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어찌저찌, 클라우스의 힘만으로도 반죽은 적당히 완성이 되었다. 반죽을 발효시키는 동안,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물 묻힌 타월로 닦아 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반죽을 손이 아니라 얼굴로 하셨어요?”
“조용히 해.”
클라우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고작 빵 반죽 하나에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신열이 오른 사람처럼 양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빵 하나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 아셨으니, 앞으로 빵 드실 때마다 요리사들의 노고를 좀 더 생각해 주시겠죠?”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가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마다 그 한 끼를 만들기 위해 요리사들이 어떤 노고를 거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귀족인 클라우스는 특히 더했다. 접시에 올라오는 삶은 감자는 솥뚜껑을 열면 늘 따뜻하게 준비가 되어 있을 것 같고, 스튜나 찜 같은 것들도 언제나 당연스럽게 나오는 것일 뿐, 누군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실감이 잘 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빵은 안 구워?”
“바로 굽지 않아요. 한 번 발효를 시켜야죠.”
“그럼 그동안에는 뭘 하는데?”
“음…… 글쎄요. 오늘은 그린 올리브를 곁들인 닭고기 요리를 할 생각이었으니, 그걸 준비해야죠.”
아체리아는 곧 준비해 두었던 재료들을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양파와 껍질을 벗긴 닭, 올리브 오일과 마늘, 병아리콩…… 사프란 같은 비싼 재료도 있었다.
클라우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체리아가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양파 한 개를 금세 썰어 기름에 볶기 시작하자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기가 주방에 퍼졌다. 거기에 마늘을 더하니 아까 점심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식욕이 당겼다.
“공작님은 옛날에 구운 양파를 엄청 싫어하셨죠.”
아체리아가 놀리듯 말했다.
“양파를 먹고 나면 입에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사실이긴 하잖아. 식사하고 난 뒤에 이를 닦고 입을 헹궈도 양파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싫었어. 지금도 별로 좋아하진 않아.”
“코가 예민하셔서 그래요. 보통 후각이 민감한 사람들은 미식가가 되는데, 어쩌다 이렇게 편식하는 공작님이 되셨는지는 모를 일이지만요.”
아체리아가 킥,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클라우스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조리대 위에 턱을 괸 채 요리하는 아체리아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양파와 마늘을 볶는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리 끓여 놓은 육수가 등장했다. 이맘쯤이 되었을 때 주방으로 내려온 요리사들은 주방에 클라우스가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기함을 했다.
“아니, 공작님!”
앞장서서 들어오던 프레드가 외치자 다른 요리사들도 웅성거리며 그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밀가루와 물 자국으로 지저분해진 셔츠를 입고 있는 클라우스를 보고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공작님께서 왜 여기에…….”
“오늘 공작님께서 구우신 빵을 맛볼 수 있을 거예요. 오늘 저녁은 손이 많이 가지 않으니 내가 준비할게요. 프레드, 사람들을 데리고 다른 쪽 주방으로 가서 내일 쓸 재료들을 준비해 주겠어요?”
“아니, 요리장님.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러 갈게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그나마 눈치가 좀 있는 프레드는 공작과 아체리아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편이었는데,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면서도 ‘이래도 괜찮나’ 하는 표정이었다.
“엉큼하긴.”
클라우스가 농담을 하자 아체리아는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뭐가 엉큼하다는 겁니까?”
“나랑 둘이 있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잖아.”
“그걸 지적하시는 게 훨씬 더 엉큼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클라우스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못 들은 척 어깨만 으쓱였고, 그 얄미운 태도 때문에 아체리아의 눈총을 한차례 받아야만 했다.
불에 올려놓은 솥 안을 한 번 들여다본 아체리아는 아까 클라우스가 만들어 놓은 반죽을 꺼냈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 두 배 정도로 부푼 반죽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던 클라우스의 손에 작은 칼을 하나 쥐여 주었다.
“초보자는 칼을 쓰면 안 된다면서?”
“이건 정말 쉬우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자, 이렇게…… 반죽 위를 한 번 그어서 칼집을 내 보세요.”
클라우스는 영 생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칼끝을 서툴게 반죽에 갖다 대었다. 힘 조절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칼집을 낸다기보다는 반죽을 가르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럭저럭 아체리아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 나오기는 했다.
“이제 구우면 돼요.”
“이게 끝이야?”
“왜요, 너무 쉬운 것 같으세요?”
쉽다면 쉬웠지만, 반죽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또 결코 쉽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칼을 내려놓고 셔츠에 말라붙은 밀가루 조각을 툴툴 떼어 내었다.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는 냄새와 육수가 끓는 냄새가 주방에 진동을 했다. 냄새만 맡아도 혀끝에 감칠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체리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육수 솥을 들여다보고는, 상큼하게 절여 놓았던 레몬 껍질을 몇 개 꺼내어 얇게 썰었다.
“절임 같은 것도 다 네가 만들었나?”
“설마요. 이런 건 오래 묵혀야 하는 것들이 많으니까, 지금 드시는 것들은 대부분 얀 헨릭이 만든 것들이에요. 새로 몇 가지 만들긴 했지만, 아직 열진 않았어요.”
“옛날에 얀 헨릭이 자두 절임을 한 번 만들었던 것 같은데.”
“풋자두 절임! 그거 정말 맛있죠. 좋아하세요?”
“아니, 좋아하진 않았어. 하지만 오랜만에 생각을 하니 먹고 싶군.”
아체리아는 내일 당장 시장에 가서 풋자두를 한아름 사 와 절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동안 싱그러운 녹색 올리브도 꼼꼼하게 반으로 잘라 씨를 빼냈다. 껍질과 올리브를 함께 익히자 육수와는 또 다른 상큼한 향기가 났다.
한창 요리 중인 주방을 처음 겪어 보는 클라우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체리아가 말한 것처럼, 그는 편식은 심했지만 후각이 예민했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다 한데 어우러지는 냄새를 즐기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클라우스가 요리하는 그녀를 구경하는 동안, 아체리아는 뒤에 앉아 있는 그를 의식하면서 간간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을 했음에도, 아체리아를 대하는 클라우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툭하면 신경질을 부리곤 하던 예전과는 딴판이었다. 아체리아가 은근슬쩍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클라우스는 단지 ‘꾸준히 먹으니까 짜증이 덜 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자신에게만큼은 없는 인내심을 다 끌어모아 발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런 사소한 배려를 겪을 때마다 클라우스에 대한 호감도도 함께 올라갔다. 아직 사랑을 논할 단계까진 아니라고 해도, 그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만약 귀족이 아니었더라면 이쯤에서 연인이 되었겠지.’
늘 아체리아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그가 공작이라는 사실뿐이었다. 클라우스가 만약 공작저의 평범한 시종이었다면, 요리사였다면, 재료를 배달하는 상인의 아들이었다면 아체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와 사랑에 빠져 보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을 때마다 그녀는 늘 문턱에 발이 걸리는 듯한 철렁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가 거대한 구멍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따금은 등골이 서늘하기도 했다.
‘그 대단한 귀족들 틈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 난.’
자신은 그냥 요리를 하고 싶었다. 맛있는 것을 만들고, 먹고,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공작 부인이 되면 그런 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대공 전하나 란츠호프 아가씨 같은 분들만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체리아는 또 한 번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븐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빵이 거의 다 익은 것 같았다. 때마침 아체리아의 요리도 완성이 되었다. 닭고기 위에 소스를 끼얹은 아체리아는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플레이팅을 했다.
식사를 위해 클라우스가 식당으로 가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호즈만이 주방까지 달려와 그를 찾았다. 클라우스는 호즈만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음을 깨닫고 금방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호즈만? 무슨 일이 생겼나?”
“저…… 공작님, 공작님 앞으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고? 아체리아와 클라우스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아체리아가 말했다.
“몇 분이나 오셨어요, 집사장님?”
“한 분이란다, 아체리아.”
“아, 그럼 다행이네요. 요리는 넉넉하겠어요.”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와 호즈만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누가 온 거지? 에른스트? 릴리엇?”
호즈만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닙니다, 공작님. 그분들이 오셨더라면…… 아니요, 대공 전하나 란츠호프 후작가의 영애께서 오신 게 아닙니다.”
“대체 누가 왔기에 이러는 거야? 누가 왔나, 호즈만? 말하게.”
호즈만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클라우스는 설마 시드레 백작이 왔는가도 생각했지만, 단지 그 정도 이유로 노련한 집사인 호즈만이 이렇게 뜸을 들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저, 공작님. 엥글턴에서…… 엥글턴 후작령에서 오신 분입니다.”
“엥글턴 후작령이라고? 거기가 어디지?”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호즈만은 불안에 떠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윽고 클라우스의 말에 대답을 했다.
“엥글턴 후작령의 후작님…… 공작님의 외숙부께서 오셨습니다. 이곳 공작저에서 한동안 머물다 가실 예정이라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