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얘긴가?”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부인께서는 2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시드레 백작의 말에 닐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래, 그렇소.”
“그렇다면 더 이상 그 가문에 볼일이 없으신 것 아닌가요? 엥글턴 후작이라는 이름보다는, 비스몽트 공작이라는 이름이 더 탐나지 않으세요?”
“이미 19대 비스몽트 공작의 자리는 내 조카가 차지했소. 그걸 모르고서 하는 소리는 아닐 테고, 내 조카가 내일 당장 죽는다는 희소식이라도 갖고 있는 거요?”
시드레는 닐스의 말에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도 신경질적이고 불쾌하게 들려서, 닐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다행이네요.”
“대관절 뭐가 다행이라는 말이오?”
“아직 욕망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시드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주변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기지개를 켜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공작새 같기도 한 모습에 닐스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시드레가 말했다.
“전 후작님께 비스몽트 공작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라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도…… 후작께서 새로운 비스몽트 공작이 되실 길은 여러 가지가 있죠. 가령…….”
“…….”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이, 귀족으로서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경원시하고, 귀족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면 당연히, 새로이 비스몽트 공작가를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하게 되겠죠.”
“수도의 귀족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요? 그들에게 있어 가문에서 내쳐진 자식은 지나가는 농부보다도 못한 취급이지. 하물며 직계 혈통인, 그것도 공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자를 고작 지어낸 말 몇 마디에 내친다? 시드레 백작, 나를 이런 자리까지 불러낸 대담성은 인정하지만 몽상 속을 헤매는 것 같군.”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이었지만 시드레는 하인들 앞에서 으레 그러는 것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것만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울컥한 심정을 추스르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 시드레는 또 한 번 돌연한 웃음을 띠면서 닐스를 바라보았다.
“이따금은 몽상 속을 헤매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답니다. 현실 속에 갇혀서, 만족할 수 없는 환경에 안주하는 것보다는요.”
“날 비웃는 거요?”
“그럴 리가요. 그저 사실을 일깨워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후작님께서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과거에만 얽매이시는 것 같기에.”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닐스는 자신이 시드레가 쳐 놓은 덫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단호히 걷어차기에 그는 과단성이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클라우스를 미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 병약한 것이 어릴 적 모두의 생각대로 죽어 버리기만 했더라면 지금 그 자리는 자신의 차지가 되었을 텐데.
클라우스의 외조부인 17대 비스몽트 공작은 까다롭고 냉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런 증상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벼락같이 분노했고, 실수한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였다. 닐스가 일찌감치 아버지의 눈 밖에 났던 것은 사실 모두가 그의 잘못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뭐라고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으니까.
그러나 17대 공작은 무슨 일인지 아들을 사사건건 괴롭히고 미워했다. 그 위의 누나, 즉 클라우스의 어머니였던 딸에게는 그러지 않았건만.
‘결국 나를 내쫓고 들인 것이 그 멍청한 인간이었다니.’
닐스는 열네 살에 엥글턴 후작가의 데릴사위가 되어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3년 만에 누나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자형 역시도 데릴사위로 공작가에 들어온 것이라는 말에 닐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자형이 아버지와 사사건건 맞지 않아 미움을 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늙은이가 결국에는 혈육을 내쫓고 자충수나 두었구나.’
그렇게 비웃기도 했지만, 닐스의 원한은 풀리지 않았다. 이윽고 클라우스가 태어났고, 닐스가 스스로 공작가에 대한 미련을 거의 다 저버렸을 때쯤 클라우스의 몸이 무척이나 허약하다는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닐스는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어린 조카가 어느 날 갑자기 병사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누나 부부에게서는 클라우스 이외 다른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으니, 만약 조카가 시기적절하게 죽기만 한다면 닐스는 언젠가 다음 대 비스몽트 공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이었다. 클라우스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 가면서도 결코 죽지 않았다.
“나를 불러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백작이 내게 물려 줄 만한 괜찮은 미끼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후작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해서요.”
“내가 뭘 도울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고, 엥글턴 후작가는 작위에 비해 영향력도 한미하기 짝이 없는 가문이오.”
“후작님께서는 전면에 나서실 필요가 없답니다. 사실, 우리 둘 중 누구도 그럴 필요가 없죠. 단지 후작님께선 수도에 머무시면서 얼굴과 이름을 착실히 알려 주시기만 하면 돼요. 누구보다 믿음직한,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보다도 훨씬 더 바람직한 귀족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만 하는 거죠.”
닐스는 시드레의 이야기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가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 줄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면서도 헛된 희망을 가지고 악착같이 매달릴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시드레는 그런 닐스의 속내를 다 짐작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이 가면처럼 웃는 낯을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수도까지 발걸음을 하셨는데, 조카의 안부도 묻지 않으시고 그냥 돌아가시려는 건 아니실 거잖아요? 비스몽트 공작도 하나뿐인 외숙부를 잠깐이나마 모시게 된다면 무척 기뻐하겠지요.”
그 말은 즉, 닐스에게 비스몽트 공작저에 머물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닐스는 시드레가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 보려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도무지 짐작 가는 구석이 없었다.
귀족들로 하여금 클라우스보다 자신이 더 비스몽트 공작가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믿게 하라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설령 자신이 훌륭한 예절과 재치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고 해도, 버젓이 살아 있는 공작을 밀어내고 저를 다음 대 공작으로 추대할 만한 정신 나간 사람이 있을까?
“후작님께서 이 일에 함께하시겠다 동의만 해 주신다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야 환영할 만한 이야기오만, 그러나 명심하시오. 이 일이 뒤집어졌을 때, 더 크게 책임을 져야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그건 염려 마세요.”
시드레는 무슨 자신감인지 그렇게 대답했다. 닐스는 다소 비겁한 방법으로나마 배수진을 치면서 시드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잊지 마세요, 후작님. 사람들의 호감을 사도록 하세요.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도록 하지요.”
“날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부랑아 취급을 하는군.”
“어머,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화가 나셨나요?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리려던 뜻은 아니었답니다.”
말을 마친 시드레는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닐스를 차분하게 문 앞까지 배웅했다. 닐스는 시드레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술 아래에 찍힌 조그만 점이 이상하리만치 눈에 들어왔다. 그 점은 시드레를 매우 애교 넘치는 얼굴로도 보이게 했지만, 간교해 보이게도 했다.
“그럼, 공작저에서 숙질간의 다정한 해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 몰아넣는 솜씨가 아주 뻔뻔하군.”
“비스몽트 공작을 미워하는 사람이 후작님 한 분뿐인 것만은 아니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더 이상 시드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닐스는 마치 그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이 헛웃음을 쳤다.
“미워하는 사람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닐스는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며 은근히 조소했다.
“비실비실한 것치고는 꽤 인기가 많았던 모양이구나, 조카야.”
* * *
외숙부인 엥글턴 후작이 아무도 몰래 시드레 백작저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을 무렵,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와 함께 주방에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놀랍게도 빵 만들기였다. 실제로는 요리를 해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아체리아는 초보자에게 칼과 불을 쓰게 할 수 없다며 빵 만드는 일을 거들어 달라고 말했다.
아체리아가 설명해 준 과정을 들은 클라우스는 ‘뭐야, 간단하군’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대충 밀가루를 치대고 반죽해서 굽기만 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밀가루를 반죽하는 일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저녁에 빵 드실 수 있겠어요?”
클라우스가 밀가루 반죽을 하는 동안 주방을 정리하고 있던 아체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한 덩어리의 반죽과 씨름하고 있는 클라우스는 두 손뿐만이 아니라 온 얼굴이 밀가루투성이였다.
그는 아무리 주물러도 도저히 반죽다운 반죽의 모양을 찾을 생각이 없는 엉성한 덩어리를 노려다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뭔가 잘못됐어.”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어요.”
“잘못되지 않았으면 이렇게 반죽이 안 될 리가 없잖아. 네가 뭔가 잘못 넣은 거야.”
“그 반죽을 만든 건 공작님이라는 거 벌써 잊으셨어요?”
“……그럼 네가 뭔가 잘못 가르쳐 줬을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 정말. 아체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들고 있던 밀대로 클라우스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톡, 쳤다.
“뭐 하는 짓이야?”
“제가 잘못 가르친 게 아니라, 공작님의 손힘이 너무 약하셔서 그런 거라고요.”
“얼마나 더 세게 주무르라는 거야? 반죽을 하는 게 아니라 밀가루의 목이라도 졸라 죽이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반죽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 보시든가요.”
클라우스는 얄밉다는 눈으로 아체리아를 쏘아보다가 다시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이라는 놈에게 목이 있었다면, 그 목을 졸라 숨통을 끊어 놓을 기세로 주무르고 밀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