 무력한 어린애가 아님을 상기하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너는 몸이 약하니 식사는 제때 해야 그나마 가주 노릇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가주가 병에 걸려 골골거리고 있는 가문을 어느 누가 귀하게 여기고 두려워하겠느냐 말이다.”
닐스는 클라우스가 제대로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자신의 말을 쏟아 내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다. 시드레 백작저에서는 실감하지 못했던, ‘공작저를 손에 넣는다’는 욕망이 그의 못된 성미를 한껏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