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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71)화 (71/144)

71화

레이넌 왕의 용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악화되어 갔다. 끝끝내 매달려 있던 치료사들마저도 하나둘씩 손을 놓기 시작하며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흔드는 지경이었다.

필리파는 자신의 궁에 앉아 외부의 모든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다. 궁 안에는 필리파가 궁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심어 놓은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나 얌전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그녀가 왕 옆에서 시중을 드는 시종까지 매수했다는 사실을 감히 짐작할 만한 사람은 왕궁 내에 한 사람도 없었다.

“왕녀님, 치료사가 왔습니다.”

타티아나의 짧은 보고에, 필리파는 들고 있던 부채를 내려놓으며 우아하게 손짓을 했다. 방 안에 있던 궁인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자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늙은 치료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필리파 왕녀님.”

치료사는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왕성에서 일을 한 인물이었다. 거의 60년에 가까운 세월을 왕의 치료사로 일하며, 필리파의 조부 대에서부터 신임을 받아 온 인물이었다. 이제는 노쇠하였다고 하나 병을 향한 그의 직감과 판단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필리파는 신뢰하고 있었다.

“앉게.”

치료사는 노구老軀를 느릿느릿하게 움직여 필리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차를 내어 오자, 주름투성이인 손으로 잔을 받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내가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는 아바마마의 용태를 염려하기 때문이네.”

필리파가 말했다. 치료사의 주름진 눈에 착잡한 물기가 맴돌았다.

“왕녀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는 며칠을 넘기시기 힘들 것입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신가?”

“몸의 부기가 염증이 되어 전신으로 번졌습니다. 토혈을 하시느라 밤낮으로 잠을 주무시지 못하니 이미 쇠약해진 몸이 더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백방으로 약을 써도 이제는 무효할 것입니다.”

치료사의 말을 듣는 필리파의 표정은 무심하고도 담담했다. 치료사는 그것이 슬픔을 갈무리하는 왕족들 특유의 버릇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순간 필리파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늙은 치료사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아바마마를 만나 보아도 좋겠나?”

“왕녀님을 알아보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네.”

“그러시다면 방문하셔도 좋으나, 꼭 명심하십시오. 다섯 마디 이상 말하시는 것은 어렵습니다. 후두부의 염증이 심각하여 숨만 쉬시어도 상처가 벌어지곤 합니다. 또한, 감정이 격해질 만한 화제는 절대로 삼가셔야 합니다. 심장 위로 열이 치밀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합니다.”

“……잘 알았네.”

치료사는 정중히 절을 한 뒤 필리파의 처소를 나갔다.

“타티아나.”

“네, 왕녀님.”

“대공과 비스몽트 공작에게 오늘 밤 입궁하라고 전갈을 보내라.”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내가 준비하라 일러두었던 것을 꺼내 놓아라.”

타티아나는 고개를 숙이고 즉시 물러갔다. 필리파는 치료사가 있을 때와는 달리 느긋한 태도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차가 반쯤 남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 * *

왕성의 연회에서 돌아온 이후, 아체리아는 더 이상 클라우스와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유를 궁금하게 여긴 클라우스가 몇 번이고 추궁해 묻기도 했지만 그녀는 침묵한 채 다만 이렇게만 말했다.

‘고용인이 주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잠시나마 여흥으로 즐기셨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 이 이상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공작님.’

클라우스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아체리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몇 분 동안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붙잡아 캐묻고 싶었지만 아체리아는 얄미울 정도로 클라우스를 잘 피해 다녔다. 식사 시간처럼 꼭 얼굴을 마주쳐야 할 때가 아니면 거의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휴식 시간에도 저택에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늘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식사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오면 둥지로 돌아오는 새처럼 훌쩍 돌아오고는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저녁 식사 때, 클라우스는 더 참지 못하고 아체리아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평소처럼 그에게 따박따박 대드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지금 이러는 거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이러는지 답답해 죽겠으니까 차라리 할 말이 있으면 다 해 버려.”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클라우스는 화가 난 표정으로 아체리아를 한참 쏘아보다가 입가를 닦은 냅킨을 테이블에 팽개쳤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벌떡 일어선 그의 서슬에 아체리아는 잠시 발끝을 움츠렸지만 진심으로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뭐 어쩔 것인가? 힘은 아체리아가 더 셌다.

물론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상대로 완력을 행사할 생각 같은 것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만 화가 난 얼굴로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쏘아보기만 하다가 성큼성큼 걸어 식당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반도 먹지 않은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새 요리가 든 접시를 들고 들어왔던 요아킴은 혼자 남은 아체리아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체리아 씨, 무슨 일이세요? 공작님과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것도 아냐, 요아킴. 미안하지만 나 대신 테이블을 좀 치워 줄래? 난 너무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럼요, 당연하죠! 얼른 올라가서 쉬세요. 안색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고마워.”

아체리아는 모자와 앞치마를 벗으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었다 닫으니 아늑하게 고여 있던 허브와 향신료의 향기가 두둥실 떠올랐다가 풀썩 가라앉았다.

“……피곤해.”

침대에 누운 아체리아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피곤함을 느껴 본 적은 살면서 그리 많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요리를 하면 되었다. 요리를 하다 보면 기분 나쁜 일 같은 건 금세 잊게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칼질을 하고 소스를 휘젓고 육수를 끓여 내도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 만든 닭고기 크로켓은 회심의 역작이라 할 법했는데도 그게 별로 기쁘지 않았다.

‘난 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클라우스를 피하면 그에 대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가라앉거나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아무리 그를 외면하려고 해도, 아무리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한 번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날뛰며 발길질을 해 댔다.

‘이게 다 대공 전하 때문이야.’

아체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에른스트라고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체리아의 원망은 자꾸만 에른스트에게로 그 화살을 돌렸다.

그가 그토록 진지하게 청혼하지 않았다면, 그와 어딘가 조용히 달아나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와 달아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클라우스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강렬한 기분에 사로잡혀 울어 버릴 것 같은 감상도 들지 않았으리라.

그러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전부 다 에른스트 탓인 것만 같았다. 아체리아는 화가 났다가 슬퍼졌다가, 싸늘하게 쳐다보던 클라우스의 시선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기를 갈팡질팡 반복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마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황야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막막한 기분이 그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왜 클라우스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 처음 만난 클라우스는 감히 말조차 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까칠한 도련님이었다. 어찌나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는지, 아체리아는 감히 클라우스에게 다가갈 시도를 해 보기도 전에 그를 외면하는 방법부터 터득했다.

자라서도 그 생각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클라우스가 죽을 거라 떠들어 댔지만 그는 결국 죽지 않았고, 허약하게나마 성인이 되어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 이후로도 그에 대한 아체리아의 감정은 어릴 때와 비교해 별달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얀 헨릭이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매번 남기는 그가 싫었고, 음식 귀한 줄 모르는 그가 얄미웠다. 심하게 편식을 하며 까탈스럽게 굴 때는 보모라도 된 것처럼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기까지 했다.

그러던 마음이 언제부터 서서히 그를 향해 열리기 시작했던 걸까. 그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었을 때부터? 아니면,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전부 아닌 것 같아.’

에른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옛날 모습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피부가 희고 약해 보이던 소년, 빼어난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만 웃지 않던 소공작.

불과 10년도 살지 못했던 어린 아체리아의 눈에 클라우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처럼 보였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 이따금 마을에 있는 수도원에 먹을 것을 얻으러 가면 볼 수 있었던 천사 조각상과 클라우스는 무척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 소년이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그런 갸륵한 마음은 뒤로 숨어 버리고 그를 얄미워하는 마음만이 튀어나와 있었지만, 아체리아는 단 한 번도 클라우스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편식을 하니 허약해 빠진 거라고 욕을 한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 남자는 이제 자신이 원하던 모습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그 마음이 두려웠다. 덥석 그의 손을 잡으면,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무섭고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해서 클라우스에게 공작가를 포기하라고 종용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난 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침대에 모로 누운 아체리아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눈을 감으며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확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떠나 버리면 공작님은 또다시 옛날로 돌아가게 되고 말지도 몰라.’

그런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를 좋아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요리사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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