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72)화 (72/144)

72화

어둠이 내리깔린 베르데사 왕성은 마치 폐허처럼 고요했다.

이따금 지나다니는 경비병들의 발소리를 제외하면 불 꺼진 복도를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리파는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를 양옆에 거느린 채 그 적막한 복도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마치 마지막 결전을 치르러 가는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에는 결연하고 차가운 빛이 어려 있었다.

“여기는 폐하의 처소로 가는 길이 아닙니까.”

에른스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필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뭐 문제라도 있나요?”

“이런 밤중에 폐하의 처소를 방문하여 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가 보면 알게 돼요.”

필리파는 끝내 에른스트와 클라우스에게 다른 설명을 해 주지 않은 채 왕의 처소로 그들과 함께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키고 서 있던 시종이 그들을 막았다.

“폐하께서는 이미 잠드셨습니다, 왕녀님. 내일 다시 방문해 주시지요.”

“지금 뵈어야만 한다. 급한 일이니 비켜라.”

“안 됩니다, 왕녀님. 필리파 왕녀님……!”

시종이 황급히 쫓아왔지만 필리파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왕이 있는 방까지 곧장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이 누워 있는 방은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보다 더 고약한 악취가 떠돌고 있었다. 약과 병의 냄새가 어지러이 뒤섞여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여서,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필리파는 왕의 병색과 악취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종들을 모조리 물린 뒤 방 안에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만 남겨 둔 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왕이 누운 자리 가까이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은 필리파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왕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그 정도의 자극마저도 왕에게는 두려울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잠에서 깨어난 왕은 눈앞에 서 있는 필리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듯 나직한 괴성을 질러 댔다.

“쉿, 아바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리파입니다.”

“필리파……?”

필리파 왕녀의 입가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는 어두운 방 한쪽에 선 채 필리파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말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말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곳으로 오는 내내 필리파에게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형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대로 베어 버리겠다는 듯이.

실제로 그녀는 옆구리에 가느다란 칼을 차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왕성 안에서 왕녀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으레 가지고 다니곤 하는 것이었지만, 에른스트는 오늘 필리파가 그 칼을 차고 나온 것이 왠지 습관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파…… 쿨럭! 필리파, 무, 물…… 물을…… 다오.”

“여기 있습니다.”

필리파는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물잔을 들어 왕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목 안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은 염증 때문에 왕은 단 몇 모금의 물을 넘기면서도 고문을 당하는 듯 괴로운 신음을 내질렀지만, 필리파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연민, 그 어느 쪽의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는 뒤에 선 채 필리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오늘 이 순간만을 위해 그간 침묵하며 몸을 낮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바마마,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허억, 무슨 말이냐…….”

“아바마마께서 거머리처럼 치료사들에게 들러붙어 늘린 목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누군가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에른스트인지 클라우스인지, 둘 다인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필리파는 개의치 않았다.

“내 어머니를 이용하고 버릴 때는 당신이 영원히 살 줄 알았겠지요.”

“필리파……!”

왕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굳어지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오로지 필리파의 눈에만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벌써 이것을 한 번 보았다. 아직 철없던 시절, 왕녀로 태어나 모든 것이 모자라지도 부족하지도 않던 시절.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절.

그녀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꼭 이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그런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왕이었다.

“아바마마께서 저를 필리파라고 부르실 때마다 그 혀를 갈가리 찢어 놓고 싶었습니다. 그 이름은 내 어머니가 주신 이름이지요. 감히 당신 같은 배신자, 왕관을 쓴 협잡꾼 따위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지금 무슨 말을……! 커, 흑……! 아무도, 아무도 없느냐!”

“이제 당신을 위해 달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시간부로 왕성의 모든 이들은 내 명령을 따라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왜냐하면…….”

필리파는 씩씩거리며 가슴팍을 움켜쥔 왕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그 손가락 사이에 펜을 쥐여 준 뒤,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종이를 꺼내었다.

고개를 숙인 필리파의 눈빛이 번득이며 빛났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왕의 베갯머리 가까이까지 입술을 가져다 댄 필리파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왕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컥, 으…… 흑! 허윽……! 아무도…… 아무도 없…….”

필리파는 부들부들 떨리는 왕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종이의 아래쪽에 가져다 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겨워하는 아버지를 돕는 안타까운 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에른스트와 클라우스 모두 알고 있었다.

힘없는 펜 끝이 종이 위를 스쳤다. 머리글자 하나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아래로 죽 미끄러진 펜은 그대로 왕의 손에 쥐어진 채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왕은 더 이상 힘겨운 숨을 들썩거리지 않았다.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경악과 놀라움, 회한으로 가득 찬 텅 빈 눈이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필리파는 갑자기 보는 사람이 섬뜩해질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무심히 돌아섰다. 그리고 클라우스와 에른스트 앞에 서명된 종이를 내밀었다.

에른스트와 클라우스는 놀라움으로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갑고 위엄 있는, 마치 사자의 등에 탄 듯한 당당한 표정을 지은 채 필리파가 말했다.

“선왕께서 죽어 가는 순간 남기신 마지막 명령을 받들어, 나는 베르데사의 21대 왕의 의무와 책임을 받아들일 것이다. 레이넌의 대공 에른스트, 그리고 비스몽트의 공작은 서거하신 선왕의 뜻을 증거하는 자가 되리라.”

에른스트와 클라우스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잠시 마주쳤다. 에른스트가 먼저 대답했다.

“선왕의 유지와 명령을 받들어, 레이넌의 대공 에른스트는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왕실과 국가를 수호하며 폐하의 뜻을 받들어 지키는 자가 되겠습니다.”

클라우스의 가쁜 숨소리는 필리파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군주란, 적절한 시기에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필리파는 더 이상 왕성의 구석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왕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순간 베르데사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 * *

병을 앓던 선왕이 서거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온 왕성과 수도에 퍼졌다.

그러나 사람들을 진정으로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선왕이 필리파 왕녀를 다음 대 왕으로 지정했다는 소식에 더욱 경악했다. 그런 왕녀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왕자와 왕녀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3왕자와 5왕자가 추방된 후 자신이 왕위에 앉으리라 생각하며 야심을 키우고 있던 이들이 그랬다. 그들은 한데 모여 필리파의 주장을 규탄했지만, 왕이 직접 서명한 문서를 들고 나타난 그녀와 대공의 증언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왕위를 차지한 필리파는 즉위식을 치르기도 전에 왕성의 귀족들을 차례차례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왕이 병든 틈을 타 세력 있는 왕자와 왕녀들에게 붙어 왕위를 차지할 것을 속살거리던 자들을 가장 먼저 쳐냈다.

그다음으로 희생된 자들은 보수파 귀족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수도에서 추방을 당했으며, 영지나 재산의 일부 또는 전체를 빼앗기고 구금당하기도 했다.

숙청을 진행하면서도 필리파는 결코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이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덫을 치고, 심문을 통해 스스로 그 덫에 들어오기를 유도했다.

결국 대부분의 보수파 귀족들은 억울하게 쫓겨나는 상황이 되어서도 필리파에게 항변은커녕 목숨만 붙여 줄 것을 애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폐하, 레이넌의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말을 전하자, 머리를 빗고 있던 필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문이 열리고 에른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녀의 시녀에서 이제 왕의 시녀가 된 타티아나가 에른스트를 보며 가볍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고, 에른스트는 필리파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너는 나가 보거라,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빗질하던 도구들을 챙겨 방을 나섰다. 필리파는 길게 풀어 내린 머리를 어깨 너머로 정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시지요, 사촌.”

필리파가 말했다. 에른스트는 잠시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가, 그녀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에른스트의 목소리는 약간 낮았고, 평소와 달리 피로한 듯했다. 그러나 필리파는 그의 기색을 아는 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즉위식에 대해 대공과 논의할 것이 있어서요.”

“준비에 미진한 점이 있으십니까?”

“아뇨.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어요. 란츠호프 후작이 앞장서서 준비를 해 주고 있지요. 지금의 후작은 물론이거니와, 곧 다음 대 후작이 될 그 딸에게도 기대가 큽니다. 세련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더군요.”

“보는 눈이 있는 자이지요.”

필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스트는 쓸데없이 긴장되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무릎 위로 얹었던 손을 꾹 움켜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