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아체리아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후원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덤불과 나무 사이에 수십 개가 되는 눈이라도 달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대공 전하, 제발 일어나세요.”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제게는 이럴 만한 가치가 조금도…….”
“아니, 넌 충분히 가치가 있어. 내게는 특별해.”
“도대체 뭐가요?”
에른스트는 이제 아체리아의 차가워진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꿀을 머금은 듯 달콤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어.”
“옛날이라니…….”
“난 열다섯 살이 되기도 전부터 너에게 빠져 있었어.”
소년 시절이었다. 에른스트도 어렸거니와, 아체리아는 그보다 더 어렸다. 흔히들 홍안의 시절이라고 일컫는, 아직 청년조차 되지 못했던 에른스트의 첫사랑이었다.
그 무렵 아체리아는 공작저에서 가장 씩씩한 소녀였다. 고용인이었지만 공작 부인의 신임과 아낌을 받았고, 우유부단하지만 호인이던 공작도 아체리아의 활발함을 사랑했다. 비록 열 살이 되기도 전에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얀 헨릭과 예시카의 도움으로 아체리아는 그늘 없이 자라났다.
주방의 모든 것을 흡수하듯 배워 나가는 것도 그 시절의 아체리아가 느끼던 크나큰 기쁨 중 하나였다. 식사 때마다 얀 헨릭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꾸밈없는 소녀.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와 클라우스가 열세 살이었나? 열네 살이 되었을 때쯤…… 클라우스가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어.”
그런 적이 있었던가? 아체리아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별달리 생각나는 일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 클라우스는 최근 몇 달을 제외하고는 아프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열병이었지. 나는 클라우스보다 좀 더 어릴 때 한 번 걸렸다 나은 적이 있어서 문병을 갈 수 있었는데, 그때 네가 주방에서 울고 있는 걸 봤어.”
“제가 울었다고요?”
“그래. 클라우스가 걱정된다면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지. 기억나지 않아?”
거기까지 말을 들었을 때, 아체리아는 비로소 에른스트가 이야기하는 그때를 기억해 내었다. 오래전의 일이다.
열병에 걸린 클라우스는 다른 아이들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그리고 오래 앓았다. 원체 몸이 약한 아이였기 때문에 약을 써도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선대 비스몽트 공작 내외는 그 병으로 기어이 아들을 잃으리라 생각했다. 공작저의 분위기는 매일매일 우울하고 어두웠고, 덩달아 아체리아도 슬펐다. 아직 소년에 지나지 않는, 자신보다 고작 몇 살이 많을 뿐인 클라우스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때는, 공작님께서 정말 아프셨기 때문에…….”
“그래, 맞아. 심각한 일이었지. 그래서 너는 클라우스를 위해 울어 주었던 거고.”
“그 일이 지금…… 대공 전하께서 이러시는 것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내가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울고 있던 네가 주방으로 날 데리고 가더니 열을 내릴 수 있는 허브로 차 끓이는 걸 도와 달라고 했어. 클라우스에게 주고 싶다면서…… 그러면서 나에게도 그 차를 마시게 했었지.”
“제가요?”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병에 걸려 아플까 봐 걱정이 된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난 그 순간부터 너를 좋아했어.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것 따위야 모른 척해도 그만일 텐데, 마치 네 일인 양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네 모습이 좋아서.”
“전 그냥 겁이 났을 뿐이에요. 설마 그런 일을…….”
“물론 그때 그 모습만으로 네게 청혼을 하는 건 아니야. 그 이후로도…… 난 너의 많은 모습들에 여러 번 반했어. 누구보다 네 일을 즐거워하는 모습이나, 네가 쾌활하게 웃는 모습 같은 것을 보면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했어.”
아체리아는 설마 그런 일로 에른스트가 청혼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어느 순간 무엇에 빠져 버리면 걷잡을 수 없이 몰두하게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소년 시절의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에게 한 번 빠져 버린 마음을 수습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알고 싶고, 좀 더 만나 보고 싶었다. 사방을 쾌청하게 만드는 것 같은 그 웃음소리가 좋아서, 아체리아를 자꾸만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자라면서…… 나는 너의 모든 것이 다 좋아졌어, 아체리아. 네 빨간 머리도, 소나무 가지 같은 눈동자의 색깔도, 네가 씩씩하게 걷는 모습, 손에 흙을 묻히고 텃밭의 채소를 들고 있는 모습까지도.”
“……대공 전하.”
“그리고 그 마음은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천천히 무릎을 세우고 일어섰다.
“하루아침에 대답을 해 달라고 강요하진 않을게. 하지만,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해.”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하셔도, 저는…….”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그런 생각보다는 나를 선택할 만한 이유를 더 많이 생각해 준다면 좋겠어. 네가 대공비가 되길 원한다면 난 너를 기꺼이 대공비의 자리에 앉힐 거야. 네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조용히 사는 삶을 원한다면 나는 또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
“…….”
에른스트는 붉어진 제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고는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체리아까지도 갑자기 양 뺨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네 마음이 정리가 되면 내게 말해 줘. 어떤 선택이든.”
에른스트의 입술이 아체리아의 동그란 이마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잘 자, 아체리아.”
“가시는 건가요?”
“응. 필리파 왕녀와는 어차피 나중에 또 만나게 될 거니까 오늘은 이만 가 보려고 해. 계속…… 너를 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기도 하고 말이야.”
마지막 말에 이르러서야 에른스트는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기색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는 회랑에 이르기까지 아체리아를 배웅해 주고는, 어두운 뜰을 곧장 가로질러 이윽고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혼자 연회장으로 돌아온 아체리아는 한 대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돌아왔음을 알아챈 클라우스가 가까이 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을 것이다.
“아체리아.”
약간 서늘한 손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느낌에 아체리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클라우스였다.
“어딜 다녀온 거야? 길이라도 잃어버린 줄 알고 지금 찾으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아…… 죄송합니다.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냥…… 산책을 좀 하고 왔어요.”
“열이라도 있는 거야? 얼굴이 빨간데.”
클라우스의 손끝이 뺨과 이마에 닿자, 아체리아는 문득 에른스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닙니다, 공작님. 아프지 않아요.”
“거짓말할 생각 말고.”
“정말이에요.”
아체리아는 미심쩍어하는 클라우스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나 아무것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로지 에른스트가 했던 말만이 머릿속에 꽉 차서 주변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네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조용히 사는 삶을 원한다면, 나는 또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 아마 사실일 것이다. 에른스트는 지금껏 저에게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체리아는 에른스트의 말에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에른스트를 좋아했지만, 그 마음이 사랑은 아니었다.
‘그럼 공작님은?’
순간, 아체리아의 마음속에서 낯선 목소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옆에 앉은 클라우스에게로 고개를 돌린 아체리아의 눈동자가 복잡한 빛을 띤 채 가라앉았다.
‘공작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아체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고개도 아래로 숙여졌다.
“피곤해? 돌아갈까?”
클라우스가 아체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체리아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작님. 돌아가고 싶어요.”
“마차를 대기시키라 말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춤을 추러 나갔기 때문에, 테이블에는 아체리아 혼자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에른스트는 자신을 위해 대공의 자리를 포기하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렇다면 클라우스는?
만약 에른스트가 아니라 클라우스를 선택한다면, 자신은 공작 부인이 되는 걸까? 드레스를 차려입고,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사교 모임에 나가 주목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 건 못 해.’
아체리아는 갑자기 멀미라도 앓는 사람처럼 가볍게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온 클라우스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왜 그래? 역시 몸이 좋지 않은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힘들다면 억지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오늘은 왕성에 머물면서 치료사를…….”
“공작님, 전 정말로 괜찮아요.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체리아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려 나왔다. 예상치 못한 일에 놀란 것은 클라우스뿐만이 아니었다. 춤을 추면서 그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던 릴리엇이 재빨리 아체리아 앞으로 달려왔다.
“아체리아, 무슨 일이야? 왜 그러니?”
“란츠호프 아가씨, 저는…… 전 괜찮아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왕녀님께 인사를 전해 주세요.”
“아체리아? 아체리아, 잠깐만!”
연회장을 뛰쳐나가는 그녀의 등 뒤로 릴리엇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클라우스가 달려 나오는 구둣발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걸음을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
공작 부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다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그저 요리사이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래도…….’
에른스트의 청혼으로 아체리아는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자신은 에른스트를 사랑하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에게 있어 자상한 사촌 오빠 같은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그는 달랐다.
에른스트의 청혼을 받으며 난처했던 것은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을 때, 아체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클라우스의 것이었다.
클라우스와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공작 부인이 될 자신은 없었다.
그를 원하는 희미한 마음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동떨어질 수 없다는 강한 거부감이 아체리아의 속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